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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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車一赫
차일혁 (1950년경)
차일혁 (1950年頃)
別名 차갑수(戶籍上 이름)
차용철(族譜上 이름)
차철
出生日 1920年 8月 20日 ( 1920-08-20 )
出生地 日帝强占期 全羅北道 金堤郡 금산면 성계리
死亡日 1958年 8月 9日 ( 1958-08-09 ) (37歲)
死亡地 大韓民國 忠淸南道 公州郡 공주읍 錦江
學歷 洪城工業專修學校
황푸軍官學校
本館 沿岸
配偶者 진복희
子女 차길진
服務 조선의용대
反共遊擊隊
戰鬪警察
服務期間 1938年 ~ 1943年( 조선의용대 )
1948年 ~ 1950年(反共遊擊隊)
1950年 ~ 1953年( 戰鬪警察 )
勤務 全北警察局
西南地區 戰鬪警察隊
忠州警察署 署長
鎭海警察署 署長
忠南警察局 警備課長
公州警察署 署長
最終階級 總警
指揮 靑年防衛隊
翁골年 遊擊隊
全北警察局 第18戰鬪大隊
西南地區 戰鬪警察隊 第2聯隊
主要 參戰 中日 戰爭
韓國 戰爭
기타 履歷 忠州職業少年學院 設立
徐薰 花郞武功勳章
忠武武功勳章 (5)
大統領首長
從軍기장(2)
共匪討伐機張(2)
警務官 追敍
保管 文化勳章 追敍

차일혁 (車一赫, 차갑수(戶籍上 이름), 차용철(族譜上 이름), 李堈(李剛, 金剛山에 몸을 숨겼을 때 戶籍이 없는 것처럼 꾸며 匠人이 새로 지어준 이름. 中國 中央軍官學校 時節까지 使用), 차철과 차용철, 酒蟲洪(車燕,-,酒蟲洪, 中國에서 地下活動을 할 때 使用), 차리革(車利革, 解放 後 至剛 先生을 따라다닐 때 이름). 1920年 8月 20日 ( 陰曆 7月 7日 ) ~ 1958年 8月 9日 )은 韓國의 獨立運動家 出身으로 大韓民國 의 警察官이다.


出生과 學生 時期 [ 編輯 ]

차일혁은 8月 20日 金堤郡 금산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出生日은 7月 2日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1] 그는 1935年 15歲 때 洪城工業專修學校(現 國立한밭대學校)에 入學하였다. 이때 그는 人生의 一大 轉換期를 맞이한다. 1936年 16歲 洪城工業專修學校 2學年 때, 學生들에게 獨立精神을 鼓吹시키는 發言을 하였던 한 朝鮮人 敎師를 逮捕하려던 日帝 高等係 刑事를 때려서 日本警察의 手配를 받았다.


獨立運動 [ 編輯 ]

그는 洪城學校를 그만 두고 日帝警察로부터 逃亡者 身世가 되었다. 이에 對해서는 日本 高等係刑事가 强制連行하려 하자 그를 救出하기 위해 刑事에게 物理力을 行使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記錄되기도 하고. [2] , 다른 한便으로는 같은 學校에 다니는 同期生이 日帝에 辱하다가 日本巡査에 連行되자 그를 救出하기 위하여 暴力을 쓰다 그렇게 되었다고도 한다. [3] .

學校에도 가지 못한 채 逃避生活을 하다가 井邑 本家에 暫時 들렀다가 常住해 있던 井邑警察署 刑事들에게 붙잡혀 押送되던 中 脫走에 成功하였다. 以後 그는 全州 松廣寺와 대원사에서 숨어 있다가 故鄕에서 멀리 떨어진 金剛山 神溪寺(神溪寺)에 避身하였다. [4] . 이곳에서 結婚 後 차일혁은 妻家의 勸誘로 1936年 末 中國 上海의 金融會社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937年 17歲에 그는 中國에서 運命을 결정짓는 스승을 만난다. 그가 至剛(池江) 金性洙(金聖壽) 이다. 1900年生인 김지강은 차일혁에게 精神的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다. 김지강은 故鄕인 慶南 密陽에서 3·1獨立萬歲運動에 主動者로 參與했다가 日本 警察에 쫓기는 身世가 되자 中國으로 건너와 獨立運動에 投身하게 됐다. 김지강 은 차일혁에게 祖國의 意味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抗日運動에 投身할 것을 勸誘했다. 이에 그는 丈人이 金融會社를 果敢하게 그만두고 家族과 連絡을 끊고 蹤跡을 감춘 채, 激烈한 抗日運動에 뛰어들었다. [5] 차일혁은 김지강을 따라다니며 南畫韓人靑年聯盟에서 活動하던 사람들과 親分을 쌓았다. 이때부터 김지강은 차일혁에게 스승이자 父母였다. 김지강의 活動領域은 넓었다. 滿洲에서 金佐鎭 將軍과도 交分을 나누고 있었고, 義烈團과 南畫韓人靑年聯盟 일도 하며, 日本軍과 親日派 處斷에도 그 누구보다 熱誠的으로 參與하는 行動派 獨立鬪士였다. [6]

1937年 김지강은 日本憲兵에 逮捕돼 海州와 西大門 刑務所에서 無期囚로 服役하다가 解放이 되어 풀려났다. 차일혁은 김지강이 逮捕된 後 헤어져 傷害一帶에서 韓國電池工作隊로 活動했다. [7]

1940年 20歲 2月에 本格的인 抗日 武裝鬪爭을 위해 中國 中央軍官學校 황포分校에 入學하고 7月에 卒業했다. 이곳에서 軍事 知識과 戰術을 배워 卒業과 함께 7月에 中央軍 第1全區 32師團의 中國 砲兵將校, 政治 將校 等의 資格으로 抗日戰爭에서 日本軍과 戰鬪를 벌였다. 또한 砲兵運用戰術은 後에 빨치산 討伐作戰에서 매우 有用하게 活用되었다. [8]

1942年 22歲에 中央軍 第1全區 第32師團 砲兵中隊長으로 日本軍과 싸웠다. 그 後 金元鳳이 創設한 조선의용대에서 活動하면서 아나키스트로 活動했다. 조선의용대에서 차일혁은 차철(車轍)과 차용철(車鏞徹)이란 이름으로 活動했다. [9] 2月부터 日本軍은 胎缸産 一帶를 包圍하고 大大的인 攻擊을 敢行하였으며, 조선의용대는 이에 맞서 戰鬪를 벌였다. 이때 動員된 日本軍의 兵力은 4萬 名에 5月에는 20個 師團 約 40萬 名을 投入하였는데 戰車와 航空機까지 動員하였다. [10]

차일혁은 조선의용대 에서 毛澤東 八路軍 과 함께 作戰을 하며 戰鬪를 指揮하였으며 日本軍이 包圍한 胎缸産 一帶를 中國 八路軍 砲兵司令官人 무정(武亭)과 함께 戰鬪하여 등소평을 包含한 中國 八路軍 指揮部를 危機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큰 役割을 했다. 이때 차일혁은 毛澤東式 戰法인 遊擊戰을 接하고, 砲兵 戰術을 익혔다. 차일혁의 砲兵 戰術은 中共軍 砲兵司令官이었던 무정(武亭)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11]

