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條約
(Treaty of Frankfurt)은
프로이센-프랑스 戰爭
이 끝난 後
1871年
5月 10日
프랑크푸르트에서
獨逸帝國
과
프랑스 第3共和國
이 맺은 前後 條約이다. 1871年 1月 28日 프랑스가 降伏하여 프랑스 第3共和國 臨時政府와 獨逸間에 休戰條約이 締結되었다. 獨逸은 프랑스에게 代表性있는 政府와 終戰條約 締結을 要求하였다.
[1]
이에따라 프랑스는 2月 8日 選擧를 통해 議會와 政府組織을 構成하였으며 2月 26日부터 獨逸과 프랑스間 終戰條約 論議가 始作되었다. 最終的인 從前條約 締結은 5月 10日,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루어졌다.
[2]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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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당 戰鬪
서 敗北하며
프랑스 第2帝國
은 滅亡하였다.
프랑스 第3共和國
이 뒤를 이어
프로이센
한테 抗戰했지만 파리가 陷落되며 公式的으로 戰爭에서 敗北하였고
프랑스 第3共和國
政府는 降伏한다. 그 後 베르사유 宮殿에서 休戰協定을 맺게되고, 1871年 5月 10日 終戰條約이 맺어지는데
[2]
主要內容은 다음과 같다.
獨逸 帝國
이 軍隊를 撤收하는 條件으로 프랑스 政府는 이 條約을 치욕스럽게 締結한다. 當時 엄청난 額數였던 50億 프랑은
비스마르크
조차 支給하는 데에 몇 年 以上 걸릴 것이라 豫想했다. 그러나 프랑스 티에르 政府는 公採를 두次例 發行하여 段階的으로 賠償金을 支拂하였다. 結局 1873年 9月 마지막 獨逸軍이 프랑스에서 撤收하자 19日에 나머지 賠償金을 支拂하였다.
[3]
알자스 로렌
地方은
第1次 世界 大戰
以後
베르사유 條約
으로 되찾을 때까지
獨逸 帝國
이 다스린다. 이 條約을 契機로 獨逸과 프랑스는
第2次 世界 大戰
까지 서로 對立하는 關係가 된다.
[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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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332
- ↑
가
나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史> 기린원 1998.11.10 p488
- ↑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337
- ↑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트(獨逸)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