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皇 그레고리오 7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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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7歲
任期 1073年 4月 22日
前任者 알렉산데르 2歲
後任者 빅토르 3歲
個人情報
出生이름 日데브란도 디 小兒나
出生 1015年
神聖 로마 帝國 소바나
腺腫 1085年 5月 25日
아풀리아 公國 살레르노

敎皇 그레고리오 7歲 ( 라틴語 : Gregorius PP. VII , 이탈리아語 : Papa Gregorio VII )는 第157代 敎皇 ( 1015年 ~ 1085年 5月 25日 , 在位: 1073年 4月 22日 - 1085年 5月 25日 )이다. 本名은 日데브란도 디 小兒나 ( 이탈리아語 : Ildebrando di Soana)이다. 樞機卿 時節부터 墮落하고 腐敗한 로마 가톨릭 敎會를 改革하는데 앞장서며 改革派 聖職者들의 리더 役割을 하였다.

改革家 敎皇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特히 皇帝 하인리히 4歲 와 가장 激烈하게 敍任權 紛爭 을 겪으며 카노사의 屈辱 (1077年)을 皇帝에게 안겨준 人物로 有名하다. 敎皇으로 選出되기 前에 敎皇과 神聖 로마 帝國 皇帝의 關係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그레고리오 7世는 가톨릭 聖職者들을 對象으로 數世紀에 걸쳐 進行된 禁慾 敵 方式을 매우 嚴格하게 施行한 最初의 敎皇이었으며, 聖職賣買 慣行을 크게 叱咤하며 뿌리뽑는데 努力하였다.

屈辱을 當했던 하인리히 4世가 獨逸 內 政權掌握에 成功한 後 1084年에 武力으로 로마를 占領하였다. 山탄젤로 城으로 避身한 그레고리오 7世는 노르만族에게 救援要請을 하였다. 노르만族의 도움으로 自由의 몸이 되었으나 그 過程中에 노르만族에 依해 로마 掠奪 (1084年) 이 恣行되고 말았다. 掠奪에 對한 市民들의 憤怒와 怨望이 極에 達하자 身邊에 威脅을 느낀 敎皇은 南部 이탈리아로 亡命을 떠났으며 亡命地에서 死亡하였다. 1584年 敎皇 그레고리오 13歲 에 依해 諡福 되었으며, 1728年 敎皇 베네딕토 13歲 에 依해 諡聖 되었다.

略歷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그레고리오는 오늘날 이탈리아 中部 토스카나州 南쪽에 있는 그로세討議 小바나에서 태어났다. 本來 그는 卑賤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傳해진다. [1] 요한 게오르크 에스토아 에 따르면, 그레고리오의 本名은 日데브란도 步니치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一部 確認되지 않은 情報에 따르면, 어린 時節에 그는 工夫를 위해 로마로 갔으며, 그의 三寸은 아벤티盧 언덕 에 있는 修道院의 院長( 아빠스 )였다고 한다. 日데브란도가 모신 長上들 中에는 博學多識한 아말피의 大主敎 라우렌시오를 비롯하여, 後날 敎皇 그레고리오 6歲 가 되는 요한네스 그라티아누스가 있었다. [2] 그레고리오 6世가 神聖 로마 帝國의 皇帝 하인리히 3歲 에 依해 廢位되어 獨逸로 亡命길에 오를 때, 일데브란도는 그를 따라서 쾰른 까지 갔다.

몇몇 年代記 作家에 따르면, [3] 1048年 그레고리오 6世가 腺腫하자 일데브란도는 클뤼니 修道院으로 갔다고 한다. 勿論 그가 클뤼니 修道院에 갔다고 해서, 그가 그곳의 搜査가 된 것은 아니다. 以後 일데브란도는 툴의 아빠스 브루노와 로마까지 同行했다. 로마에 到着한 브루노는 敎皇으로 選出되어, 敎皇 레오 9歲 라는 이름으로 敎皇左에 着座하였다. 레오 9世는 自身과 同行한 일데브란도를 副題 로 敍品함과 同時에 敎皇廳 行政官에 임명하였다.

레오 9世는 투르의 베렌가리우스 에 依해 聖體聖事 에 對한 論爭이 觸發되자, 일데브란도를 敎皇 特使로 임명하여 투르로 派遣 보냈다. 레오 9歲의 뒤를 이어 卽位한 敎皇 빅토르 2歲 는 일데브란도를 再次 敎皇 特使로 임명했으며, 빅토르 2歲의 뒤를 이어 卽位한 敎皇 스테파노 9歲 는 그를 루카의 안셀모 와 함께 獨逸로 보내서 當時 帝國의 攝政이었던 푸아투의 아그네스 太後로부터 自身의 敎皇 選出에 對한 承認을 받아오라고 指示하였다.

스테파노 9世는 로마로 돌아가기 前에 腺腫했지만, 일데브란도는 로마에 無事히 돌아갔다. [4] 以後 그는 로마人 貴族들이 對立敎皇 베네딕토 10歲 를 選出함으로 敎會에 닥친 危機를 解決하는데 있어 重要한 役割을 하였다. 對立敎皇 베네딕토 10世는 아그네스 皇太后의 뜻에 따라 자리에서 쫓겨나고, 피렌체 의 主敎가 敎皇 니콜라오 2歲라는 이름으로 卽位하였다. 日데브란도는 直接 카푸아의 리카르도 1歲 가 支援한 노르만族 記事 300名을 이끌고 對立敎皇이 逃亡간 갈레리아 안티카 性 [5] 을 攻略해 占領하는 데 成功했다. 그 功勞로 以後 그는 로마 敎會의 首席副제 로 서임되었으며, 敎會 行政에 있어 가장 重要한 人事로 頭角되었다.