毛澤東은 蔣介石 國民黨 政府軍보다 武器도 劣惡하고 兵力이 뒤떨어졌으나, 民心을 얻은 遊擊戰에서 이겨 中國 大陸을 차지했다. 차일혁은 이런 毛澤東의 遊擊戰 原則을 徹底히 지켰다. 이런 經驗을 통해 빨치산들의 遊擊戰을 잘 알고 있어 住民들을 빨치산으로부터 分離시키고, 그들의 遊擊戰을 逆으로 利用하여 討伐하였다. 빨치산으로부터 買收된 住民의 거짓情報로 큰 被害를 봤을 때도 住民에게 復讐하지 않고 民心을 얻었다. [9]


光復 以後 活動 [ 編輯 ]

1945年 光復 以後 南韓 政局은 左右 理念 對立의 葛藤과 混亂이 亂舞하는 狀況이었다. 親日勢力과 殘留한 一部 日本官僚들은 美軍政下에서 活動하였다. 日本軍司令官은 美 24軍團長에게 1945年 9月 1日 便紙를 써 朝鮮人들 사이에는 共産主義者와 獨立 煽動家들이 설치고 있어 平和와 秩序를 해칠 수 있어 이들을 制御해야 한다고 主張했고, 9月 9日 서울에 入城한 美軍은 朝鮮總督府 建物에서 朝鮮總督府 出身 管理들을 거느리고 軍政을 始作했다. 이 무렵 차일혁은 다른 朝鮮義勇軍은 北韓으로 大部分 갔지만, 차일혁은 9月 9年 만에 陸路를 통해 故國으로 돌아왔다. 그는 스승인 至剛 金性洙와 自由社會建設者聯盟에 加入하였다. 自由社會建設者聯盟은 左翼들의 攪亂에 對備하여 獨立 韓國의 來日을 準備하자는 趣旨를 가지고 設立되었다. 抗日運動을 하다 解放 後 釋放된 김지강과 함께 그는 차리革(車利革)이란 이름으로 活動하면서 殘留한 日本官僚들을 處斷해나갔다. 서울에 있던 日本官僚에는 日帝 高等警察 사이가 시치로, 쓰보이, 하라다 等이 있었다.

차일혁은 名射手로 拳銃 3자루를 救해 밖에 나갈 때에는 늘 들고 나갔다. 차일혁은 공형기와 함께 日帝 當時 警察들을 拳銃으로 射殺하는 任務를 맡았다. 사이가는 獨立運動家와 思想犯들을 野蠻的으로 拷問해 惡名을 떨쳤던 人物이다. 行政區域上 서울이 京畿道에 屬했던 時節이므로 서울을 包含한 京畿道의 重要 思想關聯 事件은 大部分 사이가의 손을 거쳤다. [12] 日本으로 避身했다 돌아온 사이가는 解放 以後에도 當時에 雨後竹筍처럼 새로 생기는 各種 組織을 査察하고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獨立을 妨害하였다.

1945年 11月 2日 어둠이 깔리기 始作한 저녁 6時30分, 사이가는 서울 원남동 124番地 自宅 近處 郵遞局 건너便 路上에서 拳銃 두 발을 맞고 죽었다. 11月 9日 저녁 6時頃, 只今의 서울 저동 四거리에 있던 自由新聞社 2層에 이규창, 방우용 等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자리에 차일혁 (當時 假名: 김혁, 차리革)도 같이 있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방우용은 白晝에 市內 거리를 闊步하는 惡質 하라다에게 銃擊을 加했다. 以後 11月 14日 午前 11時 40分 頃, 獨立運動家들을 無數히 잡아 갔던 前 總督府 傷害 特派員 쓰보이가 백병원에 있는 하라다에게 問病을 가던 中, 이들에게 發見되어 狙擊 當했다. 쓰보이와 하라다는 獨立鬪士들을 主로 檢擧했던 惡質警察이었다.

차일혁을 包含한 이들의 義擧로 日帝 强占期 朝鮮總督府 核心 殘存勢力인 警察核心部가 處斷되거나 日本으로 歸國했다. 나머지 勢力도 日本으로 結局 우리나라를 抛棄하고 日本으로 돌아갔다.

電柱에서 治安隊長이 되다 [ 編輯 ]

1946年 26歲에 日本 高等警察 暗殺로 手配를 받던 中 全州로 내려갔다. 電柱에서 차리革(車利革) 이란 이름을 차일혁( 車一革)으로 바꿨다. 電柱에서 三星祭祀工場에 就業하여 警備(警備)主任으로 勤務하면서, 工場罷業을 誘導하는 남로당願들과 對立하는 가운데 工場施設을 保護하였고 勞務課長으로 있으면서 會社 內에 浸透한 남로당 系列을 剔抉하였다. [13] [14]

1947年 27歲 2月 5日 全羅北道 老子(勞資)協會 理事가 되었다. 1948年 8月 15日 大韓民國 政府 樹立으로 <政府組織法〉李 制定?公布되고, 이 法에 따라 國防部가 設置되었고 護國軍에 對한 規定을 두었다. 1949年 2月 차일혁은 우리나라 最初의 豫備軍인 護國 103聯隊 大將이 되고,광복군 出身 經歷을 인정받아 大隊長으로 特別 採用되었다. 12月에 徵兵制가 實施되면서 오늘날 鄕土豫備軍과 같은 護國軍(護國軍)李 廢止되고 靑年防衛軍(靑年防衛軍)李 새롭게 組織되었는데, 차일혁은 全州市 중앙동에 本部를 둔 15靑年防衛隊 總務處長에 選任되어 隊員들과 有事時의 事態에 對備하는 訓鍊을 했다. 靑年房偉大는 施設과 裝備가 絶對的으로 不足했다. 服裝도 統一되지 않은 隊員들과 木銃으로 訓鍊을 쌓아나갔다. [15] [16]

1950年 30歲, 1月 19日 防衛訓鍊學校 1期 高級幹部候補 卒業했다. 6月 25日 6.25戰爭 이 일어났다. 7月 當時 南韓은 戰爭에 對한 事前 對備가 全혀 없었기 때문에 北韓軍은 瞬息間에 全北까지 밀고 내려왔다(7월 17日 强勁 防禦線, 19日 이리 陷落). 이에 國軍과 靑年房偉大는 後退를 하게 되었다. 이때 차일혁은 現役 陸軍 大尉로 復歸하여 새로 再編되는 第7師團에 配置됐다. 이곳에서 陸軍 第7師團 直屬의 國軍遊擊隊(北韓軍 動向 把握 및 心理戰 展開 等 目的)를 編成하라는 作戰命令을 받았다. [17]

國軍 第7師團이 再編되고 있을 때 北韓軍 第6師團이 忠南西海岸으로 進出한 後 湖南地域으로 進擊했다. 全北地域의 빨치산들은 회문산에 道黨司令部를 두고 山岳地形으로 둘러싸인 井邑,任實,淳昌,복흥,雙치 等에서 活動하며 後放置案을 威脅했다.

