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上 (學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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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上 (曺?, 1876年 7月 13日 - 1945年 10月 9日)은 高齡 出身의 學者이다. 高靈郡 다산면 송곡리 [1] [2] 에서 태어났으며 本貫은 昌寧(昌寧) [3] . 者(字) 는 門褓(文甫), 號(號) 는 봉강(鳳岡)이다. 齋室(齋室)로는 後送再(後松齋) 가 있다. 後送재는 高靈郡 鄕土文化遺産 第 10號로 指定되었으며, 慶尙北道 高靈郡 다산면 벌지로 10에 位置한다.

家計 [ 編輯 ]

高靈郡 다산면 송곡리 昌寧조氏 태복경公派 集姓村

好調參判 퇴우당 趙桂衡(退憂堂 曺繼衡)의 18世孫, 大邱都護府使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의 15世孫, 井州牧師 五戒 조정립(梧溪 曺挺立)의 14世孫, 量産郡守 설柱 조시량(雪州 曺時亮)의 13世孫이며 李麟佐의 亂 陜川 에서 大擧 加한 조성좌(曺聖佐)의 10世孫이다. 조성좌는 反逆罪로 1728年 4月 1日 陜川에서 處刑을 當했으며 조성좌의 아들 兄弟 조명상(曺明相)과 照明協(曺明莢)은 滅門之禍(滅門之禍)를 避하기 위해 故鄕 陜川郡 에서 달아나 達城郡 가창면 鄭代理로 隱居하였다. 李麟佐의 亂 이 어느程度 平定된 後 故鄕을 잊지 못해 洛東江을 건너서 지나다가 只今의 高靈郡 다산면 송곡리 입향하였다. [4]

그後, 겨우 살아남아 代를 이어 나갈 수 있었고 垂直(壽職) 掌樂院正 조계흥(曺啓興)의 7世孫이며 曾祖할아버지는 조규승(曺奎承)이며, 曾祖할머니는 五원(吳瑗)의 딸 海州 吳氏 이다. 海州吳氏는 孝婦(孝婦)로 靜慮(旌閭)를 받고, 復戶(復戶)의 惠澤을 입었다. 또한 『星州地(星州誌)』에 孝行이 收錄되었으며, 後山 이도복(厚山 李道復)李 「孝婦戰」을 지었다. 이를 기리기위해 昌寧조氏 門中에서 1930年 송곡마을 隣近에 숭효각을 建立했다. 아버지는 조정환(曺珽煥)이며, 어머니는 장무헌(張武憲)의 딸 옥산 張氏 이다. 夫人은 席陵惡(石能岳)의 딸 忠州 昔氏 羅州 林氏 이다.

活動事項 [ 編輯 ]

祖上은 高靈郡 다산면 松谷村 에서 弟子를 養成하며 學問에 精進하였다. 10歲 때 아버지의 名으로 臨齋 서찬규(臨齋 徐贊奎) 의 門下에서 學問에 對한 뜻을 敦篤히 하고 힘써 實踐하여 首弟子(首弟子)가 되었으며, 스승은 七調勳(七條訓)인 “立地地帶(立志之大), 입심指定(立心之正), 眞實心지(眞實心地), 過失筆個(過失必改), 節文近似(切問近思), 讀書通透(讀書通透). 變化氣質(變化氣質)” 等을 써주면서 學問的 成就를 激勵하였다.

