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月 10日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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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月 10日 事件
프랑스 革命 의 一部
날짜 1792年 8月 10日
場所
프랑스 파리
結果 공화파의 勝利
交戰國
指揮官
프랑수아 베스테르만
앙투안 산테레
클로드 푸르니에
루이 16歲
어거스틴조셉 드 마이
카를 요제프 폰 바흐만
兵力
2萬 名 以下
캐넌 12門
스위스 傭兵 950名
맨앳암즈 200 ~ 300名
被害 規模
200 ~ 400名 死亡 600名이 死亡하고, 捕虜로 잡힌 200名은 9月 虐殺 때 죽임당함

8月 10日 事件 ( 프랑스語 : Journee du 10 aout 1792 )은 프랑스 革命 時期인 1792年 8月 10日 파리에서 일어난 튈르리 宮殿 襲擊 ( 프랑스語 : Prise des Tuileries ) 事件이다. 상퀼로트 (無産階級)를 中心으로 한 武裝 蜂起가 事實上 革命이었기 때문에 8月 10日 革命 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革命은 새로운 段階에 들어갔다.

루이 16世는 議會로 避身하였으나 [1] 議會도 侵入을 받아 群衆의 壓迫속에 性急히 王權을 中止시키고, [1] 國王 一家는 모두 탕플 塔 에 幽閉되었다. 또한 당통이 이끄는 6人 臨時內閣을 만들고 빠른 時日內 普通選擧를 實施하여 國民公會 構成을 約束했다. [2] 이 事件으로 君主制는 沒落하고 共和制가 始作되었다.

이 事件은 武力 衝突로 流血 事態로 이어져 많은 死傷者를 냈고, 그 責任을 一方的으로 루이 16歲 에게 묻는 輿論은 갈수록 높아져 그것이 國王 裁判으로 이어졌다.

背景 [ 編輯 ]

1791年 6月 《 바렌느 事件 》은 프랑스 革命의 흐름에 相反된 두 가지 潮流를 만들어 냈다. 첫째는 둘째에 對한 反動으로, 短期的으로 穩健王黨派와 團結을 强化하여 부르주아 革命 을 서둘러 推進하려는 壓力이 되었다. 9月 14日 루이 16世는 《 1791年 프랑스 憲法 》에 宣誓를 하고 復權되었고, 10月 1日 立法 議會 를 召集하여, 立憲君主制 가 成立되었다.

1789年 理想主義者라면 이것으로 革命은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事實, 立憲 議員 몇몇은 故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立憲主義者들의 거짓 勝利와, 부르주아 의 分裂( 자코뱅파 에서 分離된 푀양파 )을 뒷전으로 하고, 第2의 물결, 卽 民主主義 가 擡頭하기 始作했던 것이다. 바스티유 監獄 襲擊 事件 으로 革命을 일으킨 革命的 民主主義者들은 漸次 數를 늘려 失業者와 賃金勞動者를 中心으로 한 上 퀼로트 革命 參與를 誘導했고, 파리에서 徐徐히 政治 勢力을 形成했다. 그들은 코르들理에 클럽 과 自治 市議會에 結集하여 보다 더 急進的인 第2世代 指導者를 만들어 갔다.

이러한 第2의 흐름은 7月 17日 샹 드 마르스의 虐殺 과 클럽 閉鎖에도 衰退하지 않았으며, 憂鬱한 不滿을 約 1年間 쌓아 갔다. 또한 第1의 흐름의 副産物로, 비엔나 베를린 의 宮廷은 亡命 貴族(에미그레)의 부추김으로 《 筆니츠 宣言 》을 發表했지만, [3] 이것은 決코 武力 介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브리소 立法議會 의 새로운 多數派로 登場한 지롱드파 를 刺戟했고, 지나치게 好戰的인 愛國主義와 유럽의 여러 君主에 對한 攻擊的인 革命 十字軍(革命의 輸出)의 따위 發想을 연상시켰다. 革命戰爭 의 勃發은 情勢를 惡化시켰다.

戰爭과 經濟 不安( 아시냐 의 暴落과 雪糖 價格의 上昇)의 影響은 市民의 生活을 强打했다. 파리 상퀼로트들은 生活 改善을 要求하면서 다시 結集했다. 이 흐름은 이미 左翼 이데올로기를 同伴하고 있었고, 生活에 直結되는 切實한 要求는 漸次 濁流처럼 剛하고 激烈해 졌다. 運動을 支援하는 受動的 市民은 投票權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政治的인 어필은 武裝 行進 等 보다 直接的인 示威 行動으로 나타났다.