차일혁은 故鄕인 全北을 死守하기 위해 隊員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 後退한 狀況에서 차일혁을 包含한 19名의 隊員들은 遊擊隊를 組織하여 貧弱한 裝備를 가지고 北韓軍이 占領한 前週와 任實에서 경각산에 土窟을 파고 숨어지내며 ‘翁골年 遊擊隊’를 組織해 人民軍 補給車輛을 襲擊하는 等 仁川上陸作戰 以後 全北地域을 되찾을 때까지 게릴라 活動을 하였다. [18]

9月 28日, 全北地域이 유엔軍의 第2師團에 依해 收復되자 차일혁은 臨時로 全州市 治安隊長에 任命되었다. 10月 1日 北上한 國軍과 合流하여 臨時로 유엔軍 2師團 全州 治安隊長으로 服務하였으나 遊擊隊 活動 過程에서 입은 한쪽 팔의 負傷으로 不得已 除隊하였다. 10月 26日까지 井邑警察署 收復作戰에 參加하였으며 10月 27日부터 11月 27日까지 高敞警察署 收復作戰에 參加하였다.


第18戰鬪警察隊大將(빨치산 討伐隊長)이 되다 [ 編輯 ]

仁川上陸作戰 以後 洛東江戰線에서 미처 北으로 도망가지 못한 北韓軍 敗殘兵과 南韓占領地域에서 活動하던 地方共匪들은 智異山을 根據地로 遊擊戰을 펼치며 빨치산을 組織해 本格的으로 活動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삐라를 撒布하고 車輛과 派出所 等을 襲擊하였다. 빨치산들은 그들이 掌握한 地域에 이른바 ‘人民共和國 體制’를 模倣한 統制機構를 設置하고,대한민국 治安이 미치지 못하는 ‘解放區(解放區)’를 만들어 게릴라 活動의 軍事基地로 利用하였다. 이에 國軍과 함께 이들을 討伐하기 위한 戰鬪警察隊(戰鬪警察隊)의 必要性이 擡頭되었다. 全北道警(全羅北道 警察局)에서도 戰鬪警察隊의 新設을 위해 人材를 募集하고 中國 抗日戰線 當時의 同志였던 최석용(崔錫傭) 全北地區 戰鬪司令官 等의 勸誘로 警察이 되기로 決心하였다. 仁川上陸作戰 以後 北韓軍이 占領했던 全北地域으로 第11師團 第13聯隊가 들어오고, 제18전투경찰대대가 創設되자 大隊長이 되어 輕減 職責으로서 警察이 되었다.

12月 15日 慶尙道 警察幹部學校에서 갓 卒業한 김근수, 이진찬,조명제, 李元湃 經緯와 戰爭 初期 人民軍과의 實戰 經驗이 있는 박기락,이기린 傾斜 等 50名을 새로 配屬받아 200餘 名의 隊員을 確保하고 김의택 道警局長,김가전 全北支社, 이우식 法院長 等의 地方有志들이 參席한 가운데 18大隊 創設式을 가졌다. 우희갑, 김진구 等 護國軍 出身 部下들을 中隊長에 任命하고 정동렬 警衛를 重火器 大將에 임명하여 어느 程度 戰鬪隊列을 갖추었다. 第18戰鬪警察隊臺는 後方을 攪亂하고 있는 이들 빨치산을 討伐하는 것이 主要 任務였다. [19] [20]

그는 제18전투경찰대대에서 適地適所에 적합한 軍人 配置하였다. 戰鬪를 할 수 있는 者와 없는 者를 把握하여 戰鬪要員膽力과 運動性이 뛰어난 者와 行政要員膽力은 弱하나 行政能力을 갖춘 子으로 區分하여 戰鬪編成을 하였고,전투요원 中 精銳要員으로 斥候偵察隊를 編成하여 빨치산의 同情을 探知하여 이에 對한 對策을 세운 뒤 作戰을 實施했다.또한 人民軍에게 父母를 잃은 17~18歲 靑少年으로 構成된 大隊를 만들어 新羅 畫廊에서 이름을 따와 '花郞小隊'라 이름을 붙이고 實戰經驗이 豐富한 이한섭에게 洞泄하도록 맡기고, 花郞의 强한 精神을 심어주어 제18전투경찰대대의 核心 戰力으로 育成하였다. 이들은 빨치산 討伐에서 이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任務를 完遂했다. [21]

當時 차일혁 大隊長이 討伐해야 했던 빨치산 數字는 國軍의 正規軍 2個 軍團과 맞먹는 6萬 名에 達했다. 빨치산들이 全北 地域에 몰려 있었던 것은 그 地域이 平野地帶로 食糧을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 智異山에는 빨치산의 總本山 格인 '남부군司令部'가 있었으며, 智異山-회문산-內藏山-德裕山 等의 山岳地帶는 게릴라 活動에 最適의 條件을 갖추고 있었다. 차일혁은 빨치산 歸順者로 構成된 ‘搜索隊’를 編成하여 共匪討伐에 活用하기도 하였다. [22]


구이면 作戰 [ 編輯 ]

1950年 12月 26日 ~ 12月 28日, 第18戰鬪警察隊代의 첫 出戰이 있었다. 一名 '구이면 作戰'이다. 6.25戰爭이 일어나고 12月 16日 大韓民國의 警察은 戰鬪警察部隊를 만들고 빨치산 討伐에 나섰지만 제대로 된 武器와 裝備를 支援할 수 없었다. 차일혁은 12月 27日 貧弱한 裝備와 訓鍊이 不足한 隊員들을 指揮하여 빨치산을 相對로 戰鬪를 벌였다. 全北 完州郡 구이면은 밤에는 人民共和國으로 變하는 等 恒常 襲擊을 받고 있는 狀況이었다. 차일혁을 비롯한 戰鬪警察隊員들은 이 地域 山 속에 根據를 두고 있는 빨치산 部隊를 攻擊하여 劣惡한 武器에도 不拘하고 6時間 20分間의 交戰 끝에 勝利하였다. 戰鬪 中에 빨치산들이 쏜 銃알을 세어가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銃이 몇 정인지 正確히 알아맞혔다. 그 程度로 膽力이 셌고, 傳貰를 읽는 判斷力도 빠르고 正確했다. 地域 住民의 거짓 情報와 빨치산 轉向者로부터 情報를 入手해 빨치산을 奇襲 攻擊하려던 中 빨치산으로부터 攻擊을 받았으나 唐慌하지 않고 迫擊砲를 쏘면서 攻擊하여 大勝을 거두었다. 빨치산들 中 歸順한 情況이 認定되고, 轉向의 義師가 보이면 歸順者로 處理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配慮하였다. 구이면에서 生捕한 5名의 빨치산을 歸順者로 處理하여 炊事班에서 일하도록 하였고 人民軍에게 協助한 住民일지라도 自首하면 관대히 處分하였다. [23] 차일혁은 徹底한 빨갱이가 아닌 住民들에 對해서는 或 그들이 左翼에 同調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便으로 吸收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區裏面 戰鬪에서 生捕한 5名의 빨치산을 죽이지 않고 歸順者로 處理하고 炊事班에 配置하였다. [24] 그는 빨치산을 部隊員으로 編成하는 方法 等을 통해서 많은 犧牲을 줄이고 同時에 戰鬪戰力度 向上시켰다. 戰鬪 以後 生捕된 捕虜 等에 對해서는 捕虜들을 轉向시키는 等 여러 努力들을 통해 그들의 人權을 保障해주고자 努力하였다. [4]

高敞 作戰 [ 編輯 ]

