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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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섭 (韓一燮, 1929~1973)은 大韓民國의 國樂人. 판소리 名鼓手이며 牙箏 , 戶籍 散調 의 名人. 성원목 (成元睦)의 指導로 판소리 에 入門하였으나 變聲期에 목이 傷害 樂士로 轉向하여 活動하다가 死亡하였다.

生涯 [ 編輯 ]

全羅南道 和順 (和順)에서 태어났다. 한일섭의 家計는 本來부터 國樂人 家計로 祖父가 代金과 伽倻琴의 名人이었던 한덕만 (韓德萬, 1867~1934)이다. 父親 한경태는 한덕만의 長男 [1] 이며, 한일섭은 한경태의 막내 아들이 된다. 祖父 한덕만 外에 한일섭의 일가로 國樂界에 從事한 이가 많은데, 日帝時代의 판소리 名唱 한성태 (韓成泰, 1890-1931)가 그 叔父이며 한영호라는 藝名의 唱劇俳優로 活動했던 한갑순(韓甲順, ?~1946), 重要無形文化財 第16號 거문고 散調 藝能保有者 한갑득 (韓甲得, 1919-1987), 重要無形文化財 第5號 판소리 藝能保有者 한승호 (韓承鎬, 1923~2010)가 모두 그의 四寸 兄弟들이다. 이 外에도 湖南 名武 한진옥 (韓振玉, 1911-1991), 光州無形文化財 第1號 판소리 藝能保有者 한애순 (韓愛順, 1924~) 또한 먼 親戚이 된다.

어려서부터 妹夫 성원목 (成元睦, 1912~?)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는데, 목이 좋아서 少年 名唱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2] 그러나 15~6歲를 전후하여 變成器로 인해 목이 傷하자 그 뒤로는 器樂으로 轉向하였는데 그 以後의 正確한 寺僧關係는 알 수 없으나 代金, 피리, 太平簫, 伽倻琴, 거문고 等 能하지 않은 樂器가 없어 樂器의 鬼才로 통했으며, 또한 南道소리의 속을 잘 알아 南道 民俗樂의 鬼神이라는 소리도 들은 바 있다.

1947年, 唱劇團 伴奏樂士로 樂士 生活을 始作한 以來 1958年 한때에는 女性國劇團의 樂師長을 지내기도 하는 等 主로 唱劇團 系統 團體의 專屬 樂士를 도맡아 하였다. 1960年代에는 서울에서 國樂協奏團을 組織하고 68年, 國樂藝術學校 敎師로 在職하면서 많은 弟子들을 길렀는데, 그의 門下에서 朴宗善, 이生薑, 김청만, 원장현 等이 輩出되었다.

1946年을 전후해 正樂器인 牙箏의 民俗樂器火가 進行되었는데, 이 過程에서 鄭澈號(鄭哲鎬), 葬月重船(張月中仙) 等과 함께 《 牙箏散調 》를 發表하였고, [3] 《戶籍散調》를 發表하였다.

夫人은 판소리 名唱 남해성이고 피리 演奏者인 한세현이 그 아들이다.

藝術世界 [ 編輯 ]

湖南 系統 樂士들의 大部分이 그러하듯 그의 집안도 本來는 판소리와 關聯된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祖父 한덕만이 伽倻琴 散調 뿐 아니라 竝唱에도 一家를 이루었다는 事實이나 작은아버지 한성태가 판소리 名唱으로 活動했던 일, 四寸 兄弟인 한갑순과 한승호는 勿論 먼 親戚인 한애순까지 그 一家가 판소리 창자를 中心으로 넓게 分布하고 있음은 그러한 反證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藝術的 本領 亦是 판소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판소리에 對해서는 어떠한 記錄도 찾을 수 없다. 그가 어린 나이인 16歲에 목이 傷害 판소리 創作로서의 生活을 始作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다만 김채만 (金采萬, 1865~1911)을 筆頭로 공창식 (孔昌植, 1887~1936), 공대일 (孔大一, ) 等 光州판 西便制의 名唱들이 和順에서 많이 活動하였으며, 첫 스승인 성원목 (成元睦) 亦是 김채만의 弟子로서 西便制 판소리 名唱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판소리 亦是 西便制에 뿌리를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47年 樂士 活動을 始作한 以來 1958年 女性國劇團의 樂師長을 지내던 時期에는 創作 唱劇과 國劇을 많이 製作, 作曲하였는데, 이때 國劇에서 使用되었던 曲들이 이른바 '新民謠'라는 이름으로 世上에 돌기 始作하였는데, 金剛山타령, 冬柏타령, 新豐年歌, 等이 그것이다. 이들 南道 新民謠는 只今도 南道 民謠 名唱들에 依해 民謠 小品으로 널리 成瘡되고 있다.

