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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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 터
(淨業院 터)
대한민국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2019年 9月.
種目 有形文化財 第5號
( 1972年 5月 25日 指定)
面積 土地 691m 2
數量 石碑 1基, 비각 1棟
時代 朝鮮時代
所有 靑龍寺
位置
住所 서울特別市 鍾路區 숭인동 산3번지
座標 北緯 37° 34′ 47″ 東京 127° 00′ 59″  /  北緯 37.57972° 東經 127.01639°  / 37.57972; 127.01639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정업원 터 (淨業院 터)는 朝鮮 第6代 斷種 의 非(妃) 정순왕후 (定順王后) 송氏가 端宗의 冥福을 빌면서 살던 곳이다. 서울特別市 鍾路區 숭인동 에 있다. 1972年 5月 25日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第5號로 指定되었다.

槪要 [ 編輯 ]

端宗의 王妃인 定順王后 宋氏를 追慕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朝鮮 英祖 47年(1771)에 세운 비로, 鼻紋 一部와 비각 懸板의 글은 王이 손수 쓴 것이다.

宋氏는 端宗이 寧越에서 죽음을 當하자, 정업원에 머물며 平生 동안 그의 冥福을 빌었다. 정업원은 女僧房(女僧房)으로 元來 昌德宮 에서 그리 멀지 않은 都城 안에 있는데, 城 밖에 있었다는 傳說에 따라 이곳에 碑를 세우고 非角度 짓게 되었다. 이는 定順王后 宋氏가 東大門 밖인 이곳에서 지냈던 事實과 정업원의 住持로 있었던 일이 얽혀서 잘못 傳해온 것으로 보인다.

名稱 變更 [ 編輯 ]

終戰 文化財 指定名稱은 정업원球技 (淨業院舊基)이었으나, 朝鮮 世祖에 依해 端宗이 寧越로 流配되자 그의 비(妃)인 定順王后가 端宗을 그리워하며 生을 마쳤다고 傳해지는 정업원(淨業院)의 터와 그 터 위에 英祖가 親筆로 정업원 터임을 確認하고 '정업원球技(淨業院舊基)'라고 親筆로 써 세운 비를 2008年에 文化財로 確定하고, 指定名稱 變更基準에 따라 정업원 터 로 한글化하여 文化財 名稱이 變更되었다. [1]

現地 案內文 [ 編輯 ]

이곳은 端宗費 定順王后 宋氏 (定順王后 宋氏: 1440~1521)가 宮에서 물러난 뒤 平生을 살았던 곳이다. 定順王后는 端宗이 江原道 寧越로 流配를 떠나자 이곳에서 端宗이 있는 東쪽을 바라보며 安寧을 빌었다. 端宗이 죽은 後 1521年(中宗 16) 82歲로 世上을 떠날 때까지 端宗의 冥福을 빌며 平生을 보냈다. 後날 英祖가 이곳이 定順王后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年(英祖 47)에 ‘정업원球技(淨業院舊基)’라는 碑石을 세워 表紙로 삼도록 하였다. 元來 정업원이란 兩班 出身의 女人들이 出家하여 머물던 절을 말한다. 정업원과 마주하는 봉우리에는 ‘ 동망봉 (東望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定順王后가 端宗이 있는 寧越 쪽을 좀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업원 터 碑石에는 ‘정업원 옛 터 神妙年(英祖 47) 9月 6日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淚書)’라는 글씨와 비각 懸板에 ‘앞山 뒷바위 千萬年을 가오리(前峰後巖於千萬年)’라는 글이 있다. 이것은 모두 英祖의 親筆이다. 이 碑石은 正面 1칸 側面 1칸의 八作지붕을 한 비각 안에 있다. [2]

各州 [ 編輯 ]

  1. 서울特別市告示 第2008-378號 , 《서울特別市 指定文化財 및 文化財資料 指定名稱 變更》, 서울特別市葬, 서울市報 第2871號, 21-27面, 2008-10-30
  2. 現地 案內文 認容

參考 文獻 [ 編輯 ]

본 文書에는 서울特別市 에서 知識共有 프로젝트 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 으로 公開한 著作物 을 基礎로 作成된 內容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