1951年 1 ? 4後退로 서울을 中共軍에게 다시 내어주고 我軍은 南쪽으로 밀려났다. 이에 智異山에 結集된 빨치산들은 더욱 氣勢騰騰해졌다. 當時 高敞은 道內에서 가장 危殆로운 地域이었다. 3月 13日 밤. 1, 2, 3中隊는 연화봉을 向하여 銃 攻擊을 開始. 我軍의 火力과 詐欺에 밀려 敵들은 물러나기 始作하였다.이에 차일혁은 特有의 機智를 發揮하여 부안면을 통하는 길을 除外한 三面으로 攻擊해 들어가 빨치산들을 包圍하자 敵들은 부안면 方面으로 逃走하기 위해 長淵姜을 건너려 하였으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였다. 애기봉 기슭에 있던 중회키部隊와 부안면에 布陣하였던 高敞警察署部隊가 敵들을 向하여 集中 攻擊하여 警察思想 보기 드문 大戰果를 이루었다. 敵의 벼 700가마는 住民들에게 돌려주었다. [25] 3月 30日 部隊는 靈巖,도솔암,禪雲寺 等을 지나 稜線을 타고 溪谷을 넘으며 一帶 山岳 掃蕩戰을 벌여 빨치산들에게서 벗어난 住民들 安心하고 生業에 從事하도록 하였다. 上部에서 前科 確認을 위해 非人間的인 共匪討伐 競爭에 抗議하자 以後 野蠻的인 前科 報告가 없어졌다. 高敞 作戰 當時 高敞 禪雲寺 隣近에서 태어난 서정주는 禪雲寺를 좋아했던 詩人이다. 徐廷柱 는 當時 『全北日報』에 글을 寄稿했는데, 全北日報 김만석 記者에게 차일혁 將軍이 禪雲寺와 도솔암 等 우리의 千年寺刹이 毁損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傳해주기를 當付했다. [26] 20日間에 걸쳐 高敞地域의 治安을 確保하게 되었다.

井邑 作戰 [ 編輯 ]

1951年 4月 15日, 차일혁은 井邑女中에 指揮本部를 設置하였다. 井邑은 全北에서 農土 기름지고 山林이 鬱蒼해 物資가 豐富한 곳으로 늘 빨치산에게 食糧을 수탈당했다. 빨치산들은 山間部落을 奇襲한 것을 除外하고도 정주읍을 24回에 걸쳐 거의 每日같이 奇襲했다. 井邑郡(郡)은 戰爭이 始作되기 前부터 野山隊 共匪들의 出沒이 끊이지 않았다. 井邑은 낮에는 大韓民國, 밤에는 人民共和國이라 할 程度로 빨치산이 활개를 치던 곳이다.

當時 빨치산 勢力은 만만치 않았다. 白巖部隊(大將:박판쇠) 300名,왜가리部隊(大將:박춘생, 全北道黨 軍司令官) 野社大(野山隊) 300名, 井邑 軍黨과 各 面黨部隊 300名 氣泡病團 300名, 其他 300名,都合 1,500名假量의 빨치산들이 井邑에 隣接한 山岳地帶에 布陣하고 있었다. [27]

이런 井邑에서 차일혁의 部隊는 軍警 合同作戰에서 정문산,입암산,雙치 等地의 共匪들을 追擊하여 8師團 作戰地域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任務였다. 井邑은 靑年防衛軍들은 戰爭 以前부터 이곳의 治安을 맡아서 해왔고, 이들이 提供한 情報를 土臺로 作戰을 遂行하였다. [28] 井邑一帶에서 作戰을 遂行하다. 山中에서 白鳥歌劇團 의 歌劇 '눈 나리는 밤’ 을 公演했는데, 1998年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 은 이때의 公演을 '눈물의 女王'이라는 오페라로 만들었다. 이 作戰으로 內藏山과 白巖山 等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을 擊退하여 射殺 190名, 生捕 62名을 비롯해 銃器와 實彈 等을 押收했다.작전을 遂行하다 內藏寺 大雄殿이 불에 탔는데, 아쉬운 點이다.

화엄사를 지켜내다 [ 編輯 ]

1951年 5月, 全羅北道에 새로 駐屯한 8師團 (當時 師團長 최영희 准將)과 軍警合同 會議 參席次 차일혁은 度系로 갔다. 會議에는 智異山 戰鬪警察隊 司令官 신상묵 을 비롯한 警察 指揮官들과 최영희 師團長 및 8師團 參謀들이 參席했다. 會議에서 빨치산들의 根據地가 될 만한 査察을 불태우라는 指示가 내려졌다.

차일혁 警務官님의 孫女 차소영 理事가 화엄사 主催 追慕式에서 感謝 人事를 傳하고 있다.

會議 後 따로 모인 戰鬪警察隊 指揮官들은 화엄사 消却 命令에 對해 憂慮를 표했다. 수풀이 우거져 共匪들의 根據地가 될 만한 査察이나 庵子를 燒却하라는 指示는 作戰上 當然한 것이었지만 모두들 難色을 표하였다. 화엄사 所在 地域은 8師團 房得尹 大隊長이 管轄하고 있었고, 命令도 房得尹 大隊長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房得尹 大隊長은 命令 遂行 問題를 苦悶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차일혁 18大隊長은 房得尹 大隊長에게 解決策을 提案했다. 차일혁은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足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千年 以上의 歲月로도 不足하다."라고 하며 文化財에 對한 所信과 우리 文化를 지켜내려는 哲學을 밝혔다. 이에 華嚴寺 大雄殿 等의 門짝을 떼어내어 門짝만 燒却했다. 차일혁은 上部의 命令을 "共匪들의 隱身處를 없애고 觀測과 射擊을 容易하게 하자는 것"으로 理解했고, 門짝만 뜯어내어 燒却해도 그 目的은 充分히 達成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房得尹 大隊長도 이에 同意했고, 이로써 화엄사는 全體 査察이 燒却될 危機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9] 泉隱寺 , 雙磎寺 , 禪雲寺 等 有名한 査察 等 文化財들에 對한 爆擊도 될 수 있는 대로 避했다.

각황전에 65周忌 차일혁 警務官님 追慕材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차일혁은 화엄사를 完全히 燒却하지 않았다는 理由로 懲戒를 받고 俸給이 깎이는 減俸 處分을 받았다. [6] [30] 차일혁은 全州로 돌아와 그동안 밀린 書類들을 整理하던 中 各種 誠金과 慰問品이 强制로 거두어들인 것을 알고 住民들에게 돌려주었다. 1958年 曹溪宗 招待宗正 효봉 스님은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에게 感謝狀을 주었다. 戰鬪警察隊 第2聯隊長으로 在職 中에는 全羅南道 白羊寺·화엄사·泉隱寺, 全羅北道 禪雲寺·금산사, 慶尙南道 雙磎寺에서 戰爭의 火魔로부터 消失될 危機에서 千年古刹을 지켜 낸공로로에 感謝를 表現했다. 1998年 화엄사 境內에 차일혁 功績碑가 세웠졌으며, 2022年 화엄사는 10月 華嚴文化祭를 主催하면서 차일혁 警務官 追慕式을 擧行했다. 智異山 大華嚴社 주지 德門 스님은 차일현 警務官 追慕碑 앞에서 追慕式을 嚴修했으며, 차일혁記念事業會에서도 遺家族과 함께 기꺼이 參與하였다. http://www.newsrep.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7715 ]

화엄사를 비롯해 求禮郡과 警察關係者, 차일혁記念事業會 여러분이 追慕茶禮材에 參席해 차일혁 警務官님을 기렸다.