  • 立地地帶(立志之大) : 뜻 세우기를 크게 하라
  • 입심指定(立心之正) : 마음 세우기를 바르게 하라
  • 眞實心지(眞實心地) : 마음을 眞實하게 하라
  • 過失筆個(過失必改) : 過失(過失)을 반드시 고치라
  • 節文近似(切問近思) : 切實하게 묻고 가까운데서 생각하라
  • 讀書通透(讀書通透) : 글을 읽어 舍利(事理)를 뚫어지게 깨달아 환하게 하라
  • 變化氣質(變化氣質) : 氣質(氣質)을 다르게 변화시켜라

서찬규가 別世한 後에 全北 扶安郡 계화면 계화리 계화도에서 後學을 養成하였던 朝鮮 最後의 거유(巨儒)라 불린 性理學者인 奸才 戰友(艮齋 田愚) 에게 弟子로 받아 줄 것을 請하며 禮幣(禮幣)를 올리고 敬意를 표하는 집誌(執贄)를 請하는 書信을 올려 1917年 答信(答信)을 받고 42歲에 奸才(艮齋)의 門下生이 되어 性理學의 震源(眞源)을 듣고 警(敬)을 바탕으로 하는 “義理(義理), 實踐(實踐), 克己(克己), 咸陽(涵養)”에 關한 思潮勳(四條訓)을 받아 實踐하는데 全力(專力)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平生의 要地로 삼아서 後學을 養成하는데 힘썼다. 그는 抗日 儒學者 詩庵 이직현(是菴 李直鉉), 米糠 박승동(渼江 朴昇東) 等 先賢(先賢)을 따르고 當代의 名儒(名儒)이었던 上司 이병운(上舍 李柄運), 德川 성기운(悳泉 成璣運), 석농 오진영(石農 吳震泳), 고암 이종익(苦庵 李鍾翼), 덕암 박순호(德庵 朴純鎬), 隕石當 朴在勤(雲石堂 朴在根), 윤량式(尹亮植) 等과 交遊하였다. 祖上의 文人이었던 金在哲(金在喆), 조긍환(曺兢煥), 이동진(李東鎭) 等의 弟子들은 스승의 鶴은(學恩)에 報答하고 同門間 友誼를 敦篤히 하고자 ‘三逸界(三一契)’를 만들고, 1938年 講學소(講學所)인 後送再(後松齋) 를 建立하여 每年 모여서 井邑例(庭揖禮)를 行하였다. 三逸系의 序文과 後송재의 氣門은 德川 성기운(悳泉 成璣運)李 지었으며, 後송재명(後松齋銘)은 고암 이종익(苦庵 李鍾翼)이 썼다.

學問과 思想 [ 編輯 ]

宋時烈의 學統을 繼承한 臨齋 서찬규(臨齋 徐贊奎)와 奸才 戰友(艮齋 田愚) 門下에서 受學하여, 記號 洛論界熱 의 學脈을 이었다. 그는 文人들에게 仁義禮智信의 五常(五常)을 强調하였고, 父母와 임금과 스승은 나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가르쳐주신 恩惠가 똑같이 重要하므로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生三四日(生三事一)’의 姿勢로 가르쳤다. 봉강은 首都論的(守道論的) 出處義理(出處義理)를 固守하였다. 日帝强占期의 暗鬱한 狀況에서 自身이 世上으로 나가기보다는 숨어 살면서 義理를 지키고 도(道)를 傳授하는 것을 當時의 狀況에서 必要한 出處義理로 보아 이러한 自身의 생각을 ‘國花地隱逸者(菊花之隱逸者)‘ [5] 로 比喩하였다. 奸才(艮齋) 가 계화도로 들어가 隱遁하여 옛 것을 지키면서(去之守舊) 出處義理(出處義理)하였던 것과 脈을 같이 하였다. 봉강의 出處義理는 바로 學問硏究(學問硏究)와 後進養成(後進養成)으로 이어졌다.