1061年 敎皇 選擧에서 루카의 臺안셀모가 새 敎皇으로 選出되어 敎皇 알렉산데르 2歲 로 卽位하면서, 일데브란도는 敎會에서 가장 强力한 影響力을 지닌 人士가 되었다. 새 敎皇은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提案한 敎會 刷新 作業을 始作했다. 日데브란도는 로마와 이탈리아 南部 노르만 王國의 和解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北部의 派타리아 運動과의 半獨逸 同盟 締結, 樞機卿들에게 새 敎皇을 選出할 수 있는 固有의 權限을 附與하는 敎會法을 導入하는 等에 있어서 크게 活躍하였다.

敎皇 [ 編輯 ]

敎皇 選出 [ 編輯 ]

敎皇 그레고리오 7歲를 描寫한 11世紀 그림

1073年 4月 21日 알렉산데르 2世가 善終한 後, 라테라노 大成殿 에서 그의 葬禮 미사가 擧行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聖職者들과 平信徒들 사이에 큰소리가 울려퍼졌다. "日데브란도를 敎皇으로!", "복되신 베드로께서 일데브란도 首席副題를 選擇하셨다!" 그 直後, 같은 날에 日데브란도는 사람들에게 산 피에트로 人 빈콜리 聖堂 으로 案內를 받아 그곳에 모인 樞機卿들에 依해 敎會法의 節次에 따라 敎皇으로 選出되었으며, 로마 司祭團이 이에 同意한 瞬間 群衆의 拍手喝采를 받았다.

當時 聖職者들과 平信徒들이 聖職者들과 平信徒들이 일데브란도를 支持하면서 일어난 이러한 突發的인 行動이 純全히 卽興的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事前에 徹底히 準備된 狀態에서 일어난 結果物인지 與否에 對해서는 當時에는 勿論 오늘날까지도 歷史學者들 사이에서 論爭의 對象이 되고 있다. 確實히 그레고리오 7歲가 選出된 過程은 비록 私的인 感情에 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反對者들한테 强度 높은 非難을 샀다.

그가 敎皇으로 選出된 지 몇 年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敎皇이 된 것이 適法했느냐를 놓고 批判이 일어났다는 事實로 보아, 이미 不信의 感情이 자리매김했다는 事實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歲의 敎皇 選出이 매우 非正常的인 方式으로 이루어졌으며, 1059年 敎會法에 明示된 規定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事實은 그의 選出 過程 當時 記錄으로 보아 分明하다. 무엇보다도 새 敎皇의 選出에 있어서 事前에 神聖 로마 帝國의 皇帝에게 諒解를 求해야 한다는 敎皇 니콜라오 2歲 의 主張은 完全히 無視되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歲의 選出에 對한 有效性을 유리한 方向으로 바꾼 것은 大多數 로마 市民들이 그에게 强力한 支持意思를 表明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오 7世가 卽位한 지 얼마 되지 않아 作成한 初期 書信들을 보면, 分明하게 이러한 事實을 認定하면서 自身의 選出이 民衆의 支持를 받고 있음을 分明히 하였다. 1073年 5月 22日 그는 司祭品을 받았으며, 같은 해 6月 30日에는 敎皇이 되기 위해 主敎品을 받았다.

1073年 4月 22日 敎皇 選出 發表文에서는 그레고리오 7歲를 새 敎皇으로 選擇한 理由에 對해 그가 “信心이 깊고, 하느님과 사람들에 對한 該博한 知識을 갖고 있으며, 公明正大하고, 정의로우며, 逆境에 剛하며, 富裕함을 節制할 줄 알면서 使徒들의 가르침대로 行하는 行動主義者인 데다가 떳떳하고, 謙遜하며, 冷徹하며, 純潔하고, 親切이 몸에 배여있으며, 自己 自身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인 同時에 어린 時節 어머니 敎會의 따뜻한 품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 어느덧 삶의 頂點에 다다랐을 즈음 首席副제로서의 威嚴을 갖추는 水準까지 到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일데브란도를 敎皇이자 使徒의 後繼者로 選擇하였다. 그는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이름은 앞으로 永遠히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라고 나온다. [6]

그레고리오 7歲의 첫 番째 對外政策은 로베르 기스카르 가 이끄는 노르만族 과 和解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結局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7世는 北유럽 諸侯들에게 十字軍 遠征을 要請했으나 거절당한 後, [7] 베네벤토의 란둘프 6歲 카푸아의 리카르도 1歲 等 노르만 諸侯들로부터 支援意思를 받자 1074年 로베르를 破門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라테라노 宮殿 에서 敎會會議를 召集하여 聖職賣買 를 糾彈함과 同時에 聖職者들의 獨身 生活을 再闡明했다. 이때 發表된 勅令들은 다음해(2月 24日-28日) 이를 違反할시 波紋 될 것이라고 警告함으로써 한層 더 强調되었다. [7] 特히 2次 會期에서 그레고리오 7世는 오직 敎皇만이 主敎를 敍任하거나 免職시킬 수 있으며, 더불어 主敎의 小任地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內容의 勅令을 發表하였다. 이는 뒤이어 일어날 敍任權 鬪爭을 惹起하였다.