화엄사의 住持 德門 스님은 2023年부터 覺皇殿에서 차일혁 警務官 追慕茶禮材를 奉行하겠다고 밝혔다. 화엄사 等 智異山 査察을 지켜낸 차일혁 警務官을 事實上 重創造로 모시겠다는 뜻에서다. 화엄사 德門 스님은 2023年 8月 10日 차일혁 警務官의 祭祀를 覺皇殿에서 드렸다. 때마침 颱風 카눈이 威勢를 떨치며 韓半島를 집어삼킬 듯 비바람을 몰고 왔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화엄사 故 차일혁 警務官의 追慕재는 德門 스님의 主宰 아래 全羅南道頃 廳長, 求禮 郡守, 警友會 會長, 警察분들이 함께했고, 차일혁記念事業會 代表 차소영님과 會員들이 화엄사의 式順에 맞추어 故人을 追慕하였다.


차일혁記念事業會 代表인 차소영 理事는 昨年 華嚴音樂祭에서 차일혁 警務官님 追慕祭를 지낸 데 이어, 올해 65周忌 忌祭祀를 차일혁 警務官님이 지켜주신 화엄사의 覺皇殿에서 茶禮재로 지내게 되어 感懷가 매우 새롭다고 하면서 오늘날 大韓民國이 存在하는 것은 6.25戰爭 當時 고 차일혁 警務官님뿐만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無名의 數많은 護國英靈들이 목숨을 바쳐 犧牲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화엄사 주지 德門스님과 右肩 스님, 그리고 總務部長님, 성기홍 博士님을 비롯한 많은 화엄사 關係者분들에게 眞心을 다해 感謝드리며, 颱風에도 不拘하고 參席해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고개 숙여 感謝의 마음을 傳했다.

德門 스님이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 警務官님의 文化財 사랑이 길이 傳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2023年 茶禮材를 마련한 德門 스님은 感激하면서 "文化遺産의 價値를 理解한 先覺者 차일혁 警務官님이 있어 많은 文化財의 消失 被害를 줄일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차일혁警務官님은 화엄사뿐 아니라 泉隱寺, 雙磎寺, 금산사, 白羊寺, 禪雲寺, 德裕山 査察을 비롯한 周邊의 千年 考察들을 智慧로운 決斷으로 穩全히 保存하였으며, 이 功德은 智異山 臺화엄사의 千年歷史와 더불어 民族文化遺産 保存에 對한 後孫들의 尊敬과 感謝의 徵標로서 萬臺에 걸쳐 宣揚될 것이다라고 强調했다. 故人의 業績과 維持를 後孫과 査察뿐만 아니라 全 國民에게 알려야겠기에 覺皇殿에서 奉行했다면서 그 이름은 千年古刹 화엄사에 길이 새겨질 것이고, 功德은 子孫萬代에 깊이 뿌리내릴 것이다."라고 稱頌했다. 覺皇殿에서 追慕茶禮齋를 마친 화엄사 德門 스님과 求禮郡 關係者, 警察, 遺家族은 차일혁 警務官 記念碑에서 默念하며 故人을 기렸다.

이현상과 첫 大田, 명덕리 戰鬪(全北 長壽) [ 編輯 ]

1951年 7月 11日 이현상은 長水郡 명덕리 出張所를 襲擊하고,다음 날 狀啓 周邊에 있는 903高地, 惡호산,백화산,三峯高地를 占領하였다. 7月 13日 當時 南部君을 이끌던 이현상은 長水郡 명덕리 出張所에 出沒했으며, 곧 警察 側에 所謂 停戰會談을 提議하였다. 명덕리를 自身들의 圈域으로 認定하면 生捕한 警察을 釋放한다는 內容이었다. 7月 15日 以後 차일혁은 남부군 司令官이던 이현상과의 戰鬪를 벌여 명덕리를 되찾아 왔다. 이로써 茂朱, 長壽, 居昌 方面의 交通路가 다시 열렸고 빨치산들에게 잡혀간 警察官 25名과 良民 500名을 救出하였다.

8月 2日 차일혁은 鐵柱部隊 部隊長이 되어 全北警察局 鐵柱部隊長(聯隊長級)으로 任命받아 17大隊,18大隊, 36大隊를 統合하여 指揮하게 되었다. 鐵柱部隊는 윤명운 警務官이 제17전투경찰대대와 第18戰鬪警察隊臺를 합친 데다 36戰鬪警察隊臺를 創設하여 함께 묶어 만든 部隊이다. [31] [32] [33]

가마골 奪還 作戰 [ 編輯 ]

1951年 8月 15日?9月 25日 鐵柱部隊長 차일혁(車一赫) 輕減이 첫 番째 맡은 任務는 가마골 奪還 作戰이었다. 가마골은 '빨치산의 모스크바'로 불릴 程度로 빨치산의 威勢가 대단했다. 빨치산 關聯 小說이나 記錄에 단골로 登場하는 가마골은 南韓 빨치산을 指揮한 남로당 政治委員 여운철이 반드시 死守해야 할 곳으로 定한 要衝地였다. [34] 가마골은 全北 빨치산의 據點일 뿐만 아니라 全國 最强 빨치산 部隊가 旺盛하게 活動했던 가마골 구림면은 빨치산의 影響圈에 있었다. 회문산 기슭 가마골 베틀마을은 井邑과 任實로 가는 道路가 만나는 곳이어서 '베틀마을'李 누구의 手中에 있느냐에 따라서 軍警 또는 빨치산의 勢力을 가늠할 수 있었다. [35] 1950年 9月 仁川上陸作戰 以後 방준표가 이끌던 빨치산들은 軍警이 討伐作戰을 펼치자 淳昌의 회문산 깊숙이 들어와 期間砲까지 設置해 놓고 戰鬪를 벌였다. [36]

이런 가마골은 蘆嶺山脈의 險峻한 봉우리로 둘러싸여 外郭高地를 防禦하기는 쉽지만 攻擊은 힘들어 軍警이 발조차 들여놓지 못한 地域이었다.

차일혁 部隊長은 가마골을 奪還하기 위해 外郭의 高地를 包圍하면서 하나씩 占領해 가는 作戰 펼쳤다. 全南 部隊와 17大隊는 추월산, 全南 特攻隊長 기우대 輕減이 指揮하는 部隊와 36大隊가 內藏山, 가마골 後方인 庶子鳳 稜線에는 淳昌警察署部隊가 회문산으로 가는 退路를 막았다. 18戰鬪警察隊代가 빨치산의 彈幕을 뚫고 高地를 占領했기 때문이다. 그 過程에서 大隊長 連絡兵이 쓰러지는 等 많은 犧牲 끝에 마침내 용추봉을 奪還하게 됐다. 때맞춰 17戰鬪警察隊臺도 龍두봉을 占領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차일혁은 部隊 指揮所를 재빨리 용추봉으로 옮기고, 陣頭指揮했다. 結果는 大成功이었다.

