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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狀態 (獨立運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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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狀態
李相兌
出生 1891年 9月 17日
朝鮮 慶尙道 南海郡 삼동면
死亡 1955年 12月 24日
居住地 大韓民國 慶尙南道 南海郡
國籍 대한민국 大韓民國
職業 獨立運動家
賞勳 ( 建國訓長 愛族章)

이狀態 (李相兌, 1891年 9月 17日 ~ 1955年 12月 24日)은 日帝强占期 獨立運動家 이다. 1891年 9月 17日에 南海郡 삼동면 에서 出生하여 서울에서 同志들과 啓蒙勞動 團體인 朝鮮勞動大會를 組織 한 後 朝鮮勞動 總同盟에 合流하여 獨立運動 中興目的, 韓興懷組織活動을 하였다.

生涯 [ 編輯 ]

1920年 2月 16日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文 탁(文鐸)·김영만(金榮萬)·이종만(李鍾萬) 等과 더불어 朝鮮勞動大會(朝鮮勞動大會)를 組織하였다.

洞會는 勞動者의 相扶相助와 人格的 및 知的向上을 圖謀할 것을 目的으로 한 啓蒙的 勞動團體였다. 初代會長은 김광제였으나 그가 死亡하자 同年 8月 任員陣을 改編하였는데 會長에 門 탁, 副會長에 정태용(鄭泰容), 總務에 윤철중(尹喆重), 庶務에 송우익(宋又翼), 營業에 김호연(金浩然) 等이었고 그는 財務를 擔當하였다. 洞會는 全國的으로 支部를 設置하고 地方의 旣存 勞動團體의 糾合에 힘써 한때 會員이 8千餘名에 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以後 內部葛藤과 財政難으로 活動이 萎縮되던 中 1924年 4月 統一的이고 全國的인 勞動團體인 朝鮮勞農總同盟(朝鮮勞農總同盟)에 合流하였다.

한便 그는 김종명(金鍾鳴)·김인섭(金寅燮)과 함께 1919年 8月에 組織된 大韓國民會(大韓國民會)에 加入하여 獨立運動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日帝의 彈壓이 甚하여 國內 各地의 獨立運動이 漸次 弱化되어감을 慨歎하고 이를 다시 中興할 目的으로 1921年 11月 15日 京畿道 仁川의 人海旅館(仁海旅館)에서 한興會(韓興會)를 組織하였다.

이들은 以後 國內에서 獨立戰爭이 일어날 때 爆彈·拳銃 等의 武器가 必要할 것을 豫想하고 이의 使用方法을 미리 習得하기로 決定하였다. 그리하여 中國으로 가서 武器使用法을 익히기로 한 이들은 1921年 12月 16日 仁川을 出發, 中國 上海(上海)方面으로 向하던 中 京義線(京義線) 車聯關(車輦館)에서 日警에 붙잡혔다.

그는 1922年 6月 17日 平壤覆審法院에서 所謂 濟寧7號 違反으로 懲役 1年 6月刑을 言渡받고 獄苦를 치르던 中 1923年 7月 25日 假出獄하였다.

賞勳과 追慕 [ 編輯 ]

  • 1983年에 大統領 表彰
  • 1990年 애족장을 追敍 받았다.

參考 文獻 [ 編輯 ]

  • 身分帳指紋照會會報서
  • 朝鮮民族運動年鑑 50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4卷 941面
  • 東亞日報(1922. 3. 19, 4. 17)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0卷 96∼9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