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天符經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天符經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天符經 (天符經)》은 大倧敎 의 經典 中 하나로, 1975年 敎務會議에서 採擇되었다. 現在는 桓因 (桓因)李 桓雄 (桓雄)에게 傳하여 只今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17年頃 最初의 登場 時에는 檀君敎 의 經典이었다. 實際 世上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17年으로 檀君敎 (檀君敎)에서 처음으로 言及, 流布하기 始作하여 1920年頃 전병훈 의 《精神哲學桶便》, 1921年 檀君敎 의 機關紙 《 段濁 》에 依해 世間에 널리 알려졌다. 大倧敎 에서는 한참 後인 1975年이 되어서야 基本 經典으로 正式 採擇하였다. 大倧敎에서는 檀君 時期의 가르침이 담긴 經典이라 主張하고 있다. 韓國의 史學界에서는 僞作이라 보고 있다는 觀點이 있으나 이에 對한 드러난 合意는 없다.

專門 81字로, 難解한 數字와 敎理를 담고 있어 여러 가지 다른 解釋이 나오고 있으나 現代 韓國의 佛敎界를 비롯한 다양한 分野의 學者들은 大體로 古代 韓民族의 宗敎觀, 宇宙觀, 哲學館을 담아 낸 것으로 高度의 宗敎性 을 띄고 있음을 認定하고 있다.

傳來 및 受容 [ 編輯 ]

《天符經》은 大倧敎 의 중광( 1909年 ) 當時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天符經》이 世上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17年 계연수 檀君敎 에 《天符經》을 發見했다는 內容의 便紙를 보내면서부터이다. 便紙에 따르면 계연수 1916年 9月 9日 妙香山 에서 修道하던 途中 石壁에서 《天符經》을 發見하였다고 한다.

東邦의 賢人 先進(仙眞) 최치원 이 말하기를 檀君 (檀君)의 《天符經》 八十一 者는 신지 (神志)의 專門 (篆文)인데 옛 碑石에서 發見되었다. 그 글字를 解釋해 보고 只今의 妙香山 으로 推定되는 白山 (白山)에 角을 해두었다 (라고 崔致遠은 말하였다). 나는 살펴보건대 최치원 唐나라 에 가서 眞사(進士)가 되었다가 韓國에 돌아와서 神仙이 되고 난 後 이 經文(經文)李 昨年 丁巳年(丁巳年; 1917年 )에 와서 처음으로 平安北道 寧邊(寧邊) 白山 에서 出現하였다. 藥草를 캐는 道人 계연수 라는 분이 白山 의 藥草를 캐기 위해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갔는데 石壁 에서 이 글字를 發見하고 調査(照寫)했다고 한다. 나는 이미 《精神哲學》을 編成하고 바야흐로 印刷에 맡길 것을 計劃하였을 때 偶然히 儒學者 尹孝貞 으로부터 《天符經》을 求得하였는데 참으로 하늘이 주신 奇異한 일이었다.

?  전병훈 , 《精神哲學桶便》( 1920年 ) [1] [2]

1917年 檀君敎 에서 公開한 以後 김용기, 降雨 等의 一部 大倧敎 人士들이 關心을 表明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滿洲의 大倧敎 總本司는 《天符經》을 經典으로 受容하지 않았다. 解放 以後 윤세복 이 歸國하여 大倧敎 를 再建하였을 때에도 亦是 《天符經》은 大倧敎 의 經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윤세복 의 事後 檀君敎 信者들이 大擧 宗團에 參與하게 되면서 檀君敎 系列의 經典들度 다시 注目받기 始作하였다. 1975年 에 이르러서야 大倧敎 는 《天符經》과 《 참전계경 》을 正式 經典으로 받아들였다.

專門 [ 編輯 ]

前文은 總 81字이다. [3]

妙香山 石壁本, 太白일사本 弄은 誘集本
原文 獨吟 原文 獨吟

一始無始一
三極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 鉅無?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 成環五七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 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一時無視일
三極 無盡本
千一日 지일이 人일삼
일적십거무궤화삼
千二三 지二三 人二三
臺三合陸 生漆八九
三四 성환오 七日杳然
萬王萬래 用便不動本
本心本 太陽앙名
人中천지일 一種무終日

一始無始一
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無?
三天二 三地二 三人二
三大 合六 生七八九
三四 成環五 七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 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一時無視일
三極 無盡本
千一日 지일이 人일삼
日的十 거무櫃
三千이 삼지이 삼인이
三代 合陸 生漆八九
三四 성환오 七日杳然
萬王萬래 用便不動本
本心本 太陽앙名
人中천지일 一種무終日

版本 [ 編輯 ]

在野史學者인 송호수는 天符經의 여러 版本이 傳해지고 있다고 主張하며 다음과 같이 整理하였다.

