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社의 便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乙社의 邊을 描寫한 그림. 가운데 목이 잘린 이가 소가노 離壘카 , 칼을 들고 목을 치는 이가 나카노오에 皇子 , 옆에 활을 들고 있는 이가 나카토미櫓 카마타리 , 안쪽에 있는 女性은 當時의 天皇인 高校쿠 天皇 이다.

乙社의 便 ( 日本語 : 乙巳の?, いっしのへん 잇시노헨 [ * ] )은 나카노오에 皇子 , 나카토미櫓 카마타리 가 宮中에서 소가노 離壘카 를 暗殺하고 小가씨 를 멸망시킨 아스카 時代 政變 이다. 以後 政權을 잡은 나카노오에 皇子의 改革을 두고 다이카 改新 이라고 한다. 흔히 小家盧 이루카가 殺害 된 事件의 것을 가리켜 "다이카 改新"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嚴密하게는 쿠데타이며, 乙社의 便 以後 行해진 一連의 政治 改革이 다이카 改新이다.

背景 [ 編輯 ]

小가씨 全盛時代 [ 編輯 ]

스이코 天皇 30年 2月 22日(622年 4月 8日), 攝政이자 우마야度 皇子(??皇子)였던 쇼토쿠 太子 가 死亡했다. 쇼토쿠 太子의 죽음으로 對豪族인 소街氏를 억누를 者가 없게 되고, 소街氏의 專橫은 날로 甚해져 그 權勢는 皇室을 凌駕할 程度가 되었다. 덴표호지 4年(760年)에 쓰여진 《등氏家電》(藤氏家傳) 〈大職家電〉(大織冠傳)에는, 소가노 離壘카 童濯 에 比喩하고 있다. [注? 1]

스이코 天皇 34年 5月 20日(626年 6月 19日), 소가노 우마코 가 죽고 그 아들인 소가노 에미視 가 그 뒤를 이어 大臣이 되었다. 스이코 天皇 36年 3月 7日(628年 4月 15日)에는 天皇이 後嗣를 指名하지 않고 昇遐하였다.

有力한 王位 繼承 候補가 된 것은 쇼토쿠 太子의 아들인 야마시로老오에王과 다무라 皇子(田村皇子)였다. 大型王을 비롯한 皇族이 이카루가라는 交通의 要衝地에 據點을 갖고 獨自的인 政治力과 巨大한 經濟力을 갖고 있던 것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소가노 에미市는 스이코 天皇의 遺言을 바탕으로 다무라 皇子를 兆메이 天皇 으로 擁立하였다. [1] 이 때 소가노 사카이베盧 마리歲 는 야마시로老오에王을 支持했기 때문에 소家奴 에미市에 依해 滅亡하였다.

641年 兆메이 天皇이 죽은 後에는 大後인 打카라皇女(寶女王)가 高校쿠 天皇 으로 卽位하였다. 《 日本書紀》 에 依하면, 高校쿠 天皇 元年(642年) 7月 가뭄이 繼續되자 에미市는 百濟大使 에 菩薩像과 四天王像에 祭를 올리고 비를 빌었는데, 다음날 조금 내렸지만 그 다음날에는 내리지 않았다. 8月 高校쿠 天皇이 爛腐치 江邊에서 四方을 拜禮하며 비를 빌었더니 금세 雷雨가 되어 5日間 繼續되었다고 傳한다. 이 때문에 百姓들은 高校쿠 天皇을 지덕천黃(至?天皇)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에 에미市는 家門意義 땅인 카츠라機 의 古宮에 조묘를 짓고 『 論語 』 팔일篇에서 禁하는 八日의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소街氏의 專橫의 한 例로 여겨지지만, 最近의 硏究에서는 八日의 춤이란 『論語』 속의 存在이며, 日本書紀에서 이 말이 使用되고 있는 것은 單純한 修飾이라고 할 수 있으며, 以上의 事件은 單純히 量이가 扶助의 땅에서 祖上을 모시는 祭祀를 지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記事에 不過하다고 指摘되고 있다. [1]