衣服 [ 編輯 ]

이탈리아의 歷史學者 아고스티노 바라비치니 바리아니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를 통해 많은 사람이 흰色 手段을 最初로 입은 敎皇이 敎皇 비오 5歲 (1566?1572)라고 여기는 通說은 잘못된 것이라는 見解를 내놓았다. 덧붙여, 그는 文書上 敎皇의 흰色 手段이 처음으로 登場한 것은 1274年 敎皇 그레고리오 10歲 때였다고 썼다. 그는 “1073年 그레고리오 7世는 敎皇 選出 直後 붉은色 망토를 着用함으로써 莊嚴하게 교황권을 附與받았음을 알린 最初의 敎皇이었다”고 言及하면서 “傳統的으로 選出된 敎皇은 두 가지 色相의 衣服을 着用하는데, 바로 붉은色(某제타, 신발, 망토)과 흰色(수단, 洋襪)이다.”라고 덧붙였다. [8] [9]

하인리히 4世와의 葛藤 [ 編輯 ]

그레고리오 7世의 敎會 및 政治와 關聯된 主要 政策은 大部分 獨逸과 聯關된 것이었다. 하인리히 3歲 의 死亡 後 獨逸 皇室은 深刻하게 權力이 弱化되어 가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 하인리히 4歲 는 帝國 內에 山積한 커다란 難題들과 맞닥뜨렸다. 이러한 情勢는 그레고리오 7世에게 相當한 도움이 되었다. 이는 1073年 하인리히 4世가 겨우 24歲의 靑年에 不過했다는 點으로 인해 더욱 유리한 狀況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7世가 敎皇으로 選出된 때부터 2年餘 동안 하인리히 4世는 작센 戰爭 때문에 그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1074年 5月 하인리히 4世는 過去 그레고리오 敎皇이 波紋韓 敎會會議 委員들과 親密한 關係를 繼續 維持한 罪를 뉘우치기 위해 뉘른베르크 에서 敎皇 特使들이 參席한 가운데 告解聖事를 본 다음 敎皇에게 順命을 盟誓하고, 敎會를 改革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約束하였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처음에는 敎皇에게 信任을 얻었다.

하지만 1075年 6月 9日 랑엔살자 戰鬪 에서 작센 公國을 굴복시키자마자 곧바로 態度를 바꾸었다. 그는 躊躇없이 이탈리아 半島 北部에 對한 自身의 權利를 다시 主張하였다. 그는 派타리아 [10] 運動을 鎭壓하기 위해 에버하르트 伯爵과 테달도 神父를 各各 롬바르디아와 밀라노 大敎區에 보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질질 끌었던 問題였던 노르만 工作 로베르 기스카르 와의 同盟 關係를 다시 맺으려는 試圖를 하였다.

이러한 하인리히 4歲의 行動에 對해 그레고리오 7世는 1075年 12月 8日 多少 거친 言辭가 담긴 書信을 보내는 것으로 應酬했다. 書信에서 그는 敎皇에게 순명하지 않아 끝내 破門당한 聖職者들에 對한 支援을 繼續한 하인리히 4歲의 行動을 批判했다. 同時에 그는 다음과 같은 內容을 暗示하는 口頭 메시지도 적어 보냈다. 卽, 그의 責任으로 보일 수 있는 待罪들 때문에 그가 敎會에서 追放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王位도 박탈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075年 그레고리오 7世는 예수 聖誕 大祝日 밤 미사를 執典하던 中에 反對者 첸시오 1歲 프란지派네 ( en )의 奇襲을 받아 拉致됐으나, 그를 매우 尊敬하던 로마 市民들이 첸시오 1歲의 邸宅을 찾아가 攻擊함으로써 威脅을 느낀 첸시오 1世에 依해 다음날 풀려났다.

敎皇과 皇帝의 激突 [ 編輯 ]

한便 일찍이 前例가 없을 程度로 剛한 敎皇의 問責을 받은 하인리히 4世와 獨逸 宮廷은 크게 激忿하였다. 이에 對한 反應으로 그들은 서둘러 1076年 1月 24日 獨逸의 보름스 에서 緊急 會議를 召集하였다. 獨逸의 高位 聖職者들 中에는 그레고리오 7歲에 反感을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過去에 그레고리오 7世와 親密한 關係였으나 나중에 그의 敵對者가 된 로마의 樞機卿 휴고 칸디두스 亦是 보름스 會議에 參席하기 위해 서둘러 獨逸로 갔다. 보름스 會議는 칸디두스 樞機卿이 그레고리오 7歲를 告發한 嫌疑들을 모두 認定하고, 그를 廢位시키는 決議案을 採擇했다. 決議文 內容은 그레고리오 7世에 對한 非難으로 가득찼으며, 獨逸 主敎들은 그에 對한 順命을 公式的으로 撤回하였다. 하인리히 4世는 그레고리오 7歲의 廢位를 宣言하면서, 로마 市民들에게 새 敎皇을 選出할 것을 要求하였다. [11]

보름스 會議는 두 名의 主敎를 이탈리아로 보내, 彼我첸車 에서 시노드를 召集하도록 하였다. 彼我첸車 시노드에서 그들은 랑고바르드 主敎들로부터 支持를 얻는 데 成功하였다. 파르마의 롤란드는 라테라노 大聖殿에 召集된 시노드에 參席하여 運 좋게 演說할 機會를 얻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그레고리오 7歲의 廢位가 決議되었다고 알렸다. 시노드에 參席한 敎父들은 이 消息을 듣고 처음엔 놀랐으나, 以內 憤怒로 빗발쳤다. 多幸히 그레고리오 7歲의 忍耐로 롤란드는 그 자리에서 逮捕되거나 暴行을 當하지 않고 無事히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 그레고리오 7世는 하인리히 4世에 對한 波紋 을 莊嚴하게 宣布하였으며, 그의 帝位를 剝奪하는 同時에 帝國 市民들의 그에 對한 忠誠을 免除시켜 주었다. 世俗 君主를 破門하고 廢位시키는 것은 매우 大膽한 行動이다. 4世紀 基督敎가 國交化된以後 單 한番도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前代未聞의 事件이라 할 수 있다. 皇帝가 敎皇을 廢位시킨 先例는 많았으며 그 反對되는 境遇는 없었다. [12]

