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K리그 드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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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要 [ 編輯 ]

  • 新人選手 選拔날짜 - 1991年 11月 20日
  • 總 指名者 數 - 38名


드래프트 拒否 波動과 陣痛 [ 編輯 ]

1991年 드래프트 에서 觸發되었던 드래프트 拒否 波紋의 餘震은 이듬해인 1992年 드래프트까지 이어졌다. 當時 드래프트 拒否 波紋은, K리그 드래프트 歷史에서 相當히 比重 있게 다루어지는 事件이다.


홍명보와 황선홍의 浦項 入團 波紋 [ 編輯 ]

1991年 4月, 6個月前 波紋의 主人公 [1] 이었던 황선홍 , 洪明甫 두 選手가 同時에 浦項 製鐵 에 入團하면서 2次 드래프트 拒否 波動이 始作되었다. 當時 浦項 製鐵은 아마추어 蹴球팀으로 選手를 入團시킬 境遇, 드래프트에 申請하지 않은 選手도 入團 可能하다는 點을 利用해 황선홍과 홍명보를 浦項 所屬으로 入團시키는 便法을 動員한 바 있다. 이같은 便法은 아마추어 입單子의 프로 昇格은 3年동안 該當 아마팀에서 뛴 後에야 可能하다는 規定上 只今껏 어느 팀도 쉽게 試圖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對해 현대 虎狼이 를 비롯한 他 球團들은 浦項 製鐵의 行態를 條項 違反이라고 激烈히 反撥했으며 事態는 漸漸 擴散되었다. 特히 入團과 同時에, 황선홍, 洪明甫 모두 出戰 不可 期間인 3年동안 海外 蹴球 留學을 보내겠다고 浦項 製鐵이 言論에 發表하면서, 醜聞은 一般 蹴球팬들에게도 傳해지게 되었고, 選手權益을 無視하는 企業球團의 談合 行態에 對한 告發 記事와 聲討도 쏟아지기에 이르렀다. 結局 1991年 7月, 各 球團의 團長들은 會議를 거쳐, 旣存의 드래프트 1順位, 2順位 契約金을 3千萬 원, 2千5百萬 원에서 各其 5千萬 원, 4千萬 원으로 上向調整하였고, 황선홍 選手는 浦項 製鐵의 公言대로 獨逸로 進出하면서 浦項製鐵 入團 波紋은 어느 程度 抛撤의 判定勝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2]

올림픽 代表들의 集團 드래프트 拒否 波動 [ 編輯 ]

1991年 10月, 2次 波動 6個月餘 만에 事態는 새로운 局面에 접어드는데, 當時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代表 로 한창 株價를 올리고 있었고, 當然히 1992年 드래프트에서 1順位 最優先 指名이 確實視되었던 서정원 , 신태용 , 정광석 , 김병수 네 名의 選手가 드래프트 拒否를 宣言한 것이었다. 서정원 選手를 筆頭로 4選手는 球團 間의 公公然한 談合으로 契約金의 自由競爭이 아닌 5千萬 원 上限線 策定에 그쳤음을 聲討하면서, 드래프트제의 弊害를 告發하고자 拒否를 宣言했노라고 밝혔다. 이 때를 같이해, 當代 大學圈의 最高 스트라이커였던 김정혁 選手가 大宇 로얄즈 와 祕密裏에 先契約을 맺고 大宇 選手團에 合流했다는 小食과 洪明甫 選手와 황선홍 選手에게 抛撤이 各其 支給한 契約金이 1億 원을 넘긴다는 消息을 다룬 暴露性 記事가 쏟아지면서 화살은 K리그 球團 全體와 드래프트 制度에 集中되었다. 여기에, 다른 選手와 衡平性을 考慮하지 않고 個人의 安危를 優先視했다는 點을 들어, 主要 選手에 對한 批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要컨대, K리그 의 팀과 球團主, 選手들 모두가 子正이 必要하다는 點에 對한 共感帶가 形成된 것이었다.

