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南 大興寺 千佛殿

海南 大興寺 千佛殿
(海南 大興寺 千佛殿)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寶物
種目 寶物 第1807號
( 2013年 8月 5日 指定)
面積 65.25m 2
數量 1棟
時代 朝鮮時代
所有 大興寺
位置
해남 대흥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해남 대흥사
海南 大興寺
海南 大興寺(大韓民國)
住所 全羅南道 海南郡 大興寺길 400 ( 삼산면 , 大興寺)
座標 北緯 34° 28′ 36″ 東經 126° 37′ 0″  /  北緯 34.47667° 東京 126.61667°  / 34.47667; 126.61667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大興寺千佛殿
(大興寺千佛殿)
대한민국 全羅南道 有形文化財 (解止)
種目 有形文化財 第48號
( 1974年 9月 24日 指定)
( 2013年 8月 5日 解止)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海南 大興寺 千佛殿 (海南 大興寺 千佛殿)은 全羅南道 海南郡 삼산면 , 大興寺에 있는 朝鮮時代 의 建築物이다. 2013年 8月 5日 大韓民國 寶物 第1807號로 指定되었다. [1]

立地 現況 및 歷史文化環境 [ 編輯 ]

大興寺는 全羅南道 海南郡 삼산면 구림리 頭輪山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頭輪山(大芚山)의 빼어난 絶景을 背景으로 한 넓은 山間盆地에 溪流를 끼고 자리한 大興寺는 여러 佛殿들을 地形的 條件에 맞추어 獨立된 郡을 이루어 配置함으로써 井然한 嘉藍配置에서 느낄 수 없는 자유로움과 調和를 느낄 수 있다.

『大芚寺地(大芚寺誌)』(1823)의 記錄에 나타나듯이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北쪽과 南쪽으로 나누어 堂宇들을 配置하였는데, 現在 北元에는 大雄殿 을 中心으로 冥府殿, 응진전, 山神閣, 白雪當, 청운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南原에는 千佛殿을 中心으로 용화당, 街虛漏, 奉香角, 동국船員, 宗務所 等이 또 하나의 群을 이루어 配置되어 있다. 또한 南原의 오른便에는 표충사와 附屬建物, 성보박물관이 있고 그 뒤便에 대광名田 領域이 別院을 形成하고 있다.

千佛殿은 大興寺 南原(南院)의 中心 佛殿이다. 큰 大門채와 같이 平凡한 單層 5칸 맞배집으로 救助된 街虛壘의 中央 門間을 거쳐 千佛殿 안마당에 들어서면 正面의 높은 長臺石 축단 위에 西向하여 자리限 千佛殿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奉香角이, 오른쪽에는 옛 江原이던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獨立된 空間을 構成하고 있다. 大雄殿에 비하여 마당은 크지 않지만 空間에 맞게 各 建物의 規模와 形式을 갖추었고, 正面 3칸, 側面 3칸의 多包系 八作집人 千佛殿은 높은 長臺石 축단 위에 자리하고 있어 南原(南院) 空間의 中心建物로서 格式과 品位가 느껴진다.

沿革 및 建築的 特徵 [ 編輯 ]

大興寺의 歷史를 記錄한 것으로는 『竹楣機(竹迷記)』,『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북암機(北庵 記)』等이 있으며 이 記錄들은 綜合 技術韓 『大芚寺地(大芚寺誌)』(1823)를 통해 大興寺의 創建과 歷史를 具體的으로 살펴볼 수 있다.

大興寺는 壬辰倭亂 以後 僧軍의 最高指導者이며 禪敎兩宗 都摠攝이었던 西山大師 休廷 (1520~1604)의 衣鉢(衣鉢)을 모시면서 宣敎 兩宗의 대도량으로 發展하였다. 1667에 大雄殿을 重建하였고(현재 의 建物은 火災 後 1901年 中搜), 1669年에는 표충사를 建立하였다.