그레고리오 7歲가 宣布한 破門狀의 內容을 妖惡하자면 하인리히 4歲를 敎會 밖으로 내쫓는 同時에 그의 帝位를 剝奪한다는 것이다. 이 宣告가 實質的인 效果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單純한 엄포에 그칠 것인지는 그레고리오 7世보다는 하인리히 4歲의 臣下들, 特히 獨逸 諸侯들의 意中에 달려 있었다. 當時 史料를 보면, 하인리히 4世에게 내려진 波紋은 獨逸과 이탈리아에 큰 反響을 불러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30年 前 하인리히 3歲 는 敎皇職이 自身의 것이라고 主張한 세 사람을 廢位시킴으로써 敎會에 크게 貢獻한 人物로 定評이 나 있었다. 하인리히 4世는 이러한 父親의 前轍을 흉내내려고 했으나, 民心을 얻지 못해 成功하지 못했다. 獨逸의 境遇 그레고리오 7世를 支持하는 사람들이 急速度로 늘어났는데, 이러한 輿論의 反應에 힘입어 各 地域 諸侯들은 敎皇의 決定을 尊重한다는 名分下에 하인리히 4世에 對한 反旗의 機會를 잡았다. 聖靈 降臨 大祝日 에 하인리히 4歲가 그레고리오 7歲에 對抗할 措置를 取하기 위한 目的으로 貴族會議를 召集했지만, 정작 會議에 參席한 貴族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작센 公國은 다시금 班役割 매우 좋은 機會를 잡았으며, 하인리히 4世를 反對하는 勢力은 나날이 힘을 키워갔다.

카노사의 屈辱 [ 編輯 ]

카를로 엠마누엘레 敎皇 그레고리오 7世에게 容恕를 求하는 하인리히 4歲

이제 政局은 하인리히 4世에게 매우 不利하게 돌아가기 始作했다. 敎皇 特使인 파사우의 알트만 主敎가 熱心히 輿論을 움직인 結果, 獨逸 諸侯들은 自身들의 새 君主를 選出하기 위해 10月 트레부르 에 모여 會議를 가졌다. 當時 라인江 西쪽 堤防의 오펜하임 에 起居하던 하인리히 4世는 諸侯들이 누구를 새 君主로 推戴한 것인지 合意하는데 失敗하는 바람에 艱辛히 廢位를 謀免할 수 있었다.

그러나 諸侯들 사이의 意見 不一致는 單純히 그들의 決定을 暫時 遲延한 것에 不過하였다. 諸侯들은 또한 하인리히 4歲가 그레고리오 7世에게 마땅히 謝罪하고 忠誠을 盟誓해야 한다고 宣言하였다. 또한 그들은 100日 以內에 하인리히 4歲가 波紋에서 解除되지 않을 境遇, 神聖 로마 帝國의 君主 자리는 空席 狀態인 것으로 看做하기로 合意하였다. 더불어 諸侯들은 事態를 早期에 매듭짓기 위해 그레고리오 7歲를 아우크스부르크 에 招待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러한 一連의 過程을 지켜보면서 하인리히 4世는 自身이 앞으로 어떻게 行動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100日이 지나기 前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그레고리오 7世로부터 波紋 撤回를 받지 못하면, 自身의 地位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 그는 使節團을 그레고리오 7世에게 보내 和解를 試圖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自身이 直接 이탈리아로 가기로 하였다.

한便 그레고리오 7世는 이미 로마를 떠나, 獨逸 諸侯들에게 軍士들을 보내 1月 8日 만토바 로 떠나는 自身을 護衛해줄 것을 期待한다는 뜻을 넌지시 비추었다. 이에 따라 扈衛隊가 派遣되었지만, 하인리히 4世가 오고 있다는 消息을 듣고 遑急히 되돌아갔다. 하인리히 4世는 부르고뉴 地域을 지날 때, 랑고바르드族으로부터 熱烈한 歡迎을 받았다. 그러나 武力을 動員해 그레고리오 7歲를 制壓하라는 그들의 提案을 拒絶하였다. 1077年 1月 25日, 하인리히 4世는 少數의 隨行員만을 帶同한 채 아펜니노 山脈의 北쪽에 있는 카노사 에서 懺悔를 象徵하는 옷을 입고 그곳에 있는 그레고리오 7歲를 謁見하기 爲해 城門 앞에서 3日間 기다렸다. 이 事件이 그 有名한 카노사의 屈辱 으로 敎皇權力이 皇帝權力보다 優位에 서게 되는 轉換期에 벌어진 象徵的인 事件이라 할 수 있다. [13]

그레고리오 7世는 容恕할 생각이 없었으나 側近들과 支持者들의 거듭된 懇請에 못이겨 波紋을 撤回하였다. 萬若 그레고리오 7世가 하인리히 4歲의 悔改를 받아들여 容恕해 주지 않았다면, 當然히 아우크스부르크 會議의 結果와 以後 歷史 展開는 完全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罪를 認定하고 뉘우치는 사람을 容恕하며 寬大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拒否한다는 것은 基督敎 敎理上 不可能하였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7世에게 있어 宗敎的 責務는 政治的 利害得失보다 우선시되었다.

그러나 波紋이 撤回되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完全히 和解한 것은 아니었다. 그레고리오 7世와 하인리히 4歲의 사이를 갈라놓은 根本的인 問題인 敍任權 問題가 全혀 解決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4世는 自身에게 내려진 波紋이 撤回되었기 때문에 廢位 宣告 또한 자연스럽게 無爲로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곧 새로운 紛爭의 씨앗을 낳았다. 當時 그레고리오 7世는 自己 行動의 自由를 確保하는 데에만 神經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이 問題는 미처 神經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番째 내려진 波紋 [ 編輯 ]

獨逸內 權力鬪爭 [ 編輯 ]

한便 하인리히 4世에게 내려진 波紋이 撤回된 後에도 反抗的인 獨逸 貴族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077年 3月 포히하임 에서 라인펜델의 루돌프 孔雀을 새 君主로 擁立하기로 決意하였다. 새 皇帝를 뽑기 위한 選擧에서 敎皇 特使들은 始終一貫 中立을 維持했으며, 그레고리오 7歲 亦是 꽤 오랫동안 어떠한 立場도 表明하지 않고 沈默을 지켰다. 皇帝波와 貴族派는 서로 勢力이 比等했기 때문에, 兩側은 敎皇을 自身들의 便으로 끌어들여 相對에 對한 優位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두番째 波紋 [ 編輯 ]