또한 學問은 自己 修養을 통한 참된 人間의 完成 卽 위기지학(爲己之學)을 目標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社交론(四敎論)’에서 傳統的인 儒學의 敎育內容이었던 詩書藝落(詩書禮樂)의 工夫에 對하여 强調하고 社交를 네 季節에 分屬시켜 落(樂)은 和暢한 소리이니 봄에 마땅하고 詩(詩)는 發揚(發揚)하는 것이니 여름에 마땅하고 예(禮)는 닦아서 이루는 方法이니 가을에 마땅하고 서(書)는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겨울에 마땅하다는 工夫方法을 論하였다. 이러한 工夫를 效果的으로 하기 위해서는 讀書(讀書)와 窮理(窮理), 逆行(力行)의 모든 것을 切磋琢磨(切磋琢磨)해야 한다고 强調하였다. 그리고 功은 栗谷(栗谷) 尤庵(尤庵) 의 心性論(心性論)을 守護, 발전시킨 奸才(艮齋) 의 성리설(性理說)을 代辯하여 ‘審卽이심성逸物便(心卽理心性一物辨)’이란 글을 통하여 한週(寒洲) 이진상(李震相)의 ‘心卽理說(心卽理說)’과 ‘심성일물說(心性一物說)’을 批判하였다. ‘性理圖說(性理圖說)’을 통하여 千(天), 成人(聖人), 君子(君子), 小人(小人)으로 圈域(圈域)을 區分한 것은 氣(氣)의 請託수박(淸濁粹駁)에 依한 것으로 氣質變化(氣質變化)를 통해 小人(小人)은 君子(君子)로 君子는 成人(聖人)으로 다가가도록 努力해야 한다는 變化氣質(變化氣質)의 修養論(修養論)을 主張하였다. 또한 ‘敬天愛人說(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儒學의 理念을 實踐하고자 하였다. ‘敍懷설(鋤茴說)’에서 千里(天理)를 保存하고 人慾(人慾)을 除去해야 함을 藥草인 防風(防風)밭의 김매는 것에 比喩하고 이를 實踐하기 위한 方法으로 事物(四勿). 謝絶(四絶), 驅使(九思), 구용(九容)을 提示하였다.

  • 事物(四勿) → 人(仁)의 實踐을 위한 네 가지 條目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듣지 말며(非禮勿聽),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儒敎(儒敎)의 네 가지의 金(禁)하는 가르침.

  • 謝絶(四絶) → 네 가지 絶對的인 禁止事項

臆測을 갖는 일이 없고(毋意), 期必코 해야 한다는 일이 없으며(毋必), 固執부리는 일도 없고(毋固), 自身만을 내세우려는 일도 없다(毋我).

  • 驅使(九思) → 君子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아홉 가지 생각

① 恒常 눈에 가림이 없이 밝게 볼 것(視思明) ② 恒常 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것(聽思聰) ③ 恒常 溫和하여 성낸 빛이 없도록 할 것(色思溫) ④ 恒常 外貌를 端正히 할 것(貌思恭) ⑤ 恒常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言思忠) ⑥ 恒常 일을 恭敬하고 삼갈 것(事思敬) ⑦ 恒常 의심쩍은 일은 先覺(先覺)에게 물어 알 것(疑思問) ⑧ 恒常 분한 일이 있을 때는 事理(事理)를 따져서 참을 것(忿思難) ⑨ 恒常 財物(財物)을 얻게 될 때 의(義)와 이(利)를 區分하여 取捨(取捨)를 가릴 것(見得思義)

  • 구용(九容) → 君子로서 取해야 하는 아홉 가지 姿勢

①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라는 뜻이다(足容重) ② 손가짐을 공손히 하라(手容恭) ③ 눈가짐은 端正히 하라(目容端) ④ 입은 조용히 가지라(口容止) ⑤ 말소리는 조용히 하라(聲容靜) ⑥ 머리 가짐을 恒常 곧게 하라(頭容直) ⑦ 숨쉬기를 정숙히 하라(氣容肅) ⑧ 설 때는 덕스럽게 하라(立容德) ⑨ 얼굴 모습은 莊嚴하게 하라(色容莊).

