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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公羊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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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公羊傳》 (春秋公羊傳)은 《 春秋 》의 註釋書이며, 《 春秋左氏傳 》, 《 春秋穀梁傳 》과 함께 '春秋三傳'이라고 불리고 있다.

構成 [ 編輯 ]

《春秋(春秋)》는 中國에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編年體(編年體) 사서(史書)다. 約 1萬 6000餘 者의 分量으로 노(魯)나라 恩功(隱公) 元年(元年, BC 722)부터 애공(哀公) 14年(BC 481)까지 242年의 歷史 記錄이다. 이 期間을 歷史에서는 春秋 時代라고 한다. 《春秋》는 또한 《春秋頃》이라고도 부른다. 孟子(孟子)에 따르면 春秋 末期 孔子(孔子)가 旣存의 魯나라 歷史 記錄을 根據로 整理해 《春秋》를 編纂했다고 한다. 때문에 後世 油價에 依해서 警(經)으로 높여졌다.

《春秋》가 後世에 끼친 影響은 甚大하다. 孟子 以後 《春秋》는 孔子의 뜻이 담긴 至高한 經典으로 推尊되었다. 中國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春秋大義(春秋大義)’에 對한 仰慕와 尊重은 先儒들의 精神에 스며들었고 그에 符合하는 삶을 志向하게 만들었다. 朝鮮(朝鮮)의 境遇, 周知하듯 親명배원(親明排元) 政策으로부터 北伐論(北伐論) 및 衛正斥邪論(衛正斥邪論)에 이르기까지 歷史의 고비마다 《春秋》는 政治的 名分의 基準點이 되었고, 社會의 氣風을 先導했으며, 선비의 精神을 代辯하는 役割을 擔當했다.

《春秋》는 年度順으로 事件을 記錄한다. 해마다 春夏秋冬의 斜視(四時)가 먼저 提示되고 斜視에는 月(月)과 日(日)李 配屬되며 날짜는 간지(干支)로 標示한다. 事件은 條目(條目)으로 나누어 記錄되어 있으며 긴 것은 47字, 짧은 것은 1者다. 《春秋》의 內容은 大部分 政治 事件인데 戰爭 및 그와 關聯한 會盟(會盟) 記錄이 特히 많다. 그 外에 祭祀나 婚喪(婚喪) 그리고 日蝕, 月蝕, 地震 等 自然 現象을 記錄했다. 다만 《春秋》의 記錄은 지나치게 疏略하다. 記錄 當時 살았거나 時代的으로 近接한 사람들이야 內容을 알 수도 있었겠지만 時代가 흐른다면 더욱 解讀하기 어려워질 것은 自明한 일이었다. 孔子 後學들이 《春秋》에 對한 解說을 傳授해야 했던 理由다. 《漢書·藝文志(漢書藝文志)》에는 當時 《春秋》를 解說한 代表的 學派로 좌氏(左氏), 供養(公羊), 穀糧(穀梁), 秋氏(鄒氏), 協씨(夾氏)를 收錄했다. 秋氏와 協씨는 사라졌고 現在는 좌氏, 供養, 穀糧 歲 學派만이 傳承된다. 이들 세 學派의 解說書人 《左氏傳(左氏傳, 杆秤 《左傳》)》, 《公羊傳(公羊傳)》, 《穀梁傳(穀梁傳)》을 ‘春秋三傳(春秋三傳)’이라 한다.

三銓을 大別하면 《左傳》은 史學的 性格이 剛하고, 《公羊傳》과 《穀梁傳》은 警學的 性格이 剛하다. 《公羊傳》은 《春秋》의 個別 記錄에서 文字의 運用에 따른 意味 差異를 밝히고, 比較와 歸納을 통해 그 書法의 規則을 밝혀 《春秋》의 大義를 說明한다. 때로는 한 番의 議論을 통해 여러 事例를 包括하기도 한다.

《春秋》는 謹嚴하고 難解하다. 三電은 春秋學의 原點(原點)이자 頂點(頂點)이다. 三銓을 모두 보지 않고는 《春秋》에 對해 말할 수 없다. 《公羊傳》은 《春秋》의 吳의(奧義)를 풀기 위해 經文에 執拗하게 매달린다. 이런 執拗한 穿鑿에서 공도 過度 나왔다. 비록 《公羊傳》李 歷史 考證에 疏忽하고 이로 인한 臆測이 적지 않지만 經文에 對한 訓詁와 條例를 밝힌 功勞는 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公羊傳》李 傳해진 지 이미 2000餘 年이 되었다. 그동안 《公羊傳》과 公羊學은 皇帝를 위해 使用되기도, 中央 執權을 維持하는 데 動員되기도 했다. 維新을 主張하는 者들에게는 變法個제가 孔子의 뜻이라는 論據로 利用되기도 했다. 이런 歷程(歷程)에서 《公羊傳》과 公羊學은 中國 政治私 學術史 思想史 耕學社 前半에 重大한 影響을 끼쳤다. 따라서 經學의 時代는 끝났지만 《公羊傳》은 우리에게 過去의 中國과 未來의 中國을 理解하는 또 하나의 길을 提示해 줄 수 있다고 본다.

公羊傳의 著者 [ 編輯 ]

公羊傳의 著者에 對해서 班固 (班固)의 《漢書 藝文志(漢書芸文志)》에는 著者가 공양자(公羊子)라고 記錄되어 있어 具體的으로 이름이나 出身等 밝히지 않았다. 後漢(後漢) 時代의 人物인 臺굉 (戴宏)에 依하면 孔子 의 弟子 자하 (子夏)가 公羊高(公羊高)에게 傳授하여 公羊高 → 공楊平(公羊平) → 공양지(公羊地) → 供養감(公羊敢) → 공양수(公羊壽)에게 傳해져서 한 經濟 (漢景帝) 때, 공양수가 齊나라 사람인 好無生(胡毋生, 一說에는 이름이 호모生(胡母生)이라고 한다.)과 함께 竹簡에 整理하여 董仲舒 (董仲舒)에게 傳했다고 한다. 그러나, 臺굉은 이 全勝을 圖讖 思想으로 傳해 오고 있어 그대로 信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董仲舒와 好무생이 公羊傳을 傳한 것은 《 詐欺 (史記)》에도 記錄되어 있어서, 確實한 記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以前에 記錄된 書籍들과 같이 수많은 사람 속에서 글이 더해져 한 經濟 治世에 現在의 形態에 完成된 걸로 推定되고 있다.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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