敎皇이 어정쩡한 行動을 繼續 取하면서 兩側 모두로부터 信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結局 루돌프 工作이 1080年 1月 27日 포히하임 戰鬪 에서 皇帝軍을 相對로 勝利를 거두자, 그레고리오 7世는 루돌프를 支持하는 쪽으로 立場을 決定하였다. 색슨족의 繼續된 壓力과 포히하임 戰鬪에 對한 消息을 들은 그레고리오 7世는 中立을 지키면서 조용히 觀望하는 旣存의 立場을 撤回하고, 1080年 3月 7日 하인리히 4歲를 再次 波紋韓 同時에 그의 廢位를 宣言했다. 그러나 4年 前과는 달리 이番에 내려진 敎皇의 決定에 對해 輿論의 反應은 極度로 차가웠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全般的으로 이番 處事에 對해 果然 하인리히 4世에게 내려진 두 番째 波紋이 正當한지에 對해 疑問을 갖고 있었다.

두番째 波紋의 不當性 [ 編輯 ]

前後事情이 어찌되었던간에 1077年에 敎皇은 하인리히 4歲를 容恕하고 波紋을 解除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獨逸 貴族들은 敎皇의 波紋 撤回에 反撥하며 루돌프를 獨逸의 對立國王으로 選出한후 하인리히 4世에게 敵對行爲를 했다. 敎皇이 波紋을 撤回했다는 것은 貴族들이 하인리히 4世에게 했던 忠誠盟誓가 다시 有效해졌다는 뜻이며 충성해야할 義務가 있다. 그런데 그리하지 않았으니 이는 封建體制下에 봉신으로서 違法行爲를 한 것이었다. 이런 狀況이라면 敎皇은 卽時 對立王과 그의 追從者 全部를 波紋해야 한다. 敎皇의 峻嚴한 決定에 反旗를 든 者들이니 하인리히 4世에게 1076年에 내린 波紋처럼 卽刻的으로 斷乎하게 波紋을 내렸어야 했다. 그렇치만 和解를 仲裁한다는 名分으로 內戰이 벌어진 3年間 量子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그러다가 1080年이 되어서야 다시 하인리히 4世에게 두番째 波紋을 내렸다. 이미 波紋이 解除되었고 波紋을 받아야 할 對象은 敎皇의 措置에 不服한 루돌프와 그를 選出한 反對派 貴族들이었다. 그런데 그 反對였다. 이는 敎會 改革을 持續的으로 進行하기 위한 措置였다. 今番 두番째 敎皇의 破門 措置는 效力이 全혀없었을 뿐만 아니라 境遇와 理致에도 어긋났다. 敎皇의 決定에 不服한 者들을 膺懲하는 데 앞장섰던 하인리히 4歲를 波紋韓 措置는 누가 보아도 不當하였다. 그러므로 하인리히 4世에 對한 2次 波紋은 敎皇權 濫用의 代表的인 事例가 되었으며 兩側 모두에게 全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權力을 掌握한 하인리히 4歲 [ 編輯 ]

反對派의 求心點이였던 루돌프 工作이 1080年 10月 16日에 死亡하면서 狀況은 더욱 나빠졌다. 以後 1081年 8月 새 君主 候補로 룩셈부르크의 헤르만이 떠올랐지만, 貴族派의 指導者가 되기에는 그의 力量이 不足하였다. 反面에 하인리히 4歲의 勢力은 날이 갈수록 强盛해져만 갔다. 歲月이 흐르면서 한層 더 老鍊해진 그는 대단히 果敢하게 鬪爭을 開始했다. 그는 自身에게 내려진 敎皇의 波紋과 廢位는 不法的이라면서 認定하기를 拒否했다. 그의 影響으로 6月 16日 브레私奴네 에서 召集된 敎會會議에서는 그레고리오 7歲를 敎皇職에서 廢位시킨 다음 라벤나 의 大主敎 귀베르트를 새 敎皇으로 擁立하기로 決意하였다. 1081年 하인리히 4世는 이탈리아에서 反(反)敎皇 運動을 展開하였다. 그레고리오 7世는 갈수록 權力이 弱化되어 갔으며, 13名의 樞機卿이 그의 곁을 떠났다.

獨逸의 로마 侵攻과 復讐 [ 編輯 ]

1081年 로마에 到着한후 3年間의 努力끝에 1084年 3月에 로마 奪還에 成功한다. 로마가 점령당하자 그레고리오 7世는 山탄젤로 性 으로 避身하였다. 하인리히 4世는 自身을 神聖 로마 帝國의 皇帝로 戴冠式을 擧行해 준다면 귀베르트를 罪囚로 넘기겠다고 敎皇에게 提案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世는 그의 房門을 一切 拒絶하였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世는 하인리히 4世와 언젠가는 和解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가 敎會會議에 出頭하여 公開的으로 懺悔해야만 謁見을 許諾하겠다는 條件을 내걸었다.

하인리히 4世는 겉으로는 이러한 條件에 따르는 척하면서, 實際로는 主敎들이 모이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였다. 하인리히 4歲의 갖은 妨害에도 不拘하고, 少數의 主敎들이 가까스로 모여 敎皇에게 助言한 結果, 하인리히 4世에 對한 波紋이 再次 宣布되었다. 이 消息을 들은 하인리히 4世는 3月 21日 로마에 再入城하여 1084年 3月 24日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새로운 敎皇 클레멘스 3世로 擁立하였다. 하인리히는 自身이 세운 敎皇을 통해 神聖 로마 帝國의 皇帝로 戴冠式을 올렸다. 山탄젤로城에 隱身한 敎皇 그레고리오 7世는 南部 이탈리아 支配者 로베르에게 도움을 要請했다.

