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규
(李弘圭,
1905年
5月 10日
~
2002年
10月 31日
,
日本式 이름
: 마루야마 아키오, 丸山晃生)는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
의 法曹人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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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年
大韓帝國
忠南
豫算
에서 태어나,
1925年
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하고,
1929年
京城法學專門學校
를 卒業하였다.
日帝强占期
檢察書記로 在職하다 서울地方檢察廳 檢事로 任用되어
1957年
서울高等檢察廳
檢査를 거쳐
1960年
法務部 矯正局長 兼 大檢察廳 檢査를 하다가
1961年
8月 12日
부터
1962年
4月 10日
까지
光州地方檢察廳
檢査場을 거쳐 1962年 大檢察廳 檢事에 復歸하였다.
1965年
退職하여 辯護士를 開業하여 平和合同法律事務所 代表를 歷任했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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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父親:
이용균
- 兄:
李泰珪
(李泰圭,
1902年
1月 26日
~
1992年
10月 26日
) 理論化學者.
- 아내: 김사순(
김삼순
과 姊妹)
- 첫째 아들: 이회정(李會正)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醫大 敎授
- 둘째 아들:
李會昌
(李會昌,
1935年
黃海道 서흥 ~ ) 政治人
- 딸: 이회영(李會英)
- 딸: 이회윤(李會允, 主婦)
- 셋째 아들: 이회성(李會晟, 계명대 敎授)
- 넷째 아들: 이회경(李會京, KAIST 테크노經營大 敎授)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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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戰爭 直前
李會昌
이 當時 競技中 4學年에 在學하고 있을 때 서울地方檢察廳 檢事였던 이홍규는 自由黨 幹部의 請託을 拒絶했다가 밉게 보여
韓國 戰爭
무렵 困辱을 치르게 된다. 이홍규는
6.25 戰爭
當時 '
남로당
원을 無嫌疑로 풀어 줬다'는 理由로 手匣이 채워진 채 連行되는 場面을 目擊했다.
[1]
아버지가 끌려가는 直接 目擊한 뒤 이회창은 衝擊에 빠져 彷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홍규는 當時 駐美大使였던
場面
의 도움으로 곧 풀려났다.
[1]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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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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