이 戰鬪를 통해 차일혁 部隊는 빨치산 射殺 135名, 生捕 95名, 銃器 78梃을 鹵獲했다. 그에 비해 차일혁 部隊의 被害는 戰死 7名과 負傷 8名이었다. 作戰에 함께 同參했던 全南 警察部隊의 前과는 射殺 114名, 生捕 11名이었고, 被害는 戰死 9名에 負傷 9名이었다. [37]

가마골 戰鬪는 1951年 9月 1日에 創設되어 빨치산 出身 문순묵이 이끌고 一般人, 빨치산, 警察로 構成된 步아라部隊 가 11月에 參與해 큰 勝利를 거두기도 했다. 보아라부대는 가마골 作戰에서 單 1名의 死傷者 없이 無事히 歸還하였다. [38]

無主에서 6地帶 殲滅 [ 編輯 ]

1951年 末부터 1952年 初까지 軍과 警察은 群團級 規模의 ‘百野戰戰鬪司令部’를 設置하고 이현상이 所屬된 남부군을 大大的으로 掃蕩하는 作戰에 突入하였다. 9月 末~10月 初 茂朱는 北傀의 共匪 南派 루트인 太白山脈의 줄기인 六十嶺에 隣接해 있고,경상도 忠淸道의 共匪들이 連結되는 루트와 가까운 地域이었다. 또한 이현상의 故鄕인 錦山과도 隣接한 곳이었다. 차일혁 部隊는 旣存의 이현상 部隊와 김일성의 指令으로 南下하는 6地帶歌 合流하려는 中間 地點에 자리를 잡아 이현상 直屬의 57師團과 南下하는 6地帶歌 合流하지 못하도록 作戰을 펼쳤다. 이런 作戰 遂行 過程은 9月 18日 차일혁의 『陣中記錄』이 『全北日報』에 揭載되었다. 10月 2日 6地帶 誘引作戰으로 射殺 61名, 生捕 7名,美食京畿 1梃,消息京畿 1梃,따발銃 2梃,아카補 小銃 28梃, 拳銃 2梃의 戰果 거두었다. [39] [40]

11月 28日 차일혁은 茂朱警察署長이 되었으며, 前 茂朱警察署長이었던 김두운으로부터 茂朱에 關한 仔細한 情報를 入手하였다. 12月 白善燁 將軍이 指揮하는 '百野戰戰鬪司令部'가 벌이는 智異山 빨치산 討伐 作戰에 參與하였다. 朝鮮勞動黨 南部指導部 政治部冊 여운철의 射殺했으며, 이 作戰의 成功으로 차일혁과 査察遊擊隊長 김용식 警査,保安界 임덕준 傾斜가 金星花郞勳章(金星花郞動章)을 받았다. 當時 茂朱는 建物의 80%가 잿더미로 變해 있었다. 嚴冬雪寒에 住民들이 움幕生活을 하자 유엔에 빨치산과 代置하기 위한 塹壕를 建設한다고 해 建築資材를 支援받았다. 이 資材로 차일혁은 추위에 떠는 住民들에게 家屋 1,000號를 補修하고 지어 주었다. [41] [42]

1952年 10月 28日 任實警察署長이 되었다. 차일혁은 茂朱에서 데려온 김용식과 10名의 隊員들을 합쳐 査察遊擊隊를 더욱 더 훈련시켰다. 11月 4日~11月 17日까지 많은 共匪를 射殺하거나 生捕. 그中 任實郡當 專攻大將으로 全羅線 奇襲을 비롯하여 車輛襲擊을 敢行한 李起鵬을 生捕하여 歸順시킨 뒤 이상윤 射殺에 큰 도움을 받았다. [43] 12月 8日 史跡地界 作戰으로 南原과 회문산에서 住民들을 괴롭혀 온 北韓軍 大尉였던 외팔이 이상윤을 射殺. 외팔이 이상윤이 다리에 重傷을 입고 治療를 받다가 12月 25日 死亡하였다.

이현상 生捕作戰 [ 編輯 ]

1953年 5月 15日 차일혁은 總警으로 昇進함과 同時에 西南地球戰鬪警察隊 第2聯隊長에 任命되었다. 西南地球戰鬪警察隊 第2聯隊長 時節, 이현상 生捕 作戰 突入했으며 西南地球戰鬪警察隊에서는 光州捕虜收容所에서 脫出한 反共捕虜 200餘 名을 모아서 만든 '618部隊'를 配屬받아 빨치산 討伐作戰을 벌였다. 차일혁은 그 以前부터 빨치산 出身으로 構成된 搜索隊를 運用하면서 赴任地마다 데리고 다녔으며, '618'部隊는 作戰에 投入되었다. [44]

8月 3日. 火開場 作戰 화개장을 包圍하여 集中 攻擊하였으며, 이현상이 있을 만한 곳을 集中搜索, 周邊으로부터 中心部로 作戰 範圍를 좁혀, 그의 側近들을 하나둘씩 逮捕해 나갔다. 이현상의 扈衛大將이었던 송관일 射殺, 全南道當 倂記課長 최달만 射殺, 全南道當 鎭衛隊 88部隊長 이봉삼 射殺하였다.

9月 4日 京城의전 出身으로 光州에서 眼科에 勤務했고, 6.25발발 以後에 全南道當에서 活動 中 智異山으로 들어가 第5지구당 專屬 醫務官이 된 이형련을 生捕하여 그가 破傷風으로 죽어갈 때 自身 몸의 피를 輸血해 주고, 夫人을 만나게 하는 等 人間的으로 對하자, 이형련은 地圖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이현상이 숨은 곳을 알려주고는 죽었다. [45] [46]

休戰協定 締結 直後에 남로당 指導部가 美國의 間諜이라는 罪名으로 肅淸당하자 北韓에서 남로당을 支持할 勢力이 사라짐. 1953年 8~9月 智異山에서 開催된 朝鮮人民遊擊隊 會議에서 金日成이 行한 남로당系 肅淸을 支持하면서 이현상은 平黨員으로 降等당하고 智異山 빗점골에 幽閉되었다. [47] 차일혁은 이현상이 完全히 實權을 잃고 半 監禁狀態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9月 13日 이현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인 빗점골에 搜索隊를 埋伏해 있다가 9月 17日 搜索隊는 20時頃 3?4名으로 보이는 共匪들과 遭遇하여 接戰을 벌였다. 이때 이현상 射殺된 것으로 推定되며 618部隊가 이현상의 護衛兵 둘을 사로잡았고, 그들이 이현상의 屍身을 確認 [44] 차일혁은 이현상의 屍身을 河東의 쌍계사로 옮겼는데, 몸에서 蘇聯 拳銃, 日記와 限時, 念珠가 나왔다. 이현상의 屍身은 서울로 옮겨져 防腐 處理하여 展示되었다. 展示를 마친 이현상의 屍身은 親戚들이 모두 引受를 拒否하자 차일혁이 周邊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스님을 불러 讀經하고 佛敎式으로 化粧해 自身의 鐵帽를 벗어 이현상의 뼈를 모아 담고서는 Ml 小銃으로 곱게 빻아 화개場터 近處 蟾津江에 遺骨 가루를 뿌렸다. [48] [49] 이로 因해 上部로부터 叱責을 받아서 部隊員들에게 太極武功勳章이 3個나 授與되었지만, 차일혁은 받지 못하였다. [50]

이현상 射殺 以後 智異山의 빨치산들은 힘을 잃고 消滅해갔다. 이로써 大韓民國은 1948年 旅順 10 ? 19事件과 6 ? 25戰爭 그리고 停戰協定 締結 以後에도 繼續되었던 全北 等 三南地帶와 智異山 一帶를 主 舞臺로 삼아 軍警과 對峙하며 後方地域을 不安에 떨게 했던 빨치산들을 完全히 討伐하고,후방 地域의 安定과 平和를 되찾게 됐다. [51] 차일혁은 빨치산과 숱한 戰鬪를 치렀다. 그는 可及的 歸順을 誘導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이 싸움을 두고 차일혁은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後에 歲月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美國과 蘇聯 두 强大國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同族相殘이었다고.”라는 글을 <全北日報>에 寄稿하였다.