노르만族에 依한 로마 掠奪 [ 編輯 ]

1084年 5月에 3萬 6,000名의 軍士를 이끌고 로베르가 로마로 進擊했다. 消息을 接한 皇帝 하인리히 4世는 不必要한 戰鬪를 치를 理由가 없다고 判斷하여 로베르가 到着하기 3日 前에 退却해버렸다. 한便 反敎皇派(飯 그레고리오) 勢力은 로베르 軍隊의 로마 進入을 反對하며 抵抗하였다. 이들은 敎皇 그레고리오 7歲의 지나치게 急進的인 改革에 對해 反撥을 넘어 敵愾心을 품고 있었다. 더욱이 敎皇權을 濫用하여 敍任權 紛爭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獨逸 軍隊가 로마를 3年 동안 包圍, 攻擊함에 따라 外部와 交流가 斷絶되며 民生經濟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나 敎皇은 끌까지 固執을 부리며 責任 있는 措置를 取하지 않았다.

로베르가 이끄는 노르만族과 사라센 出身 軍隊는 都城안으로 進入하며 都心 곳곳에 불을 질러 騷亂을 피우고 注意力을 分散시켰다. 그리고 그 混亂한 틈을 利用하여 都心을 빠르게 가로질러 山탄젤로 城으로 進入한후 敎皇을 救出하였다. 救出 作戰 中에 抵抗軍과 市街戰이 벌어졌고 이 過程 中에 掠奪도 恣行하였다. 掠奪이 終了된 後 都市 로마는 滿身瘡痍가 되었다. 今番 掠奪의 特徵은 都市 곳곳 불을 질러서 建物들이 많이 消失되었다는 點이다. 特히 聖堂들에 불을 많이 질렀는데 이는 當代의 聖堂들이 軍事的 機能도 遂行했기 때문이다. 聖堂은 堅固한 石造建物로서 天然要塞 役割을 했다. 聖堂 放火는 그곳에 숨어있는 抵抗軍을 制壓 或은 沒殺시키기 爲한 措置였다.

亡命과 죽음 [ 編輯 ]

敎皇은 다시 自由의 몸이 되었지만, 노르만 軍隊가 都心에서 放火와 掠奪을 恣行하여 被害가 極甚해지자 로마 市民들이 憤慨하였고 敎皇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壓迫을 하였다. 身邊에 威脅을 느낀 그레고리오 7世는 노르만 軍隊와 함께 亡命길에 올랐다. 로마 市民들에게 버림받은 敎皇은 처음에 몬테카시노 로 갔다가, 나중에는 海岸가에 있는 살레르노 城에 隱居하였으나 다음해 1085年에 善終하였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는 正義를 사랑하고 不義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亡命地에서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4] 그레고리오 7世는 腺腫하기 3日 前에 하인리히 4世와 敎皇 클레멘스 3世로 卽位한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除外하고 그가 波紋을 宣告한 모든 사람을 赦免하였다.

其他 유럽 國家들과의 關係 [ 編輯 ]

노르만族 [ 編輯 ]

그레고리오 7世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의 關係에 있어서 그의 大(對)獨逸 政策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種種 그는 獨逸 王에게 알리지 않고 獨斷的으로 다른 나라들과 交流함으로써 獨逸 王을 外交的으로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노르만族의 反抗的인 態度는 그에게 一種의 깨달음을 안겨다 주었다. 敎皇 니콜라오 2歲 治世에 敎會는 노르만族에게 많은 特權을 주었음에도, 이탈리아 中部에 對한 그들의 侵略을 막는 데 별다른 效果를 보지 못했을 뿐더러 敎皇에 對한 安全 保障도 壯談할 수 없었다. 노르만族의 指導者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그레고리오 7世가 하인리히 4世에게 크게 威脅받았을 때 始終一貫 그를 外面하다가 自身에 對한 獨逸의 威脅이 現實化되자 겨우 介入하였다. 로마를 掌握한 다음 그는 兵士들에게 로마를 넘겨주었는데, 이러한 그의 行動에 憤慨한 民衆 때문에 그레고리오 7世는 亡命길에 오르게 되었다.

敎皇의 統治權 主張 [ 編輯 ]

그레고리오 7世는 一部 나라들의 境遇, 敎皇의 統治權을 主張하며 이를 주입시키려는 試圖를 하였다. 그는 太古的부터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는 로마 敎會에 屬해 왔다고 主張하였으며, 스페인 헝가리 , 크로아티아 에 對해서도 똑같이 敎皇의 所有 財産이라는 意見을 내놓았다. 그리고 덴마크 國王에게는 本來 敎皇의 領土였던 덴마크를 代理人 資格으로 委任받아 統治하는 것이라는 見解를 가질 것을 勸告하였다.

敎會 政策 및 敎會 改革에 있어 그레고리오 7世는 혼자가 아니었으며, 여러 사람으로부터 强力한 支持를 받았다. 잉글랜드에서는 캔터베리 의 大主敎 랜프랭크 가 敎皇에 對한 支援을 아끼지 않았으며, 프랑스에서는 後날 리옹 의 大主敎가 되는 디에의 위그 가 敎皇을 支持하였다.

프랑스 [ 編輯 ]

프랑스 國王 필리프 1歲 는 聖職賣買와 敎會에 對한 暴力 行事로 波紋과 그에 따른 廢位 處罰이 不可避해보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世는 비록 필리프 1世가 全혀 態度를 바꾸지 않았지만, 그에게 警告만 할 뿐 實際로 處罰하는 것은 自制하였다. 왜냐하면 獨逸 王 하인리히 4歲를 相對로 벌어질 衝突을 準備하는 過程에서 힘을 分散시키는 것은 避하기 위해서였다.