‘血氣잠(血氣箴)’에서 모든 災殃(災殃)의 出發은 血氣(血氣)를 調節하지 못함에서 起因(基因)하였다고 보고 血氣를 調節하여 中華(中和)의 狀態에 이르는 것을 學問과 修養의 目標로 삼았다. 봉강(鳳岡)의 禮說(禮說)은 基本的으로 禮法(禮法)의 基本原則을 지키면서 認定(人情)을 따른다는 예(禮)의 基本精神에 充實한 立場에 있었다. 봉강 先生의 삶과 學問은 亂世에 儒學의 道(道)를 守護하고 俗世에 傳授해 주려는 數도(守道)와 顚倒(傳道)에 그 中心이 있었다.

著述 및 作品 [ 編輯 ]

『心性理氣說(心性理氣設)』과 『大學碩의(大學釋義)』가 있다. 2012年 曾孫 조택상(曺澤相)李 『봉강文集(鳳岡文集)』(2冊)을 飜譯하여 刊行하였다. 序文은 1967年 7月 권용현(權龍鉉)이 썼다.

賞勳과 追慕 [ 編輯 ]

墓碣銘은 송시열 의 後孫인 恩津 송재성(恩津 宋在晟)이 썼으며, 가장(家狀)은 조카이자, 文人이었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이 썼다. 2012年 立春(立春)에 後學들이 祖上의 學德을 기려서 ‘봉강先生昌寧朝貢頌德碑(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講學所였던 後送再 에 세웠다. 後送再 는 2012年 8月 1日 ‘高靈郡 鄕土文化遺産 有形資産 第10號’로 指定되었다.

墓碣銘 [ 編輯 ]

성주읍 南쪽 醫鳳山(儀鳳山) 아래 송곡마을 뒤 艮坐(艮坐)를 지고 坤坐(坤坐)를 向하여 집과 같이 쌓은 封墳은 봉강朝貢(鳳岡曺公)의 墓所이다. 공의 휘(諱)는 上(?)이요, 자(字)는 門褓(文甫)요, 貫鄕은 昌寧(昌寧)이니 時調는 新羅 때 昌盛府院君 휘 鷄龍(繼龍)이시고 大樂署勝 휘 兼(謙)에 이르러 비로소 高麗에 드러나서 벼슬이 빛나 17臺를 連續하여 平章事가 된 者가 8人이요, 所感이 된 者가 9人이나 모름지기 詳細하지 아니하다. 朝鮮朝에 들어와 好調參判 휘 契型(繼衡)께서는 靖國功臣으로 昌盛府院君을 봉하니 諡號는 문정공이시고 2臺를 傳해 휘 몽길(夢吉)께서는 喪主牧師로 左承旨에 贈職되시고 이가 應人(應仁)을 낳으시니 號는 도촌(陶村)으로 漢江 鄭 先生을 섬기시니 唯一(遺逸)로 王子師傅(王子師傅)가 되셨고, 五戒(梧溪) 휘 定立(挺立)께서는 사인(舍人)으로 백사 이문충공을 따라 怒셨고, 설柱(雪州) 휘 柴糧(時亮)께서는 文科 郡守시니 그 中世에 玄祖(顯祖)이시다. 高調 曾祖 祖父 三代는 가로되 石頭(錫斗) 가로되 糾繩(奎承) 가로되 兵戟(秉極)이요, 父親의 휘는 정환(珽煥)이요, 外祖父는 玉山장무헌(玉山張武憲)이라.