이현상과 차일혁이 取했던 삶의 方式을 記憶하고 再吟味해보는 것도 重要하다. 두 사람은 暴力의 不可避性 속에서도 單純한 이념적 對立을 넘어 民族的 苦痛에 아파하면서 같은 民族으로서의 民族愛를 發揮하였는데, 人命을 함부로 殺傷하지 않아 捕虜로 잡은 사람을 人間的으로 待遇하였다. 가장 熾烈하게 暴力의 現場에서 對立했던 이현상과 차일혁에게는 民族的 苦痛을 共有하는 側面이 있었고 生命을 尊重하는 民族愛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빨치산 指導者나 討伐隊長과는 다르게 自身의 便에서도 잘못을 찾고 責任을 묻는,그래서 잘못을 單純하게 相對에게 떠넘기지 않는 省察的 態度도 보여준다. 또한 善과 惡이라는 二分法을 가지고 相對를 評價하는 데에서 벗어나 民族의 相生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는 方法을 提示하고 있다. [52]

戰爭 以後 [ 編輯 ]

1954年 忠州警察署 署長으로 發令을 받은 그는 忠州職業少年學院을 設立하여 中學校 進學을 못하는 不遇靑少年들에게 學業機會를 提供하였다.

조선의용대는 八路軍과 함께 抗日遊擊戰을 펼쳤던 獨立運動團體로, 智異山 隣近에서 빨치산 討伐時에 共産主義者들에게 溫情的이었다는 理由로 鎭海警察署長으로 在職時 左翼 嫌疑로 調査를 받기도 하였다. 차일혁 警務官은 以後 公主警察署長으로 左遷된 後, 1958年 金剛의 곰나루에서 家族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歲의 나이에 他界하였다. [53] 自殺하였다는 說도 있다. 1958年 曹溪宗 初代 宗正 효봉 으로부터 感謝狀을 授與받았다. 1998年 화엄사 는 화엄사 境內에 그를 기리는 功績碑를 建立하였다. [6]

事後 [ 編輯 ]

1990年 그의 아들은 《빨치산 討伐隊長 차일혁의 手記》를 出刊하였다.

2008年 文化財廳 에서는 빨치산의 根據地인 화엄사 等의 査察을 불태우라는 上部의 命令을 拒絶하여 名札들을 保存한 功績이 있는 차일혁 警務官에게 感謝狀을 追敍하였다. [6] [54] 警察廳에서는 2011年 8月 차일혁 總警을 警務官으로 昇進 追敍 하였다.

2008年 文化體育觀光部는 '文化의 날' 記念式에서 文化에 寄與한 功勞를 認定하여 寶冠文化勳章을 敍勳하였다.

2013年 6·25戰爭 60周年事業委員會와 戰爭記念館 等 關係者와 戰爭史 專攻學者들로 構成된 ‘이달의 6·25戰爭英雄 選定委員會’의 深度 있는 審議와 檢證을 통해 올해 ‘이달의 6?25戰爭英雄’ 12名에 選定되어 國家報勳處 9月의 달曆 人物로 公式 指定되었다. [55]

2013年 차일혁 警務官은 戰爭記念事業會에서 高麗時代의 崔茂宣 將軍을 비롯한 62名의 護國人物 中 한 名으로 選定됐다. 護國의 人物에 警察이 包含된 것은 이番이 처음이며 9月 이달의 護國人物로 選定되었다. [56]

2013年 6·25動亂 當時 화엄사, 雙磎寺, 泉隱寺 等 智異山 一帶 考察과 금산사, 白羊寺, 禪雲寺 等을 電話(戰火)에서 求한 崇高한 뜻을 기려 화엄사에 故차일혁 警務官 功德碑가 除幕되었다. [57]

2014年 2月 차일혁記念事業會(代表 차길진)는 美國 알링턴 國立墓地 無名勇士의 墓를 參拜, 獻花하고 獨立運動家 出身 戰爭英雄인 차일혁(1920~1958) 警務官의 記念牌를 美國 알링턴國立墓地의 國內 戰爭 博物館에 該當하는 메모리얼홀에 入城해 그 뜻을 기린다. [58]

2014年 9月의 護國人物로 選定된 차일혁 警務官의 追慕 顯揚行事가 4日 戰爭記念館에서 擧行됐다. 6·25戰爭에서 警察은 陸軍 다음으로 많은 戰死者 1萬58名(警察은 行方不明者 等을 包含 1萬7,000名 推算)을 記錄했는데, 戰爭記念事業會는 警察官으로서는 처음으로 차일혁 警務官을 護國人物로 選定했다. [59]

2015年 護國英雄 10人 中 警察官으로서는 唯一하게 選定된 차일혁 警務官은 七寶發電所를 奪還한 功績을 인정받아 代表 公的地로 정읍시가 指定돼 6月 3日 차일혁 警務官의 永遠郵票(永遠郵票) 發行 記念式이 열렸다. [60]

2016年 國立大前賢充員은 ‘9月의 顯忠人物’로 6.25戰爭에서 七寶發電所를 死守하고 智異山을 掌握한 빨치산 남부군 殲滅 戰鬪를 指揮한 차일혁 警務官을 選定하였다. [61]

2017年 全北西部報勳支廳은 10月 29日 井邑市 쌍암동 內藏山 워터파크에서 護國英雄 次 警務官의 胸像 除幕式을 가졌다 [62]

2019年 '韓國 警察의 魂(魂)'인  고(故) 차일혁(車一赫) 警務官의 追慕 胸像이 11月 15日 全北地方警察廳 玄關에 제막됐다 [63]

2022年부터 10月에는 화엄사 主催 '華嚴文化祭'에서 차일혁 警務官을 追慕하고 있으며, 2023年 8月 10日부터는 遺家族을 招待해 '차일혁 追慕茶禮再'를 올리고 있다.

