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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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협 (崔秉協, 日本式 이름: 新岡繁藏 니이오카 시게兆 , 1896年 1月 14日 ~ 1966年 7月 30日 )은 日帝强占期 의 官僚 兼 大韓民國 의 公務院으로, 咸鏡北道 경흥군 出身이다.

生涯 [ 編輯 ]

최병협은 1915年 에 경성고등보통학교 附設 臨時敎員養成所를 卒業했고 咸鏡北道 書面公立普通學校 訓導(1915年 ~ 1920年)와 副車公立普通學校 訓導(1921年 ~ 1923年), 咸鏡北道 都市學(1924年 2月 ~ 1930年 3月), 咸鏡北道 羅南普通學校 訓導(1927年 ~ 1930年), 會寧普通學校 訓導(1930年)를 歷任했다. 1932年 10月 1日 에 日本 政府로부터 朝鮮 쇼와 5年 國稅 調査 記念章을 받았고 1933年 부터 1934年 까지 京畿道 內務部 地方과 囑託으로 勤務했다.

최병협은 1935年 6月 14日 부터 1937年까지 忠淸北道 都市學을 歷任했으며 1935年 오사카 마이니치 新聞 警성지국 主催로 열린 《朝鮮 市政 25周年 記念 論文公募》에서 論文 〈半島文化의 將來에 對하여〉를 應募하여 1等에 入選했다. 이 論文은 1936年 4月부터 7月까지 흥아協會 機關紙 《재만朝鮮人通信》에 7回에 걸쳐 連載되었고 나중에 單行本으로 出刊되었다. 1935年부터 1937年까지 忠淸北道 內務部 地方과 所屬으로 勤務했고 1937年 11月 9日에는 日本 政府로부터 勳8等 서보장을 받았다.

최병협은 1937年 9月에 發行된 《재만朝鮮人通信》에 寄稿한 글 〈亞細亞의 再建 時代〉을 통해 日本 帝國 러日 戰爭 勝利를 讚揚하는 한便 中日 戰爭 을 契機로 黃道의 旗幟 아래에 擧國一致하여 아시아 再建의 偉業을 達成할 것을 力說했다. 1937年부터 1938年까지 忠淸北道 淸州影幀心象高等小學校 訓導를 歷任했고 1938年 8月 30日 國民精神總動員忠淸北道聯盟 評議員으로 任命되었다. 1938年에는 單行本 《朝鮮의 餘名》을 著述했다. 이 冊은 黃道文化를 讚揚하고 志願兵을 宣傳하는 內容을 담은 冊이었다.

최병협은 忠淸北道 沃川郡守(1938年 8月 6日 ~ 1941年 5月 30日)와 忠淸北道 永同郡守(1941年 5月 31日 ~ 1942年 4月 30日)를 歷任하는 동안 軍用物資 供出과 國防獻金 募金 等의 業務를 遂行하여 日本의 侵略 戰爭에 積極 協力했고 1939年 7月 20日 에는 沃川商工會 顧問으로 選任되었다. 최병협은 1939年 7月 11日에 發行된 《 京城日報 》에 〈이 어버이에 이 子息 있다〉라는 글을 寄稿했다. 이 글은 朝鮮人으로는 最初로 中日 戰爭에서 戰死한 忠淸北道 沃川郡 出身 陸軍特別志願兵人 이인석 上兵의 죽음을 美化하고 讚揚하는 內容을 담은 글이었다. 當時 京城府에 居住하고 있던 忠淸北道 沃川郡 出身 行商 유재혁은 최병협에게 脅迫文 傳達을 試圖했지만 日帝 當局에 發覺되어 逮捕된 뒤 京城覆審法院으로부터 金庫 1年을 宣告받았고 나중에 대전형무소에서 1年 5個月 동안 服役하게 된다. [1] [2]

최병협은 1939年 8月 11日에 日本 政府로부터 勳7等 서보장을 받았고 1940年 7月에는 이인석 上兵을 追慕하기 위한 忠魂碑 建立을 主導했다. 이러한 經歷으로 인해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者 名單 의 官僚 部門,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최병협은 1940年 12月 28日 을 期해 高等官 5等에 올랐으며 1941年 8月 9日에 日本 政府로부터 勳6等 서보장을 받았다. 1945年 에는 매일신보사 特殊新聞部 部長을 歷任했다. 1945年 3月 8日부터 8月 15日 光復 때까지 매일신보사에서 發行한 타블로이드型 한글 專用 新聞인 《새소식》 發刊을 主導했다. 光復 以後인 1962年 5月 2日 부터 1966年 7月 30日 에 死亡할 때까지 大韓民國 政府에서 任命한 第3代 以北5道委員會 咸鏡北道知事 를 歷任했다.

各州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9). 〈최병협〉.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 報告書 Ⅳ-17》. 서울. 870~8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