그레고리오 7世는 루시 伯爵 브리예 2歲 를 主軸으로 한 스페인 遠征 十字軍을 組織하려는 計劃을 세운바 있었다.

잉글랜드 [ 編輯 ]

한便 이러한 國際 情勢 下에서, 잉글랜드의 王 윌리엄 1歲 는 自身의 利益을 챙길 수 있었다. 멀리 있는 로마가 잉글랜드까지 제대로 關與하지 못하리라고 여긴 그는 事事件件 自國 敎會 問題에 干涉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人 主敎들이 로마를 訪問하는 것도 禁止하였다. 또한 그는 自身의 뜻대로 敎區와 首都원구를 設定하였다. 敎皇이 自身에게 靈的 權力과 世俗 權力 間의 關係에 關해서 自身과 다른 생각을 說破하는 것이나 貿易 活動을 중지당하고 싶지 않으면 使徒座의 봉신임을 自認하라는 指示를 내려도 別로 神經쓰지 않았다.

東로마 帝國 [ 編輯 ]

그레고리오 7世는 生前에 東邦에 각별한 關心을 갖고 있었다. 로마와 東로마 帝國 의 分裂에 對해 안타까워 하던 그는 過去의 友好的인 關係를 回復하기 위해 많이 努力하였다. 그레고리오 7世는 東로마 皇帝 미하일 7歲 두카스 와의 連絡을 試圖하였다. 當時 東로마 帝國의 東쪽에서 이슬람敎徒들이 그리스도人들을 對象으로 大大的인 攻擊을 加하고 있다는 消息이 로마에까지 傳해져오고 있었고, 미하일 7世는 이러한 難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몰라 戰戰兢兢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7世는 이슬람敎徒들의 侵略을 막고 東로마 帝國과 友好 關係를 樹立하기 위한 目的으로 遠大한 軍事 遠征을 計劃했으며, 모든 信者에게 거룩한 무덤 聖堂 을 다시 되찾아오는 일에 參與할 것을 促求하였다. 이는 곧 後날 있을 十字軍 遠征의 前哨가 되었다. [15]

其他 國家들 [ 編輯 ]

그레고리오 7世는 事實上 基督敎 世界의 모든 나라와 關係를 맺었다. 하지만 그들과 交流했다고 해서 恒常 그의 靈的·政治的 希望事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레고리오 7世는 폴란드 키예프 大公國 , 보헤미아 의 君主들과 書信을 주고받았다. 또한 그는 아르메니아 와 보다 友好的인 關係를 맺는데 成功하였다.

對內 政策과 敎會 改革 [ 編輯 ]

그레고리오 7世는 平生을 가톨릭교회가 하느님에 依해 세워졌으며, 하느님의 뜻이 곧 唯一無二한 法인 이 世上에서 모든 人類를 가르치고 包容하는 役割을 附與받았다는 信念에 따라 살았다. 그는 敎會는 하느님이 組織한 것이기 때문에 人間이 만든 모든 組織, 甚至於 世俗 國家들보다 優先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敎會의 으뜸인 敎皇은 地上에서 하느님을 代身해 다스리는 攝政이 되며, 敎皇에 對한 服從을 拒否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에 對한 服從을 拒否하는 것이 된다. 이를 달리 말하면 基督敎를 背敎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實行에 옮긴다면 敎會는 但只 한 나라뿐만 아니라 이 世上의 모든 나라를 전복시킬 義務를 갖고 있다는 셈이 된다.

그래서 政治的으로 큰 成果를 얻고 싶었던 그레고리오 7世는 實際로 다른 政策을 펼쳤다. 그는 國家라는 存在를 하느님이 人類를 위해 特別히 許諾해준 것으로 理解했으며, 敎會와 國家의 共存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主張했다. 그리고 敎權과 王權 사이의 同盟이 必要함을 强調했다. 그러나 그는 單 한 番도 두 權力을 同一線上에 놓고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國家에 對한 敎會의 優先權은 너무나 明確했다. 그는 이에 對해 秋毫도 疑心하지 않았으며, 이를 論議하는 것조차 容納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7世는 世界 各國에서 論難이 되고 있는 모든 重要한 問題가 로마 敎皇廳, 좀 더 正確하게 말하자면 敎皇 自身에게 報告되기를 바랐다. 이러한 敎皇을 中心으로 한 中央集權 政策은 當然히 地域 敎區長 主敎들의 權限 縮小를 불러왔다. 各 地域 敎區長들은 自進해서 敎皇에게 屈服하기를 拒否하고, 敎區 內에서 自身들이 獨自的인 權限을 行使할 수 있다고 主張하면서 그레고리오 7世가 敎皇으로 在任하는 내내 끊임없이 葛藤을 빚었다.

敎皇職의 優越性을 確立하기 위한 그레고리오 7歲의 싸움은 聖職者들에게 獨身 義務를 强制로 附與한 것과 聖職賣買를 打破하기 위한 努力한 것과도 聯關되어 있다. 그가 聖職者들의 獨身 生活을 考案해낸 것은 아니지만, 이를 義務化하기 위해 前任 敎皇들보다 더욱 많이 奮鬪하였다. 1074年 그레고리오 7世는 旣婚司祭의 敍品을 容認한 主敎들에게는 순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內容의 會則을 頒布하였다. 또한 旣婚 聖職者들에게 離婚을 要求했다. [16] 다음해에 그는 各 地域 敎區長들에게 旣婚 聖職者들에 對한 措置를 施行할 것을 指示하여, 그들의 輸入을 沒收하였다. 이처럼 旣婚 聖職者들과 聖職賣買를 完全히 뿌리뽑기 위한 그의 政策에 反撥하여 유럽 全域에서 廣範圍한 抵抗이 일어났다.