또한 위의 記事에 이어 에미市와 이루카가 自身들의 殊妙( 가시하라視 쇼否定 의 高調노미야가하라1·2號墳인가)를 造營하여 '陵(陵)'이라 부르게 하고, 온 나라의 百姓, 부곡(部曲), 그리고 尙宮王家의 임生父(壬生部)를 照映에 動員했다는 記錄이 마찬가지로 소街氏의 專橫의 한 例로 引用되지만, 最近의 硏究에 依하면 이 記事도 『 禮記 (禮記)』나 『 陳書 (晋書)』 等의 中國 書籍을 引用한다는 點에서 實際로는 專橫과 다르게 臣下로서의 立場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는 主張도 提示되고 있다. [1]

高校쿠 天皇 2年 10月 6日(643年 11月 22日), 에미市는 病을 理由로 非公式的으로 보라色 管을 이루카에게 하사하여 代身(오호마 헤쓰키미)으로 하고, 次男을 물部 代身으로 삼아 國政을 掌握하기 始作했다. 高校쿠 天皇 3年(644年)에는, 에미市와 이루카가 아마가視 언덕에 邸宅을 나란히 세워, 이를 '윗宮門' 等으로 稱하고 이루카의 아이를 王子라고 부르게 하는 等 專橫의 한 例로 提示된다. [1]

尙宮王家의 滅族 [ 編輯 ]

고쿄쿠 天皇 2年 11月 1日(643年 12月 16日), 소街氏의 피를 이어받은 候樓히吐노오에 皇子 를 고쿄쿠 天皇의 次期 天皇으로 擁立하기를 願했던 離壘카는 코세노 토코打 等 長壽를 動員해 야마시로老오에왕이 살고 있는 이카壘假宮 (斑鳩宮)을 攻擊하게 했다. 이에 야마시로老오에王은 死因 數十 名을 거느리고 必死的으로 防禦하여 長壽 中 하나를 戰士시키지만, 버티지 못하고 이코馬山으로 逃亡쳤다. 側近인 美와 後尾野軍으로부터는 東쪽으로 도망쳐 再起할 것을 勸誘하였지만, 야마시로老오에王은 百姓에게 苦痛을 주지 않겠다며 提案을 拒絶했다. 야마시로老오에王은 이카루가지(斑鳩寺)로 돌아와 王子와 함께 自殺하였다. 이로써 쇼토쿠 太子의 피를 이어받은 尙宮 王家는 滅亡하였다. 이루카가 尙宮一族을 멸망시킨 것을 안 에미市는 恨歎하였다고 傳해진다.

當時의 王位繼承은 單純한 世襲制度가 아니라 皇族들로부터 天皇다운 人物이 選擇되었다. 그 基準은 人格 外에 나이, 代代로 天皇이나 諸侯와의 血緣關係가 있었다. 이는 天皇家의 權力이 絶對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러 豪族을 묶는 首長(長, おさ)이었기 때문이다.

소가노 이루카의 暗殺 [ 編輯 ]

前(傳) 소가노離壘카 머리墓. 2005年 撮影.

소街氏의 專橫은 많은 사람들의 不滿을 키워왔고, 代代로 神官을 맡아온 一族의 一員이던 나카토미櫓 카마타리 는 小가씨 打倒 計劃을 稠密하게 進行시켰다. 카마타리는 먼저 高校쿠 天皇의 동생인 카루 皇子 에게 接近하지만 그 技倆에 失望하여 政變의 中心에 설 수 있는 다른 人物을 摸索했다.

好코지(法興寺)에서 打毬(打毬)를 할 때 나카노오에 皇子 의 신발이 벗겨진 것을 주워준 것을 契機로 카마타리는 나카노오에 皇子에게 接近하였다. 나카노오에 皇子와 카마타리는 遣隋使 였던 미나部치노 쇼안 (南淵請安)의 밑에서 함께 배웠는데, 이 때 소가 氏族을 打倒할 計劃을 세웠다고 傳해진다. 카마타리는 더욱이 이루카의 四寸이자 一族의 長老인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 (蘇我倉山田石川麻呂)를 끌어들여, 그 딸인 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蘇我 遠智娘)를 나카노오에 皇子의 妃로 삼았다. 소가노 에미市의 代身(誤胡馬헤츠키미) 職位를 아들인 소가노 이루카가 承繼한 것에 對해 小가氏族 內의 不滿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울러, 소街氏族의 피를 이어받은 候樓히吐노오에 皇子 (古人大兄 皇子)에 對한 異腹同生인 나카노오에 皇子의 政變이라고 보는 分析도 있다. [1]

