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니히그레츠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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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그레츠 戰鬪
프로이센-오스트리아 戰爭 의 一部
날짜 1866年 7月 3日
場所
보헤미아 쾨니히그레츠 사도바
結果 오스트리아의 決定的 敗北로 오스트리아軍이 壞滅됨
交戰國
프로이센 王國 오스트리아 帝國
指揮官
헬무트 폰 몰트케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리터 폰 베네데크
兵力
28萬 5000名 24萬 1000名
被害 規模
1萬 5000名 4萬 名

쾨니히그레츠 戰鬪 1866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戰爭 中 프로이센군이 보헤미아 의 都市 쾨니히그레츠(只今의 흐라데츠크랄로베 ) 北西쪽의 사도바 마을에서 벌인 戰鬪로 사도바 戰鬪 라고도 불린다. 이 戰鬪에서 프로이센 은 大勝을 거두었고 오스트리아 는 軍隊가 거의 壞滅되어 大敗했다.

背景 [ 編輯 ]

1866年 6月 18日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에 宣戰 布告함으로써, 프로이센-오스트리아 戰爭 을 일으킨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로 進擊하고 있었다. 보헤미아 戰線의 24萬 1000名의 오스트리아軍을 이끌고 있던 司令官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리터 폰 베네데크 張君은 갓 任命된 將軍이라 戰線의 地形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軍은 前裝式 小銃에다 銃劍 突擊戰술에만 依存하여 舊時代的인 戰術을 펼쳤다. 이에 비해 프로이센군은 28萬 5000名을 이끄는 司令官 헬무트 폰 몰트케 작센 에서 슐레지엔 까지 뻗은 434km의 3個의 部隊를 나누고 새로운 戰術과 戰鬪 方法을 使用해보자고 했다. 프로이센군은 비스마르크 의 軍備擴張政策을 背景으로 後裝飾 小銃으로 새로운 銃을 앞세워 武裝하고 유럽 歷史上 最初로 鐵道輸送의 利點을 充分히 살려 活用했다.

戰鬪 過程 [ 編輯 ]

몰트케는 7月 1日 에 3個 部隊를 하나로 모으고 7月 3日 에 오스트리아軍이 프로이센軍과 不利한 位置에서 戰鬪를 벌여 오스트리아軍을 大破했다. 오스트리아군은 約 4萬 名의 軍士를 잃고 折半 程度가 捕虜가 되고, 이에 비해 프로이센군의 被害는 1萬 5000名도 채 되지 않았다. 베네데크 將軍은 後退하여 近處에서 戰鬪 準備 中 7月 26日 프라하 에서 休戰 協定으로 戰爭은 끝이나 프로이센이 戰爭에서 勝利했다. 이 戰鬪에서 勝利한 프로이센 은 獨逸 統一의 始發點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