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簡素化 波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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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簡素化 波動 1949年 李承晩 當時 大韓民國 大統領이 한글 맞춤法 을 소리 나는 대로 쓰는 式으로 바꿔야 한다는 主張을 함으로 말미암아 생긴 事件이다. 1953年 에 改正案이 國務總理 訓令으로 公布되었지만, 甚한 反對에 부딪혀 1955年 에 撤回되었다.

歷史 [ 編輯 ]

發端 [ 編輯 ]

1948年 政府 樹立 以後 大韓民國은 한글 맞춤法 統一案 을 쓰고 있었는데, 1949年 10月 9日 李承晩은 談話를 통해 이것이 옛 것에 비해 쓰기 不便하다며 바꾸자고 말했다.

…… 正式 國文이라고 쓰는 것을 보면 이런[옛] 것을 改良하는 代身 徒勞혀 쓰기도 더디고 보기도 乖常하게 만들어 놓아 退步된 글을 通用하게 되었으니 …… 速히 改定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國民의 呼應이 없었지만 李承晩은 맞춤法 改正을 밀어붙였다. 韓國 戰爭 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3年 4月 27日 , 한글 맞춤法을 소리 나는 대로 쓰자는 안인 〈政府의 文書와 敎科書 等에 現行 綴字法을 廢止하고 舊式 基音法(記音法)을 使用〉李 國務總理 訓令 第8號로 公布되었다.

反撥 [ 編輯 ]

맞춤法을 改正하려는 試圖는 全國 文化 團體 總聯合會, 한글 學會 , 對한 敎育 聯合會 等 여러 團體의 反撥에 부딪혔다. 이에 따라 政府는 簡素化 改正에 學術的인 根據를 마련하기 위해서 7月 7日 문교부令 第31號를 내려 국어심의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委員會는 政府의 바람과는 달리 繼續 한글 맞춤法 統一案을 쓰는 쪽으로 結論을 내렸다. 政府는 折衷案을 내놓아 다시 審議하도록 했지만, 오히려 제3안인 가로 풀어쓰기 가 採擇되었다. 한便 문교부 의 編修 局長이었던 崔鉉培 는 12月 21日 자리에서 물러나고 全國을 돌아다니며 形態主義 맞춤法을 講義했다. 이듬해에 김법린 문교부 長官도 辭任했다.

1954年 3月 29日 李承晩은 特別談話를 통해 “3個月 以內에 現行 맞춤法을 버리고, 舊 韓國 末葉의 聖經 맞춤法에 돌아가라”고 했다. 이에 따라 새로 任命된 이선근 문교부 長官은 《한글 簡素化안》을 祕密裏에 만들어 6月 26日 發表해, 公的인 審議나 修正을 거치지 않고 7月 2日 國務會議에서 통과시켰다. 그 內容은 1921年 朝鮮總督府 에서 만든 諺文 綴字法 과 비슷한 것으로, 學界는 이 맞춤法을 時代에 逆行하는 것으로 여겼다. 한글 學會 , 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國語國文學會, 大學國語國文學敎授團 等 여러 團體에서 反對 聲明을 냈고, 예일 大學校의 韓國語 敎授인 새뮤얼 마틴 은 문교부에 公開 抗議 書信을 보내기도 했다.

簡素化 方案이 反撥에 부딪히자 政府는 7月 9日 《한글簡素化方案理由便》을 냈지만 非難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3日 뒤 國會에서는 政府, 國會, 學術院이 같이 構成하는 對策委員會를 열기로 했다. 委員會가 構成되고 나서 긴 論議가 벌어졌지만 別 成果가 없었다. 한便 한글 學會의 유제한은 李承晩의 側近인 票陽文 을 통해 形態主義 한글을 받아들이도록 로비하였다. 結局 李承晩 大統領이 1955年 9月 19日 “民衆들이 願하는 대로 하도록 自由에 부치고자 한다”고 發表함으로써 한글 簡素化 波動은 끝을 맺었다.

參考 文獻 [ 編輯 ]

  • 《스물한 通의 歷史 陳情書:'삐라攻防戰'부터 '막걸리保安法'까지》 고길섶, 圖書出版 앨피(2005) ISBN   8995646268 , 9788995646267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