千佛殿은 1811年에 失火로 消失된 것을 1813年에 다시 지은 建物이다.「千佛造成略記」에는 1811年 (嘉慶16年) 2月에 火災가 發生하여 智障殿, 팔該當, 龍火田, 赤潮當, 千佛殿, 大壯典, 藥師殿, 街虛漏 가 하룻밤에 모두 불에 탔다고 記錄하고 있다. 2年 後에 다시 建物을 지었는데 當時 重建주는 初의 禪師의 스승이었던 完戶(玩虎)였다. 그는 建物의 重建뿐만 아니라 慶州 祇林寺로 가서 花園들에게 千弗을 造成토록 하였다. 千弗은 1817年 11月 두 臺의 배를 利用하여 海南으로 運搬 途中 風浪을 만나 배 한 臺가 日本에 漂流하였다가 돌아와 1818年 8月 15日에 千佛殿에 奉安되어 只今까지 傳하고 있다. 「日本漂海錄(日本漂海錄)」(楓溪 賢正, 1821)에는 千佛의 造成過程과 漂流狀況 等을 詳細하게 記述하고 있어 千佛殿의 重建과 千불 奉安의 歷史를 明確히 알 수 있다.

千佛殿은 自然石 週初 위에 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使用하였으며, 前面 宇宙는 유난히 굵은 기둥에 흘림을 剛하게 주어 使用하였다. 간살은 正面 協칸, 側面의 3칸이 2,490mm으로 同一하고, 正面 어칸만 이보다 큰 3,470mm이다. 恐怖의 배列島 正面 어칸에만 2條의 乾脯를 配置하고 나머지는 모두 하나씩 配置하고 있어 同一한 恐怖의 間隔에 따라 週間을 設定한 하였다.

千佛殿은 千불祖上을 모시기 위하여 처음부터 計劃된 建物로 充分한 內部空間을 確保하기 위해 平面圖 거의 正方形에 가까우며, 內陣柱 없이 通칸으로 處理하였다. 이에 맞추어 家具救助는 戰後 坪 周圍에 大들보를 걸친 無高柱 5良家이다. 大들보는 自然스럽게 휘어진 曲材를 使用하였고, 宗보 위에 板대공을 設置하여 宗도리를 받는다. 恐怖는 外3出目, 내4출목 構造이며 살미檐遮는 簡潔하면서 剛直하게 구부러져 끝에서 銳利하게 솟아오르며 年俸으로 裝飾하였고, 內部는 初刻이 華麗하다. 內部는 全體가 하나의 닫집과 같이 佛壇 위를 莊嚴하고 있으며, 平面의 班을 傾斜진 佛壇을 設置하고 그 위에 木造三尊不過 玉石으로 만든 千불上을 奉安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佛壇 上部는 提供의 年 鳳이 天障까지 이어지면서 忠良 머리를 裝飾하는 龍頭, 우물반자, 빗반자의 裝飾들과 함께 一體化되어 法堂 안을 華麗하게 莊嚴하고 있다.

佛殿의 莊嚴은 外部에서도 나타나는데, 어칸의 기둥 上部에는 內外父老 連結되는 龍頭型 按草工을 設置하였으며, 全面 窓戶는 모두 아름다운 꽃살窓으로 裝飾하였다. 이와 같은 佛殿의 裝飾的 手法은 朝鮮 後期 査察建築의 時代的 特徵이다.

指定 價値 [ 編輯 ]

千佛殿은 1813年에 重建된 建物로 大興寺 南原의 中心建物로서 格式을 갖추고 있으며, 「日本漂海錄(日本漂海錄)」(楓溪 賢正, 1821) 等을 통해 建物의 重建과 千불 造成 및 奉安의 歷史를 明確히 알 수 있다.

建築的으로는 平面 比例, 恐怖 配置, 上部家口 等에서 千佛을 奉安하기 위한 合理的인 計劃手法을 볼 수 있으며, 恐怖의 構成과 細部的 彫刻手法, 빗天障과 우물天障의 裝飾과 構成, 窓戶 等은 華麗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構造 또한 堅實하다. 이러한 恐怖, 빗天障, 우물天障 等의 構成 및 細部的 手法은 隣近의 國家指定文化財(寶物)인 美黃寺 大雄殿 (1754), 佛甲寺 大雄殿 (1764), 불會社 大雄殿 (1808) 等과 類似한 手法을 보여주고 있어 比較되어 價値가 높다.

이처럼 大興寺 千佛殿은 現在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千佛殿 建物을 代表할 수 있는 建物로서 歷史的, 學術的으로 國家指定文化財(寶物)의 價値가 充分한 것으로 評價된다.

寫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文化財廳告示 第2013-77號, 國家指定文化財<寶物> 指定, 文化財廳長, 2013-08-05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