드래프트 申請 追加 期限 延長과 홍명보의 申請 [ 編輯 ]

자칫 K리그 이미지의 씻을 수 없는 打擊과 김종부 스카우트 波動 當時의 팀 解體 不辭 와 같은 極端 狀況을 막기 위해 대한축구협회 한국프로축구연맹 은 一旦 올림픽 代表 4人放의 드래프트 拒否 問題부터 解決을 보기로 한다. 그리고 10月 中旬으로 完了되었던 申請 期限을 드래프트 하루 前날인 11月 18日까지 延長하면서 收拾했고, 球團主 協議會와 浦項 製鐵 側과의 陣痛 끝에 洪明甫 를 1992年 드래프트에 내놓기로 合意를 얻어내면서 事態는 急進展의 機會를 얻었다. 結局 最終 마감日이었던 18日, 洪明甫, 서정원, 신태용이 드래프트 申請을 完了하면서 抛撤과 他 球團 間의 軋轢 다툼과 波紋 騷動은 어느 程度 一段落되었다. 그러나 焦眉의 關心事였던 契約金 上限線 廢止 問題는 어물쩍 넘어갔고, [3] 서정원, 신태용을 除外한 김병수 選手와 정광석 選手는 끝끝내 申請을 拒否하면서 불씨는 如前히 남아있는 狀態였다. 結局 이런 臨時方便的 뒤處理는 不過 이틀 뒤인 드래프트 指名張에서 벌어진 K리그 歷史上 前無後無한 트레이드 騷動으로 歸結되었다.(아래 트레이드 波動 參考)

指名 結果 [ 編輯 ]

球團 1順位 2順位 3順位 4順位 5順位 6順位 7順位 8順位 9順位
LG 치타스 서정원 김봉수 임근재 전경준 - - - - -
일화 천마 김정혁 주용국 김학철 김대진 - - - - -
유공 코끼리 洪明甫 이종철 金起善 - - 윤정춘 - - -
포항제철 아톰즈 김진형 조정현 류영록 장영훈 백태현 김종록 정성훈 이상기 강영호
현대 虎狼이 김종건 김동식 김판곤 배수현 김성구 장형석 민병직 임채용 金秉址
大宇 로얄즈 이태홍 신태용 김태진 이경춘 최영희 이진호 유원민 최광운 -

트레이드 波動 [ 編輯 ]

4時間 만에 所屬팀이 바뀌다 [ 編輯 ]

1991年 11月 19日 드래프트 指名張에서 김정혁 일화 천마 에, 洪明甫 유공 코끼리 에, 신태용 大宇 로얄즈 에 指名되었고, 김진형 조정현 포항제철 이 各各 指名했다. 그러나 우리는 ' 신태용 '하면 逸話에서만 줄곧 뛴 레전드로 記憶하고 있고, 홍명보 選手가 유공에서 뛰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럼 大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는 하루 만에 팀 유니폼을 갈아입었던 드래프트 波動의 結果物이었던 것이다. 當時 有功 김정남 監督은 홍명보를 데려오는 데 成功함으로써, 守備와 攻擊 兩쪽 모두에서 確實한 效果를 줄 카드가 생겼다. 라고 自評하며 洪明甫 迎入에 滿足感을 表示했다. 그러나 不過 4時間 만에 事態는 急反轉되었는데, 홍명보에게 이미 1億이 넘는 金額을 支拂했었던 浦項製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홍명보를 確保하라는 윗線의 指示에 따라 드래프트場에서 抛撤이 1順位로 指名한 김진형 , 2順位 指名 조정현 , 1990年 11月 22日 열린 1991 K리그 드래프트 에서 有功 1順位로 指名됐지만 [4] 1991年 7月 김홍운 과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抛撤 유니폼을 입은 [5] 이석경 을 한꺼번에 有功으로 내주면서 홍명보를 데려오는 轉貸 美文의 1:3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기에 이른다. [6]

不過 4時間 前까지 洪明甫 迎入에 禍色을 띠던 김정남 監督은 트레이드 直後 沈默하면서, 위의 決定이 높은 線에서 이루어졌음을 暗示했으며 事前에 抛撤과 有功 球團이 談合을 벌였다는 批判이 暴發했다. 또한 김진형 選手의 母校인 한양대학교 側은 김진형 選手가 홍명보 選手보다 떨어질 게 뭐길래 이렇게 薄待하느냐 고 抗議하며, 以後부터 한양대는 포항제철에 選手 供給을 拒否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남들이 뭐라하거나말거나, 포항제철은 홍명보를 데려오는 데 結局 成功했다.