能動的 市民 中에도 이에 同調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의 指導者가 되었다. 生 탄트와累 城 밖의 釀造業者人 산테이르 等과 같은 사람들이 各 地域의 民兵隊를 組織하여 革命은 暴力的인 樣相으로 바뀌었다. 急進化 되는 그들의 要求에 政治人들은 따라가기만 할 뿐 主導하지 못했고, 共和制 樹立 要求는 날로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1792年 6月 20日 上 퀼로트 의 示威가 過激한 行動으로 發展하는 事件이 일어났다. 武裝한 市民들이 國王이 살고 있는 튈르리 宮殿에까지 侵犯한 事件은 [4] 拒否權을 濫發하는 國王에 對한 壓力으로 지롱드파가 默認한 點도 있지만, 武裝 蜂起가 바로 일어나도 異常할 것이 없었던 危險한 狀況을 보여주고 있었다. 王政 廢止를 처음으로 꺼낸 것은 지롱드파였지만 이미 事態는 그들의 豫想을 웃도는 速度로 展開되기 始作했다.

“暴徒가 公公然하게 王政을 顚覆할 計劃”이라고 壓迫하는 狀況에 對한 危機感은 7月 10日, 푀양파를 總辭退에 이르게 했다. 立憲君主制를 지키는 마지막 試圖는 軍 司令官으로 復歸한 라파예트에게 맡겨졌다. 그는 메르시 臺詞를 통해 자코뱅파를 解散시키기 위해 “軍隊를 이끌고 파리로 進軍할 用意가 있다”는 말로 오스트리아에 軍事 行動 中斷을 要求했으며, 國王에게 콩피에뉴 脫出을 勸했다. 여기서 그는 軍隊와 기다릴 豫定이었지만, 國王의 再 逃走 計劃은 7月 12日부터 15日로 延期되어 結局 中斷되었다. 루이 16世는 바렌느 事件의 失敗를 떠올렸고, 信賴할만한 스위스 傭兵 部隊의 保護 아래에서 나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러 王國의 同盟軍에게 聲明을 내서 壓迫하여 7月 25日 , 브룬스윅 宣言을 發表하도록 했지만, [5] 이것은 오히려 武裝 蜂起를 刺戟하는 逆效果가 났다.

프랑스 革命에서 特徵的인 것이지만, 蜂起는 存在하지 않는 威脅에 對한 自己 防禦 行爲였다. 8月 10日 事件은 누군가가 始終一貫 計劃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7月 마지막 週에 파리에서 非正常的으로 高調된 示威 行動은 爆發의 絶頂을 맞이한 것에 不過했다. 議會의 立憲君主波와 宮廷의 王黨派에 對해 民衆이 일어서지 않으면 짓밟힐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롱드파는 蜂起도, 王權의 喪失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抑制하려고 努力은 했지만, 8月이 되면서 王政 打倒야말로 唯一한 解決策이라는 見解가 파리 全體에 大勢가 되어갔다.

過程 [ 編輯 ]

먼저 行動한 것은 파리였다. 여러 地球에서 常設 久懷를 마련하고, 連繫를 위해 "中央委員會"를 組織했다. 7月 11日 이를 따랐던 로베스피에르 자코뱅 클럽 에서 演說을 통해 聯盟甁에 參加를 呼訴했다. 聯盟 兵士들은 7月 14日 祝祭를 위해 全國에서 모여 있었던 것이지만, 國家의 危機를 救할 任務가 주어졌다고 오히려 奮發했다. 7月 13日 , 당통 의 提案으로 祝祭 以後에도 聯盟病은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7月 25日 , 로베스피에르는 더 大膽한 主張을 展開하여, 立法議會 의 卽刻 解散을 要求했고, 이를 代身하여 憲法을 改正해 새로운 議會인 “ 國民 公會 ”를 召集을 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는 王政뿐만 아니라 議會도 바꾸어야 할 必要性을 說明하고, 부르주아 階級에만 立脚한 議會는 人民을 代表하지 못한다는 主張을 펼쳤다. 그의 主張은 事實이었기 때문에, 지롱드파 도 效果的인 反論을 펴지 못했다. 그들은 로베스피에르가 群衆을 自重시킬 것을 바랬지만, 이미 화살은 쏘아진 것이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280
  2.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261
  3.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277
  4.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史> 기린원 1998.11.10 p316
  5.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