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현
(陳昌鉉,
1929年
~
2012年
5月 13日
)은
大韓民國
의
바이올린
製作者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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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年
日帝强占期
때
慶尙北道
金泉
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떠돌이 藥장수가 켜는 바이올린에 關心을 갖고 當時 初等學校 4學年 때 日本人 敎師를 만나 바이올린 演奏法을 배웠다.
[1]
1943年
日本으로 건너갔으며 朝鮮人 差別을 이겨내고 晝耕夜讀하면서 夜間中學校를 卒業했고,
1955年
메이지 大學
英文科를 卒業했다.
[1]
卒業 後 專攻을 살려 英語敎師가 되려고 했으나 在日 韓國人이라는 理由 때문에 자리를 求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偶然히 스트라디바리우스에 對한 講演을 듣고 바이올린 製作에 손을 대기 始作했다.
[1]
1957年
부터 建設現場의 廢資材를 活用하여 바이올린을 만들었는데, 搜所聞 끝에 當時 日本의 3代 바이올린 連奏 巨匠으로 稱頌받던 侍奴자키 히로쓰구(篠崎弘嗣,
しのざき ひろつぐ
)에게 바이올린을 팔면서 因緣을 이어가게 된다. 侍奴자키는
홍난파
및
安益泰
의 大學校 同窓으로, 當時 朝鮮 留學生들에게 좋은 感情을 갖고 있었으며 差別받는 位置에 있던 진창현의 苦痛을 理解하고 經濟的으로 도움을 주었다.
以後 韓日 國交가 樹立된 뒤
大韓民國
의 故鄕 金泉을 찾았으나, 이福 兄이 그를
北韓
의 間諜이라고 政府機關에 告發했다. 진창현은 모진 拷問을 받았으며 無嫌疑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拷問으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經驗이 오히려 삶의 所重함을 깨닫게 하면서 더 좋은 바이올린을 만들어야겠다는 動機를 附與하는 契機가 되었다고 밝혔다. 日本으로 돌아온 뒤 바이올린의 質을 높이기 위한 各種 實驗에 沒頭하였다.
1976年
〈國際 바이올린·비올라·첼로 製作者 콩쿠르〉에서, 5個 種目에 걸쳐 金메달을 受賞하는 榮光을 누리게 되었다.
1984年
美國바이올린製作者協會로부터 '마스터 메이커'
[2]
(Master Maker)의 稱號를 받았다.
2008年
10月 世界 韓人의 날 記念式에서 大韓民國 政府로부터 國民勳章 無窮花章을 받아
[3]
名譽를 回復했다.
도쿄
센가와(仙川) 所在 陳(陳) 工房에서 바이올린 製作을 하다가 2012年 5月 13日 大腸癌으로 도쿄에 있는 自宅에서 別世하였다. 享年 84歲
[4]
[5]
.
評價 및 媒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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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현의 바이올린은 明記(名器) 製作者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에 가장 近接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정경화, 강동석, 아이작스턴, 로스트로포비치, 헨릭 쉐링 等 名演奏者들을 顧客으로 確保하고 있다.
2004年
11月 27日
후지 TV
에서 그의 一生을 드라마로 脚色한 《
海峽을 건너는 바이올린
》(
海?を渡るバイオリン
)이 放映되었으며
[6]
2005年
SBS
特輯 다큐멘터리 《天上의 바이올린》을 통해 그의 삶이 大韓民國에 紹介되었다. 2008年 韓國 國籍者로는 最初로 日本 高等學校 2學年 英語敎科書에 紹介되기도 했다.
[1]
關聯 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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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上의 바이올린》: 진창현의 自敍傳型 隨筆. ISBN 10-8991095224
- 《하늘을 울리는 바이올린》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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