살레르노 大聖堂의 琉璃 안에 安置된 敎皇 그레고리오 7歲의 遺骸

그레고리오 7世는 主로 敎會의 規則이나 慣習에 對한 글을 많이 썼다. 《Gregorii VII registri sive epistolarum libri》는 生前에 그가 썼던 글들을 모아 整理한 것이다. [17]

聖體 敎理 守護 [ 編輯 ]

1965年 敎皇 바오로 6歲 는 會則 《信仰의 神秘》(Mysterium Fidei)에서 아래와 같이 敎皇 그레고리오 7歲가 聖變化 를 否認한 베렌가리우스에게 그리스도가 聖體 안에 참으로 現存한다는 믿음을 아래와 같이 告白하라고 指示한 것을 引用하며, 그가 敎會의 聖體 敎理를 擁護한 功勞를 致賀하였다.

나 베렌가리우스는 除隊 위에 있는 빵과 葡萄酒가 거룩한 祈禱의 神祕에 依해서 그리고 우리 拘束注意 말씀으로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固有하며 生命을 주는 살과 피로 實體的으로 變化되고 祝聖된 後에는 童貞女에게서 태어나셨고 世上의 救援을 위해 奉獻되셨으며 十字架에 달리셨고 聖父 오른便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며 聖事의 表徵과 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本性의 固有함과 實體의 眞理 안에서 옆구리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참된 避妊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告白합니다. [18]

이 信仰 告白으로 인하여 12世紀부터 유럽에서 ‘聖餐禮 르네상스’가 觸發했다고 傳해진다.

各州 [ 編輯 ]

  1.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Medioevo》 (143): 62?63.   |題目= 이(가) 없거나 비었음 ( 도움말 )
  2.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Medioevo》 (143): 64.   |題目= 이(가) 없거나 비었음 ( 도움말 )
  3.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Medioevo》 (143): 66.   |題目= 이(가) 없거나 비었음 ( 도움말 )
  4. According to the sources, feeling he was nearing his end, Stephen had his cardinals swear that they would wait for Hildebrand's return to Rome before electing his successor.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Una carriera dietro le quinte”. 《Medioevo》 (143): 70.  
  5. "La citta perduta di Galeria"
  6. Mansi, "Conciliorum Collectio", XX, 60.
  7.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Sia fatta la mia volonta”. 《Medioevo》 (143): 76.  
  8. “Vatican newspaper examines history of red, white papal garb : News Headlines” . Catholic Culture. 2013年 9月 2日 . 2014年 1月 28日에 確認함 .  
  9. “L'Osservatore Romano” . Osservatoreromano.va. 2016年 4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月 28日에 確認함 .  
  10. 밀라노 政府를 支配하고 있는 急進的인 敎會 改革主義 勢力으로 狂的인 水準으로 改革을 부르짖었다. 이들은 어느程度 純粹한 宗敎的 熱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랜 時間 敎會가 누리던 富와 特權에 對해서는 憎惡心을 가지고 있었다.
  11. “Letter to Gregory VII (24 January 1076)” . 2014年 11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7月 26日에 確認함 .  
  12. 300年 前 751年에 敎皇 자카리아(741-751)가 메로빙거 王朝의 마지막 君主 힐데리히 3歲의 廢位와 피핀 3世의 卽位를 承認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敎皇이 直接 波紋을 한 것이 아니라 피핀이 廢位를 시키자 이를 承認한 것이다. 承認의 名分도 不足한 狀況이었기에 直接 波紋시킬 名分이 있을 수 없었다. 修道院에 있던 힐데리히 3歲를 貴族들이 推戴하여 王으로 卽位시킨후 必要性이 사라지자 廢位시킨 事件이었다. 卽 武力으로 王位를 簒奪한 事件이다. 波紋은 피핀에게 내렸어야 할 일이었다. 그 當時 서로마 敎會는 東로마 帝國과 聖像파괴령으로 인해 葛藤이 생기자 새로운 政治 後援者가 必要한 狀況이였기에 新興勢力인 프랑크 王國과 손을 잡기 위해서 取한 措置일 뿐이지 이를 世俗君主 廢位의 先例하고 볼 수는 없다.
  13. 카노사의 屈辱事件은 敎皇權의 全盛期에 있었던 事件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7歲가 1080年에 하인리히 4歲를 두 番째 破門하였으나 全혀 效力이 없었다. 그리고 1084年에는 强制 폐위당한 後 로마市民들로부터 버림받아 로마에서 事實上 追放當下다. 교황권과 皇帝權이 逆轉되는 轉換期이자 敎皇權力이 全盛期로 나아가기 위한 初盤 過渡期에 벌어진 事件이라고 보아야 合當하다.
  14. Original: Dilexi iustitiam et odivi iniquitatem propterea morior in exilio . Commentary 틀:By whom on the foregoing: This is an echo of the well-known Ps. 44.8 Dilexisti justitiam, et odisti iniquitatem : propterea unxit te Deus, Deus tuus, oleo lætitiæ præ consortibus tuis which together with Ps. ibid. 2 Eructavit cor meum verbum bonum : dico ego opers mea Regi form the Introit of the former of the two Masses of the Common of a virgin not a martyr, the two parts in Eastertide being separated by a pair of Alleluias. The grammatical variation on 'Thou didst love justice and hate iniquity', the original of which, said in apostrophe to the canonised virgin not a martyr whose feast is being celebrated and certainly recognised by every reader, is here put into the deceased Pope's own mouth: 'I did love justice and hate iniquity [: ...]'.
  15. Peters 1971 , 33쪽.
  16. 루돌프 k 골트슈미트 옌트너 <世界史의 名場面 그 裏面의 歷史> 圖書出版 달過小 2005.11.28 p71
  17. Mansi, "Gregorii VII registri sive epistolarum libri."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 Florence, 1759
  18. Vatican website: Mysterium fidei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알렉산데르 2歲
第157代 敎皇
1073年 4月 22日 - 1085年 5月 29日
後任
빅토르 3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