  •   妙香山 石壁本
계연수 가 1916年 發見하여 1917年 檀君敎 에 보냈다는 版本으로, 계연수 최치원 이 石壁에 새겨놓은 것이라 主張하였다. 現在 여러 天符經의 原本으로 보인다.

大韓帝國이 亡한 7年(丁巳年; 1917年 ) 平安道 사람 계연수 太白山 에 藥을 캐러 갔다가 新羅學士 최치원 絶壁 에 갈아 새긴 《天符經》이란 것을 보았으니, 아마도 檀君 의 臣下인 신지 (神志)가 戰서 (篆書)로 비에다가 經을 새겨 두고서 檀君 의 誕生地에 세워두었던 것이었는데 최치원 이 잡힐까 두려워 그 에 逃亡해 들어갔다가 이를 해서 로 풀어서 다시 새긴 것인 듯하다. 계연수 가 이를 異常하게 여겨 拓本해가지고 돌아와서 世上에 傳했으니, … [4]

?  김택영 (金澤榮), 《韶護堂全集》( 1922年 )
  •   최고운 私的本
김용기가 1925年 에 쓴 《 斷電要義 (檀典要義)》에 紹介된 것으로, 최국술 이 《 최문창後全集 (崔文昌候全集)》에 실은 天符經의 出戰으로 記載되어 있다.
  •   최문창後殿집본
최국술이 1925年 에 쓴 《 최문창後全集 (崔文昌候全集)》 [5] 에 出處를 《 斷電要義 (檀典要義)》라고 記載한 天符經이 실려있다.
  •   勞使 戰費文本
김형택이 1957年 에 쓴 《 檀君哲學碩의 (檀君哲學釋義)》에 紹介된 것으로, 1920年頃 習得한 것이라고 한다.
  •   太白일사本
이유립 1979年 에 公開한 《 환단고기 》에 실린 天符經으로, 최치원 (帖)으로 世上에 傳하는 것을 1911年 계연수 가 적어넣었다고 한다.

《天符經(天符經)》은 天帝(天帝) 還國(桓國) 口傳(口傳)의 서(書)다. 桓雄大聲존(桓雄大聖尊)께서 淺絳(天降)한 後 신지(神誌) 革德(赫德)에게 命하여 鹿島門(鹿圖文)으로써 그것을 썼다. 최고운 稚園(崔孤雲致遠)李 또한 일찍이 前고비(篆古碑)를 보고 坑夫作 (更復作帖)하여 世上에 傳한 것이다. [6]

? 耳麥(李陌), 《 太白일사
  •   弄隱喩집本
민홍규가 2000年 에 《뉴스피플》에 寄稿하면서 알려진 것으로, 민안부 (閔安富)의 遺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特異事項으로는 一般 天符經이 아닌 甲骨文으로 된 天符經이라고 主張하였다. [7] 하지만 이 天符經의 甲骨文은 實際 甲骨文과 全혀 다른 僞作이라는 것이 一般的인 見解이다. [8]

批判 [ 編輯 ]

歷史를 硏究하려면 私的 材料의 蒐集도 必要하거니와 그 材料에 對한 選擇이 더욱 必要한지라. 古物이 山같이 쌓였을지라도 古物에 對한 學識이 없으면 日本의 ?永通寶 (官營通報)가 箕子(記者)의 遺物도 되며, 十萬冊의 藏書婁(藏書樓) 속에서 坐臥(左와)할지라도 書籍의 眞僞와 그 內容의 價値를 判定할 眼目이 없으면 後인 僞造 의 《天符經》 等도 檀君王儉 의 聖言이 되는 것이다.

?  신채호 , 《 朝鮮史硏究秒 》, 朝鮮圖書株式會社, 1929年 [9]

우리나라는 古代에 珍貴한 冊을 태워버린 때(吏曹 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造作한 일은 別로 없었으므로, 近來에 와 天符經(天符經), 三一神誥(三一神誥)等이 처음 出現하였으나 누구의 辯駁(辨駁)도 없이 古書로 認定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冊은 各 氏族의 族譜 가운데 그 祖上의 일을 혹 僞造한 것이 있는 以外에는 그다지 眞僞의 辨別에 애쓸 必要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 日本 두 나라는 예로부터 交際가 頻繁함을 따라서 우리 歷史에 參考될 冊이 적지 않지마는 魏書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分揀하지 못하면 引用하지 않을 記錄을 우리 歷史에 引用하는 錯誤를 저지르기 쉽다.