高校쿠 天皇 4年(645年) 삼한( 高句麗 , 百濟 , 新羅 )으로부터 獅子가 日本을 訪問하였다. 《日本書紀》에 依하면 이들은 朝貢을 바치는 意識을 朝廷에서 치루었는데, 이 때 소家奴 이루카도 參席하였다. 나카노오에 皇子와 카마타리는 이 때 소家奴 이루카를 暗殺하기로 決定하였다.(《등씨가전》(藤氏家傳) 〈大職家電〉(大織冠傳)은 使臣의 訪問이 이루카를 꾀어내기 위해 지어낸 일이었다고 傳한다.)

6月 12日(7月 10日) 三國의 弔意 意識이 擧行되어 高校쿠 天皇이 對極戰(大極殿)에 나아갈 때 나카노오에 皇子는 그 곁을 지켰다. 이 때 이루카도 入朝하였다. 離壘카는 疑心이 많아 밤낮으로 劍을 놓지 않았는데, 이 때에는 광대를 시켜 이루카로 하여금 劍을 놓게 하도록 하였다. 이미 회유당한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삼한이 보낸 表文을 읽자, 나카노惡에는 慰問部로 하여금 12곳의 門을 모두 닫고 사람이 往來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 나카노惡에는 慰問部를 모아 祿俸을 하사하는 것으로 꾸미고서 窓을 잡고 對極展 옆에 埋伏했는데, 카마타리 等은 활과 화살을 가지고 護衛하였다. 宮廷 護衛의 一員인 亞麻盧 이누카이노 무라지 카츠마로(海犬養連勝麻呂)은 칼 두 자루가 들어 있는 箱子를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 (佐伯連 子麻呂),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阿彌陀 (葛城稚犬養連 網田)에게 건네주며 "힘써 努力하여 재빨리 목을 쳐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에키노 코마로는 오토某氏 의 同族으로 代代로 調整의 武官을 맡은 氏族이다. 와카이누카李氏(稚犬養氏)는 朝廷의 개 等을 飼育하던 氏族인데 이름에 카츠라機 가 들어있으므로 本來는 소街氏의 影響下에 있는 集團 所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둘 모두 後의 宮城12門(宮城十二門)의 守門將에 該當하는 氏族으로, 12個의 宮門을 團束하는 데 協助한 것으로 여겨진다. [1]

이들 코마로와 阿彌陀는 이루카를 베는 役割을 맡은 이들로, 大使를 앞에 두고 恐怖에 질린 나머지 밥에 물을 부어 삼키지만 금세 吐해내고 말았다.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表文을 거의 다 읽어나가던 때에도 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計劃이 들통나지도 모르겠다는 恐怖에 질린 이시카와마로가 온몸이 땀으로 범벅돼 목소리가 흐트러지고 손이 떨리기 始作하자, 미심쩍어하던 이루카가 "왜 떨리느냐"고 물었다. 이시카와馬로는 "天皇의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敬畏스러운 탓에 땀이 납니다"라고 對答했다.

나카노오에 皇子는 코마로와 阿彌陀가 이루카의 威勢를 두려워하여 나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判斷하고 叱責한 뒤 스스로 앞으로 나섰다. 이 때의 記錄을 《日本書紀》는 다음과 같이 傳한다. [2]

中大兄 見子麻呂等 畏入鹿威 便旋不進 曰 “?嗟!” 卽 共子麻呂等 出其不意 以劒傷割入鹿頭·肩. 入鹿驚起. 子麻呂 運手揮劒 傷其一脚. 入鹿轉就御座 叩頭 曰 “當居嗣位 天之子也. 臣不知罪 乞垂審察!”. 天皇大驚 詔中大兄 曰 “不知所作 有何事耶?”. 中大兄 伏地 奏曰 “鞍作盡滅天宗 將傾日位 豈以天孫代鞍作乎?”.蘇我臣入鹿 更名鞍作.天皇 卽起入於殿中. 佐伯連子麻呂·稚犬養連網田 斬入鹿臣. 是日 雨下?水溢庭 以席障子 覆鞍作屍. 古人大兄 見走入私宮 謂於人 曰 “韓人殺鞍作臣!謂因韓政而誅.吾心痛矣!” 卽入臥內 杜門不出.