敍勳 및 受賞 [ 編輯 ]

  • 花郞武功勳章
  • 忠武武功勳章
  • 大統領首長
  • 從軍기장
  • 共匪討伐機張
  • 2008年 文化財廳 感謝狀
  • 2008年 保管 文化勳章 追敍

家族 關係 [ 編輯 ]

參考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各州 [ 編輯 ]

  1. 최선우·朴 陳, 《韓國警察硏究-警察精神(警察精神)에 關한 硏究-차일혁(車一赫)을 中心으로-》(제11권 第4號, 2012) 351쪽.
  2. 《警察綜合學校》(警察綜合學校, 2008) 21-22쪽.
  3. 차길진 《빨치산 討伐隊長 차일혁의 手記》(喉蛾이엠, 1990) 24쪽.
  4.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喉蛾이엠, 2014) 386쪽.
  5.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차길진, 2014,喉蛾이엠) 50쪽.
  6. [1]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喉蛾이엠, 2019) 16쪽.
  8. 최선우·朴 陳《韓國警察硏究, 「警察精神(警察精神)에 關한 硏究-차일혁(車一赫)을 中心으로-》(한국경찰연구, 第11卷 第4號, 2012年 겨울) 352쪽.
  9.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喉蛾이엠, 2019) 17쪽.
  10. 최선우·朴 陳, 《韓國警察硏究, 「警察精神(警察精神)에 關한 硏究-차일혁(車一赫)을 中心으로-》(한국경찰연구, 第11卷 第4號, 2012年 겨울) 353, 354쪽
  11.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喉蛾이엠, 2019) 188쪽.
  12. 강윤식 <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臺>(2014) 73~80쪽.
  13. 최선우·朴 陳, 《韓國警察硏究, 「警察精神(警察精神)에 關한 硏究-차일혁(車一赫)을 中心으로-》(한국경찰연구, 第11卷 第4號, 2012年 겨울) 355쪽
  14. 강윤식 <차일혁의 解放 後建國기와 6·25戰爭 後의 活動(1945^1950, 1954?1956)> (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臺, 2014) 81-82쪽.
  15.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喉蛾이엠, 2019) 18쪽.
  16.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喉蛾이엠, 2014) 52, 387쪽.
  17. 남정옥 <6·25戰爭 時 차일혁(車一≫)의 後方地域 戰鬪와 意義> (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大會, 2014) 37, 39쪽.
  18. 최선우·朴 陳, 《韓國警察硏究, 「警察精神(警察精神)에 關한 硏究-차일혁(車一赫)을 中心으로-》(한국경찰연구, 第11卷 第4號, 2012年 겨울) 356쪽
  19.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喉蛾이엠, 2014) 69, 73, 75, 387쪽.
  20. 남정옥 <6·25戰爭 時 차일혁(車一≫)의 後方地域 戰鬪와 意義> (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大會, 2014) 34, 35쪽.
  21.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喉蛾이엠, 2019) 71쪽.
  22. 남정옥 <6·25戰爭 時 차일혁(車一≫)의 後方地域 戰鬪와 意義>(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大會, 2014) 41,42쪽.
  23.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2019,喉蛾이엠) 15-16쪽.
  24.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차길진, 2014,喉蛾이엠) 88쪽.
  25.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차길진, 2014,喉蛾이엠) 127쪽.
  26.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2019,喉蛾이엠) 130쪽.
  27.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차길진, 2014,喉蛾이엠) 150쪽.
  28. 최선우·朴 陳 <韓國警察硏究-警察精神(警察精神)에 關한 硏究-차일혁(車一赫)을 中心으로-> 第11卷 第4號(2012年 겨울) 365쪽.
  29. 차길진 《빨치산 討伐隊長 차일혁의 手記》(기린원, 1990) 121~123쪽.
  30. 남정옥 <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大會> 2014, 51~52쪽.
  31. 남정옥, <6·25戰爭 時 차일혁(車一≫)의 後方地域 戰鬪와 意義> (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大會, 2014), 46, 47쪽.
  32.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차길진, 2014, 喉蛾이엠) 203~207쪽.
  33. 차길진 《빨치산 討伐隊長 차일혁의 手記》(喉蛾이엠, 2011) 152~155쪽.
  34. 김옥규.김석《빨치산 討伐 戰鬪警察 遊擊隊-보아라 部隊》(2022, 넷피플) 1121-122쪽.
  35. 김옥규.김석《빨치산 討伐 戰鬪警察 遊擊隊-보아라 部隊》(2022, 넷피플) 63쪽.
  36. 김옥규.김석《빨치산 討伐 戰鬪警察 遊擊隊-보아라 部隊》(2022, 넷피플) 72쪽.
  37. [차일혁의 삶과 꿈 40. 鐵柱部隊長으로 첫 戰鬪인 가마골 奪還作戰을 指揮하다]
  38. 김옥규·김석《빨치산 討伐 戰鬪警察 遊擊隊-보아라 部隊》(2022, 넷피플) 121-122, 134쪽.
  39. 남정옥, <6·25戰爭 時 차일혁(車一≫)의 後方地域 戰鬪와 意義> (차일혁先生 護國選定記念學術大會, 2014), 48쪽.
  40. 최선우·朴 陳 <韓國警察硏究-警察精神(警察精神)에 關한 硏究-차일혁(車一赫)을 中心으로-> 第11卷 第4號(2012年 겨울) 359쪽.
  41.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2019,喉蛾이엠) 38쪽.
  42.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2014,喉蛾이엠) 26, 271, 274쪽.
  43.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2019,喉蛾이엠) 165쪽.
  44. 김옥규·김석《빨치산 討伐 戰鬪警察 遊擊隊-보아라 部隊》(2022, 넷피플) 254쪽.
  45.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喉蛾이엠, 2019) 157쪽.
  46.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2014, 喉蛾이엠) 318~325쪽.
  47. 김옥규·김석《빨치산 討伐 戰鬪警察 遊擊隊-보아라 部隊》(2022, 넷피플) 273쪽.
  48. 남정옥 《차일혁의 삶과 꿈》(喉蛾이엠, 2019) 132쪽.
  49.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2014, 喉蛾이엠) 358쪽.
  50. 文化財사랑 2009年 3月號 37쪽 文化財廳
  51. 차길진 《또 하나의 戰爭》(2014, 喉蛾이엠) 32쪽.
  52. 윤지미 <分斷트라우마 形成期 民族的 和解 可能性 硏究-이현상과 차일혁의 關係를 中心으로-> (건국대학교 碩士論文) 1~3, 11, 36, 38, 43쪽.
  53. <이현상 評傳> 내고 訂正廣告 낸 理由는?
  54. “화엄사를 지킨 빨치산 討伐隊長” . 2008年 6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6月 5日에 確認함 .  
  55. 올해 ‘이달의 6?25戰爭英雄’ 12名 選定
  56. 警察 最初 '護國의 人物'로 選定된 차일혁 警務官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7. 6·25 當時 화엄사 지킨 故차일혁 警務官 功德碑 除幕
  58. “美國 알링턴國立墓地, 英雄 차일혁 기린다” . 2014年 2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2月 12日에 確認함 .  
  59. “차일혁 警務官, 고맙습니다…9월의 護國人物 現樣式 現場” . 2014年 9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9月 10日에 確認함 .  
  60. 井邑署, 차일혁 警務官 永遠郵票 發行 記念式
  61. “國立大前賢充員, ‘9月의 顯忠人物 차일혁 警務官’ 選定” .  
  62. “‘護國英雄’ 차일혁 警務官 胸像 井邑서 除幕” .  
  63. “全北警察廳 '차일혁 警務官 追慕 胸像' 除幕” .  
  64. [2] Archived 2018年 2月 18日 - 웨이백 머신 普天敎의 敎主이며, 當時 井邑居住民과 鄕土 18大隊員들, 在野史學者 안후상氏의 證言等으로 차경석의 庶子라는 公公然한 祕密이라는 所聞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65. [3] 戶籍上 차일혁의 아버지로 記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