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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린 密輸 事件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사카린 密輸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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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린 密輸 事件 1966年 三星그룹 의 系列社인 韓國肥料工業 株式會社가 사카린을 建設資材로 僞裝하여 大量 密輸入한 事件을 말한다. [1]

槪要 [ 編輯 ]

1966年 5月 24日 三星이 慶南 蔚山市 에 工場을 짓고 있던 韓國肥料가 사카린 2259 砲隊(藥 55t)를 建設資材로 꾸며 稅關 몰래 들여와 販賣하려다 들통이 났다. [2] 뒤늦게 이를 摘發한 釜山稅關은 같은해 6月 1059 包袋를 押收하고 罰金 2千餘萬 원을 賦課하였다. 三星은 韓國肥料 工場을 짓기 위해 日本 미쓰이 物産으로부터 政府 의 支給保證 아래 4千餘萬달러의 商業借款 을 빌렸다. 사카린 密輸를 現場指揮했다고 밝힌 이맹희 氏가 1993年 發刊한 《回想錄 - 묻어둔 이야기》에서 韓國肥料 사카린 密輸事件은 朴正熙 大統領과 李秉喆 會長의 共謀 아래 政府機關들이 積極 감싸고 엄청난 規模의 組織的인 密輸였다고 다음과 같이 告白하였다.

1965年 末에 始作된 韓國肥料 建設過程에서 日本 미쓰이는 工場建設에 必要한 次官 4200萬 달러를 機械類로 代身 供給하며 三星에 리베이트로 100萬 달러를 줬다. 아버지( 李秉喆 會長)는 이 事實을 朴 大統領에게 알렸고 朴 大統領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方向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現札 100萬달러를 日本 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三星은 工場 建設用 裝備를, 靑瓦臺는 政治資金이 必要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密輸를 하자는 쪽으로 合意했다. 密輸現場은 내(이맹희 氏)가 指揮했으며 朴 政權은 隱密히 도와주기로 했다. 密輸를 하기로 決定하자 政府도 모르게 몇가지 欲心을 實行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平素 들여오기 힘든 工作機械나 建設用 機械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密輸한 主要 品目은 便器, 冷藏庫 , 에어컨 , 電話機 , 스테인레스 板과 사카린 原料 等이었다 [3] .

사카린 密輸 事件이 이토록 國家的으로 巨大한 波紋이 일어난 것은 크게 두가지 理由가 있다. 첫番째는 朴正熙 政府가 내걸은 國政 口號가 舊惡 一掃, 卽, 腐敗剔抉이었는데, 이番 사카린 事件으로 政權의 矛盾이 드러났다는 點이었다. 두番째는 當時 三星이 中央日報를 設立하고 言論界에 進出하였는데, 競爭 言論社들이 執拗하게 三星의 非理를 파헤치고 攻擊했던 것이다. 이러한 複合的인 作用으로 사카린 事件은 全國民籍, 全國家的으로 큰 波長이 일었다.

國會 汚物 投擲 事件 [ 編輯 ]

1966年 9月 22日 , 사카린 密輸事件에 對한 對政府 質疑 途中, 김두한 議員이 國務委員席에 앉아 있던 정일권 國務總理, 장기영 副總理 等 數 名의 閣僚들을 向해 汚物을 投擲하는 事件 이 發生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 사카린密輸事件 [─密輸事件]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2. 이동현 <이슈로 본 韓國現代史> 민연 2002 p192
  3. “(言論權力) 中央日報 '三星' 감싸기” . 한겨레 . 2001年 4月 2日. 2009年 12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5月 26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