牙箏은 本來 正樂器였으나 1940年代 以後 民俗樂器로의 改良이 이루어졌다. 이 時期를 거치면서 정철호類, 葬月重船類, 한일섭類 牙箏散調가 創始되었고, 그 自身이 장덕화의 伴奏로 錄音한 바 있다. 한일섭은 판소리의 허튼가락을 借用하여 牙箏散調의 가락을 더욱 豐盛하게 하였으며, 旋律이 誘葬하고 激情的이기 보다는 切切한 맛이 있어서 鄭澈號類와는 差異를 보인다.

戶籍, 卽 太平簫는 本來 시나위나 行進 吹奏樂 等에 많이 使用되었고, 그로 인하여 代表的인 레퍼토리가 시나위, 능게가락 等 두個에 不過하였는데, 이를 散調 形式에 얹어 처음으로 作曲한 이가 바로 한일섭이다. 이 以後로 舞樂에서의 太平簫 演奏를 基盤으로 한 김석출의 戶籍 散調가 出現하기도 하는등, 그의 戶籍散調 發表는 太平簫 連奏 레퍼토리를 擴張시킨 代表的인 일이었다.

한일섭은 판소리 名鼓手로도 많이 活動했는데, 박동진, 김연수 等 當代의 名唱들과도 자주 呼吸을 맞춘 바 있다. 그의 북가락은 正確한데가 있고 가락이 華麗하진 않아서 高弟 高法의 風貌가 있었으나, 多少 機械的으로 친다는 評價도 있었다. 各種 活動을 통해 이미 판소리 名鼓手로서의 活躍을 하고 있었으나, 1968年, 박동진의 興甫歌 5時間 完唱 當時 國樂院長이었던 성경린과 함께 박동진을 支持하여 公演의 孤樹로 參與하여 5時間 동안 북을 친 바 있고, 唱劇 錄音에 있어서도 자주 參與하였다. 박동진과 함께 地球레코드에서 錄音한 單價, 토막소리 錄音이 가장 有名하다.

1960年 以來 한일섭은 後學 養成에 힘썼는데, 이 時期에 그에게서 배운 사람으로는 牙箏의 박대성, 朴宗善, 윤윤석, 管樂器의 이生薑, 牙箏과 高法의 김청만 等이 있다. 特히 박대성과 朴宗善, 윤윤석은 한일섭의 牙箏散調를 基盤으로 自己流의 獨特한 散調를 만들어 냈으며, 特히 윤윤석의 境遇에는 舞踊音樂에서의 牙箏 伴奏로 또한 有名하였고, 朴宗善의 境遇에는 가장 大衆的으로 認知度가 높은 牙箏散調를 創始하였다. 이生薑은 한일섭 外에 한주환에게서 배운 가락을 다시 整理하여 이生薑類 大笒散調를 創始하였으며, 김청만은 한일섭에게서 牙箏과 北의 基礎를 배우고 김동준에게서 北을 다시 배워 專業 孤樹로 活動하고 있다.

各州 [ 編輯 ]

  1. 한덕만의 除籍謄本에는 한경태의 存在가 나타나지 않는데 그 理由는 알 수 없으나 舊韓末 戶籍整理가 제대로 안된 탓인듯 하다.(강승의,『한승호 名唱의 판소리에 關한 硏究』, 東國大 碩士學位論文, 2010, p11, 各州18.)
  2. 名唱 박동진 證言.( 1990年 7月 28日, 《 변강쇠타령 》 完唱公演 實況 中)
  3. 1962年 經이라고 하는 境遇도 있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韓國民族文化大百科 한일섭 項目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