功이 겨우 10歲에 어버이 命令으로 臨齋 西貢(臨齋 徐公)에게 修學할 새 재주는 비록 露臀하나 부지런함은 남음이 있으니 臨齋께서 그 마침내 成就가 있을 것을 알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며 손수 입지 입심 等 일곱가지 條目 要緊한 말씀을 써서 힘쓰게 하시니 공이 가슴에 새기고 從事하여 스승의 바라는 뜻에 報答하고 臨齋가 別世한 뒤에는 갈팡질팡하며 우러를 바가 없어 이에 幣帛을 잡고 癲癎材를 뵙고 克己하고 修養하는 方道를 얻어 듣고는 더욱 向上(向上)하는데 奮發하여 오직 안에 着實하기를 힘쓰고 밖에 令達하기를 求하지 아니하며 林泉에서 고요히 修養하며 가난함을 便安히 여기고 뜻을 지키며 當時에 여러 명석(名碩)과 交遊하면서 線을 살피고 人(仁)을 도우는 地域을 삼고 厚生을 引導하며 성실하게 잘 開諭하여 한 가닥 微弱한 孃을 이으니 그 修學하는 者 金在哲, 조긍환 等이 三逸界를 設置하고 後送材를 마을 뒤에 建築하여 禮節을 익히고 學問을 講論하여 공이 別世한 뒤에도 해마다 서로 모여서 當日 規則을 이었다. 著述(著述)한 바 有故(遺稿) 6卷은 箱子에 있는데 그 大學碩의(大學釋義)와 性理度(性理圖)와 敬天愛人圖說(敬天愛人圖說) 같은 冊이니 다 可히 後人을 열어줄만한 것이다. 實際로 보고 얻은 것이 아니면 어찌 능히 쌓이고 奧妙한 것을 드러내고 發明함이 이와 같으리오.

공이 乙幼年 10月 9日에 別世하니 그 出生한 高宗 丙子年과 計算하면 壽命이 74年이라. 配位 忠州昔氏 능惡(能岳)의 따님은 신사년에 出生하여 丙辰 7月 29日에 別世하니 魯나라 禮節(魯禮)을 使用하였다. 5男 2女를 두셨으니 아들은 龍鳳, 茸腫, 涌溢, 用賢, 龍卓異요 사위는 全州이희증과 坡平윤동보이며 孫子 달곤과 營閫은 長男 蘇生이요, 정곤은 次男 蘇生이요, 洪곤은 사남 蘇生이요, 賞鯤과 飢困은 오남 小生이니 曾孫과 玄孫은 번거롭게 記錄하지 아니한다.

슬프다. 공이 高價(故家)의 後孫으로 일찍부터 어진 스승을 섬겨 學識이 넓고 行實이 敦篤하며 한 地方의 辭表(師表)가 되었으니 後進 선비들이 보고 느껴 일어나는데 推仰의 올바름을 잃지 아니하여 遺風 餘韻(遺風餘韻)李 只今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니 거룩하도다. 공의 막내 아들 龍卓異 그 조카 營閫을 시켜 張差 碑石을 세우려고 그 一家 乙환(乙煥)과 海水(海銖)가 와서 나에게 碑文을 請하면서 이르기를 저희들이 스승을 잃음으로부터 안房의 哀痛을 이기지 못하고 또 墓所 碑石을 세우는데 도우려고 하니 自家 잠긴 것을 發揮하고 깊숙이 있는 것을 闡明하기를 願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글을 하지 못하나 그 誠意에 感動하여 차마 끝까지 辭讓하지 못하고 드디어 名(銘)을 한다.

學問은 모름지기 自己를 위함이요

可히 남을 위함이 아닌데

무릇 只今에 사람들은 거짓을 眞實로 바꾸도다

아~ 공이시여 무리에서 뛰어나셨네

根本에 敦篤하고 實際에 힘써 德이 고을에 알려졌네

切實하신 君子여 아름다운 이름 없어지지 아니하리

그 大略을 記錄하여 끝이 없도록 昭詳하게 보이노라

德은 송재성(德殷 宋在晟)

  1. 昌寧 조氏 集姓村
  2. 4選 國會議員 조일환 과 같은 마을이다.
  3. 태복경公派 28世孫
  4. 元來 星州郡 벌紙面에 屬했던 地域이고, 1906年(高宗 43) 高靈郡에 編入했다.
  5. 菊花는 다른 꽃보다 늦게 피어 서릿발을 잘 견뎌 이기는 것으로, 隱者(隱者 : 山野에 묻혀 숨어 사는 사람) 같은 風格(風格)이 있음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