나카노오에(中大兄)는 코마로(子麻呂) 等이 離壘카(入鹿)를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꾸짖고서는 곧 코마로等과 함께 칼로 李루카의 머리와 어깨를 베어 傷處를 입히니 이루카가 놀라 일어났다. 코마로가 칼을 휘둘러 李루카의 한 쪽 다리를 베어냈다. 이루카가 굴러 天皇이 앉아있던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天皇의 자리에 있게 되는 분은 하늘의 子息입니다. 저는 罪를 알지 못하니 살펴서 밝혀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天皇이 크게 놀라 나카노오에에게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나카노惡에는 땅에 엎드려 “쿠라츠쿠리__301 皇族을 모두 없애고 張差 天子의 자리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어찌 하늘의 子孫을 쿠라츠쿠리가 代身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쿠라츠쿠리는 소가노이루카의 또 다른 이름이다). 天皇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宮殿으로 들어갔다. 사에키노스쿠네 코마로와 와카이누카이勞務라지 阿彌陀(稚犬養連網田)가 이루카의 목을 베었다. 이 날 비가 내려 물이 뜰에까지 넘쳤으므로 거적으로 쿠라츠쿠리__301 屍體를 덮었다. 候樓히吐老오오에(古人大兄)는 이를 보고 自己의 宮으로 달려 들어가 사람들에게 “韓人이 쿠라츠쿠리 代身을 죽였다(한인의 政治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내 마음이 아프다”하고는 寢室에 들어가 門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 『日本書紀』 「皇極機(皇極紀)」 乙巳年(645年), 6月 12日 무신

結果 [ 編輯 ]

소街氏의 滅亡과 다이카 改新 [ 編輯 ]

나카노오에 皇子는 卽時 好코紙로 들어가 이루카를 죽인 것을 알리고서 戰爭을 準備했고, 여러 皇子나 豪族들이 그를 따랐다. 아스카利他부키노미야(飛鳥板蓋宮)李 아닌 好코紙로 向한 것은 當時 氏家族의 査察에 담이 있어 戰爭을 遂行하는 城砦로 더 적합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루카의 屍身을 소街氏族의 집에 있던 에미詩에게 보냈다. 에미市는 中國으로부터의 歸化人인 아야노 아타이(漢直) 等을 召集해 陣을 치도록 했다. 나카노오에 皇子는 코세노 토코打 (巨勢 德多)를 소街氏의 집으로 보내 自身이 이루카를 죽인 까닭을 傳하고 이들을 懷柔했다. 이 때 候樓히吐老오오에 皇子가 杜門不出한다는 말을 傳해 소街氏의 抵抗 意志를 꺾었다고도 한다. 小가씨 陣營에 있던 打카무코노 오미 쿠니吳視(高向臣 國押)도 이들을 說得해 結局 소價의 部下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쿠니吳市는 小가씨 同族氏族 中에서도 有力한 氏族으로, 에미市와 같은 世代의 人物이다. [1]

다음날인 6月 13日(7月 11日), 에미市는 집에 불을 질러 《天皇期》, 《國紀》, 그 밖의 各種 寶物과 함께 불속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 때의 記錄物 中 《國紀》는 後네老朽히吐 에사카(船史 惠尺)가 불 속에서 주워 保存한 끝에 나카노오에 皇子에게 傳해졌다. 이렇게 오랜 歲月 威勢를 떨치던 소街氏族은 滅亡하였다. [1]

다음날인 6月 14日(7月 12日), 高校쿠 天皇은 男동생인 카루 皇子(輕 皇子)에게 讓位하니 그가 고토쿠 天皇 이다. 나카카노오에 皇子는 皇太子에 封해졌다. 나카노惡에는 아베盧 禹치마로(阿倍 內麻呂)를 左大臣(左大臣), 이시카와마로를 右大臣(右大臣), 카마타里를 內申(內臣)에 任命하고 後에 " 다이카 改新 "이라고 불리는 改革을 斷行한다.

各州 [ 編輯 ]

  1. 後漢末の董卓は、皇帝であった 劉弁 (少帝)を?し、その弟の 劉協 (?帝)を?位させ、朝政を牛耳ったとされ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