大宇의 變則 스카우트 推進 [ 編輯 ]

浦項製鐵의 움직임을 지켜 본 大宇 로얄즈 는 드래프트 實施 以前에 事前 接觸을 통해 確保해두었다가 일화 천마 에 빼앗긴 김정혁 先手를 포항제철이 홍명보를 데려온 것과 똑같은 方法으로 데려오기로 마음먹는다. 卽時 일화와 接觸한 大宇는 김정혁 選手를 데려오기 위해 大宇가 1順位로 指名한 이태홍 選手를 包含해 選手 몇 名을 내놓을 用意가 있음을 내보였고 結局 12月 4日, 大宇의 1順位 指名 選手인 이태홍 과 2順位 指名 신태용 을 일화에 내주고 大宇가 김정혁 을 받는 트레이드가 成事되었다.


LG와 抛撤 맞트레이드 [ 編輯 ]

LG 치타스 전경준 을 4順位로 指名했지만 드래프트 며칠 뒤였던 1991年 12月 6日 골키퍼 차상광 과 함께 浦項 製鐵爐 넘겼고 이 過程에서 浦項 製鐵은 守備手 손형선 과 골키퍼 박철우 를 LG로 넘기는 2:2 트레이드를 斷行했다 [7] .

結果 [ 編輯 ]

波紋과 衝擊의 連續이었던 1992年 드래프트 事態의 原因은 歷代 最强의 戰力을 자랑했던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代表 와 1991年 코리아(南北 單一팀) 靑少年 代表팀 主戰 選手들이 大擧 1992年 드래프트에 申請이 몰렸기 때문이었다. 當時, 國家代表가 덤벼도 1992年 드래프트 申請者 베스트 11이면 充分히 이길 것 이란 弄이 眞摯하게 받아들여질 程度로 新人들의 實力은 檢證되었던 바, 指名을 위해 그토록 便法을 動員해서까지 心血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뜨거운 熱氣 德分인지는 몰라도 1992年 新人들은 指名 當時의 難澁함과 別途로 活躍은 可히 대단했다. 1992시즌 , 洪明甫 選手는 신인임에도 不拘하고 K리그 MVP 를 受賞했으며, K-리그 新人王 신태용 選手가, 得點王 임근재 選手가 차지하며 新人들이 타이틀을 싹瑟以下는 奇現象을 보였다. 大宇 로얄즈는 김정혁 을 千辛萬苦 끝에 데려왔으나, 負傷으로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면서 最下位圈으로 墜落했고 오히려 일화에 내준 신태용 , 이태홍 의 活躍을 보며 배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눈 뜨고 홍명보를 빼앗긴 유공 코끼리 의 境遇도 마찬가지로 不振을 면치 못했다.


參考 [ 編輯 ]

  1. 1次 드래프트 拒否 波動의 內容은 1991 K리그 드래프트 參照
  2. 홍명보 選手의 境遇는 1992年 3月까지 軍服務 中이었기에, 그 以後 곧바로 海外 進出이 이루어질 것이라 豫測했다.
  3. 代身 入團 後, 球團 側에서 리베이트 를 公公然하게 주는 行爲는 濟濟하거나 타 球團에서 抗議하지 않기로 合意를 봤던 것으로 보인다. 實際로 서정원 選手는 1992年 드래프트 1順位로 LG 치타스 에 入團하면서 旣存 契約金 年俸 外 約 1億 2千萬 원의 契約金과 年俸을 追加로 받아냈다.
  4. “守備王 趙(朝)隅石 逸話로” . 京鄕新聞. 1990年 11月 22日 . 2019年 3月 5日에 確認함 .  
  5. 김경무 (1991年 7月 12日). “50競技 마친 프로蹴球 版圖” . 한겨레新聞 . 2019年 3月 5日에 確認함 .  
  6. 다음 해인 1993年 드래프트에서 浦項製鐵은 황선홍 을 놓고 또 한 番 歷史를 쓴다. 仔細한 內容은 1993 K리그 드래프트 參考
  7. “GK 朴哲佑(박철우)-車相光(차상광)等 抛撤-LG 맞트레이드” . 東亞日報. 1991年 12月 7日 . 2018年 6月 30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