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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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간 (李喜侃, 日本式 이름: 梅田二郞( 우메다 지로 ), 1875年 1月 9日 ~ ?)은 日帝强占期 의 企業人 兼 工作員으로 本籍은 平安南道 順川郡 順天面이다.

生涯 [ 編輯 ]

1897年 前後에 獨立協會 會員으로 活動했으며 1904年 부터 1905年 까지 상동靑年會 幹事를 歷任했다. 1905年 11月 상동교회에서 열린 乙巳條約 反對 모임에 參與했다. 1907年 헤이그 特使 事件 에 關與한 直後부터 身邊에 威脅을 느끼게 되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로 移住했고 1908年 블라디보스토크 附近에 있던 學校인 醜風東郊(秋豊洞校) 敎師로 在職했다.

1910年代 朝鮮으로 歸國한 뒤부터 日帝 官憲의 密偵으로 活動하는 한便 鑛業, 開墾業, 商業, 高利貸金業 等에 從事했다. 1913年 7月 4日 朝鮮總督府로부터 平安南道 成川郡 운산면 所在 鑛業(金鑛) 營業 許可를 받아냈고 1918年 11月 再(在)니콜리스크(現在의 러시아 우수리스크 ) 朝鮮人自治團 中央總會 機關紙 《 한족公報 ( 英語版 ) (韓族公報)》에 運營 資金 2,000루블을 寄贈했다.

1918年 日本의 시베리아 介入 當時 滿洲와 하얼빈 地域에서 自身의 影響力을 擴大하기 위해 自作 송병준 , 警察 구연수 , 密偵 배정자 를 利用하는 한便 하얼빈 地域 朝鮮人 有力者들로부터 資金을 끌어들여 各種 利權을 얻어냈다. 1919年 10月 中國 상하이(上海, 傷害)와 펑톈(奉天, 奉天)에서 美國의 朝鮮人 獨立運動 支援 움직임에 對한 情報를 入手한 뒤 이를 關東軍 參謀部에 傳達했다.

朝鮮總督府 密偵으로 活動하는 동안 상하이 駐在 大韓民國 臨時 政府 瓦解 工作, 유동열 金希宣 等 滿洲로 亡命한 獨立運動家에 對한 歸順 및 懷柔 工作을 遂行했다. 特히 1920年 11月부터 12月까지 進行된 이희간의 歸順 및 懷柔 工作을 받아들인 金希善은 1922年 1月 大韓民國 臨時 政府로부터 "敵에게 投降한(일제에 投降한) 變節者"로 規定되기에 이른다.

1919年 10月부터 12月까지 사이토 마코토 朝鮮總督, 우쓰노미야 다로 朝鮮軍司令官과 隨時로 面會를 가졌으며 1919年 11月에는 하얼빈 地域 朝鮮人 社會에 對한 影響力을 擴大하기 위해 배정자를 하얼빈으로 招聘하기도 했다. 1920年 6月 사이토 마코토 朝鮮總督으로부터 상하이 駐在 大韓民國 臨時 政府 瓦解 工作 및 朝鮮人 懷柔 工作 隨行 資金으로 2,000엔을 受領했다.

1922年 5月 22日 에는 日本의 國家主義 右翼 組織인 흑룡회 系列에 屬해 있던 組織인 동광回(東光會)의 朝鮮總支部 總幹事로 選任되었다. 동광會는 日本 帝國議會 에 이른바 〈內定獨立請願서〉(內政獨立請願書)를 提出하자는 運動을 展開했지만 1922年 10月 朝鮮總督府로부터 是正 方針에 違背된다는 理由로 强制 解散되기도 했다. 1924年 3月 親日團體인 各派維持聯盟 發起人으로 參與했으며 그 뒤의 行跡에 對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參考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9). 〈이희간〉.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 報告書 Ⅳ-14》. 서울. 854~8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