? 신채호, 《朝鮮上古史》, 鍾路書院, 1948
  • 丹齋 신채호 는 天符經을 두고 後人이 僞造한 것이라 위와 같이 斷言하였다. 이에 對해 一角에서는 위의 言及은 “《天符經》李 僞作이 아니라 말한 것”이라고 主張 [10] 하기도 하지만 一般的으로 認定되지 않는다. [11]
  • 환단고기 (桓檀古記)》의 〈太白일사〉 "소도경傳本勳"에는 《天符經》李 실려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 《天符經》李 存在한다는 事實은 檀君敎 《天符經》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환단고기》의 著者인 계연수 1911年 에 《환단고기》를 썼다. 그런데 檀君敎 에 보낸 便紙에 따르면, 계연수 가 《天符經》을 처음 發見한 때는 1916年이다. 그러므로 계연수 는 《환단고기》에 自身이 直接 적어 넣었던 《天符經》을 5年 後에 처음 發見하는 矛盾에 빠지게 된다.
  • 檀君敎는 元來 羅喆 이 陰曆 1月 15日에 중광 한 宗敎로서 抗日運動의 核心的인 役割을 하고 있었다. 1910年 에 日帝에 朝鮮이 倂合되기 直前 羅喆 大倧敎 로 이름을 바꾸고 滿洲로 나가 日帝와 對立하였다. 이때 이러한 羅喆 의 路線에 反撥하였던 정훈모 는 手下의 親日派들과 함께 朝鮮에 남아 檀君敎 의 이름을 固守하며 새 宗團을 세웠다. 이로써 日帝에 對抗하는 民族宗敎인 大倧敎와 日帝의 統治에 順應하는 親日 敎團인 檀君敎가 分離·兩立하게 되었다. 現在 最初의 出戰으로 指目되는 전병훈 의 著書 《精神哲學桶便》(1920) 에 《天符經》을 傳한 尹孝貞 은 當時 檀君敎의 大禪師로 活動하고 있었고, 天符經의 由來를 밝힌 <계연수機서> 에 따르면 계연수 는 "《天符經》을 發見, 서울의 檀君敎堂에 傳했다"고 하는데, 여기의 檀君敎黨이란 바로 정훈모 檀君敎 를 말하는 것이다. 더하여 《精神哲學桶便》에 記載된 《天符經》의 由來는 檀君敎 가 主張한 것과 같은 것으로, 結局 院 出戰은 檀君敎 인 것이 確實한 것으로 判斷된다. [12]

註解書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精神哲學桶便》, 윤창대 註解, 우리出版社, 2004年
  2. 現存하는 冊 中 '天符經'의 內容에 對해 最初로 擧論한 冊이다. 天符經의 發見된 經緯를 밝혔다.
  3. 版本 사이에서 다른 部分은 굵은 글씨體로 標示
  4. 檀君 天符經의 初期主席 硏究, 김주진(金洙眞), 圓光大學校 東洋學大學院, 2005年
  5. 崔致遠의 後孫인 최국술이 집안에 傳해졌다고 主張하는 崔致遠의 글들을 모아 編纂한 冊이다.
  6. 《註解[환단고기]》, 김은수 飜譯·註解, 가나出版社, 1985年
  7. 이를 傳해받은 사람 亦是 송호수다.
  8.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2010
  9. 1924年 에서 1925年 까지 發表한 6篇의 論文을 모은 것으로, 申采浩가 '天符經'에 對해 最初로 擧論한 冊이다.
  10. 박성수, 國學硏究員 第 6回 學術大會 "天符經의 哲學과 歷史的 再解釋" 基調演說
  11. 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2010
  12. 삿社 미츠아키, 〈韓末·日帝時代 檀君信仰運動의 展開 : 大倧敎·檀君敎의 活動을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大學院, 2003
  13. 金洙眞, 檀君 天符經의 初期主席 硏究, 圓光大學校 東洋學大學院, 2005年
  14. 윤창대 註解, 《精神哲學桶便》, 우리出版社, 2004年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