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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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원 (洪承嫄, 1897年 2月 7日 ~ 1952年 3月 30日 )은 日帝强占期 의 敎育인 兼 社會運動家로, 本貫은 豐山, 본적은 京城府 辭職情이며 男便은 朝鮮貴族 이해창 侯爵의 次男인 이흥주(李興柱)이다.

生涯 [ 編輯 ]

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贊儀를 歷任한 홍우석 의 딸이며 侯爵 이해창의 둘째 며느리이다. 1916年 3月 31日 江原道 平康高等普通學校 訓導로 任命되었으며 1936年 家政婦人會 會長과 家政婦人協會 會長(1936年 1月 8日 任命)을 歷任했다. 1936年 12月 21日 朝鮮總督府 社會敎育科 主催로 열린 社會敎化振興懇談會에 參席했다.

1937年 1月 29日 朝鮮夫人問題硏究會 發起人 兼 理事를 歷任했으며 1937年 8月 18日 愛國금차回 發起人 兼 幹事를 歷任했다. 1938年 9月 6日 朝鮮夫人問題硏究會 主催로 열린 寵厚國民生活樣式 講演會 講師로 活動했고 1938年 10月 22日 부터 10月 24日 까지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主催로 열린 非常 時局 國民 生活 改善 委員會 否認部 指導委員을 歷任했다.

1938年 11月 3日 부터 11月 11日 까지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主催로 열린 時局 再認識 巡廻 講演에서 忠淸南道 地域 講師로 活動했고 1939年 5月 30日 朝鮮敎化團體聯合會와 朝鮮夫人問題硏究會 主催로 열린 座談會에 參席했다. 1939年 8月부터 1939年 9月까지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主催로 열린 前朝鮮 巡廻 講演會 女子部 講師로 活動했으며 1940年 9月 7日 大日本國防部人會 京城府 代表로 萬株를 視察했다.

1941年 8月 26日 國防部人會 京城支部 代表로 日本軍 京城師團 司令部에 4,800원을 獻金할 때 個人 資格으로 100원을 獻金했으며 1941年 9月 國防部人會 京城支部腸을 歷任했다. 1941年 9月 20日 朝鮮敎化團體聯合會 巡廻 講演에 參席했으며 1941年 10月 조선임전보국단 發起人과 부인대(조선임전보국단 傘下 組織) 指導委員을 歷任했다. 1941年 11月 朝鮮敎化團體聯合會 主催로 열린 時局 對策 巡廻 講演會에서 咸鏡南道 地域 講師로 活動했다. 1942年 5月 15日 매일신보사 主催로 열린 座談會 〈徵兵制 實施를 앞두고 家庭 生活의 大轉換〉에서 朝鮮 女性들에게 '剛한 帝國의 軍人'을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役割을 强調했으며 1942年 5月 23日 趙匡 主催로 열린 座談會 〈徵兵令과 半도 어머니의 決議〉에서 徵兵 制度를 讚揚하고 朝鮮 女性들에게 '軍國의 어머니'가 될 것을 主張했다.

每日申報 》와 《 三千里 》, 《 新時代 》 等 各種 媒體에 〈七첩飯床 차려놔도 수저 눈에는 한두 접시〉(1939年 1月 4日 조선일보), 〈規模 있는 살림살이는 부엌 淸潔에 달렸다〉(1939년 8月 3日 朝鮮日報), 〈國民皆勞强調週間(國民皆勞强調週間) - 防空壕 파는 데도 皆勞精神을 發揮하자〉(1941년 9月 24日 每日申報), 〈목숨을 아껴 말라 - 世上에 나서 값 있는 죽음을〉(1943년 11月 17日 每日申報), 〈時局은 正말 重大하다〉(1944년 2月 25日 每日申報) 等의 글을 寄稿하면서 徵兵 制度와 志願兵 制度, 學兵 制度를 讚揚하고 日本의 侵略 戰爭에 協力할 것을 促求하는 글들을 寄稿했으며 特히 1943年 2月 27日 매일신보사 主催로 열린 〈皆兵(皆兵)의 노래 募集〉 行事에 對해 "皇軍이 行軍하며 歡呼 소리를 듣는 듯하다"고 評價했다. 1943年 10月 12日 臺일본부인회 朝鮮本部 理事로 任命되었으며 1944年 2月 25日 臺일본부인회 理事로 任命되었다.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者 名單 의 敎育/學術 部門과 親日團體 部門,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參考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9). 〈홍승원〉.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 報告書 Ⅳ-19》. 서울. 580~6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