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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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열 (柳在烈, 1949年 2月 1日 , [1] ~)은 事業家이며 全 宗敎人이다.

生涯 [ 編輯 ]

1966年 當時 18歲였던 유재열은 "互生祈禱院 [2] 에 다녔다." [3] 魚鱗種라고 불린 그는 全國的으로 布敎活動을 하였다. 1975年 그는 聖徒들과 함께 청계산 中턱에 延建坪 8百餘坪의 聖殿을 지었다. [4] 以後 유재열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美國 移民을 떠났다. 現在 그는 宗敎와는 상관없는 事業에 專念하고 있다.

各州 [ 編輯 ]

  1. 탁명환, 《基督敎 異端 硏究》 p. 379 [1] Archived 2014年 5月 3日 - 웨이백 머신
  2. 好生祈禱院은 一千九百六十社 年 金龍基가 創始한 宗敎로서 金龍基 一千九百二十五 年 江原道 麟蹄에서 出生해 二十三 세 警察에 投身해 韓國戰爭을 거치는 동안 全 家族을 잃는 苦痛을 겪고 크게 衝擊받고서 十餘 年間 精神異常과 合倂症으로 苦生하다가 三十九 歲 때 野小에게 啓示받고 麟蹄에 있는 敎會에 入校해 三 日 만에 疾病이 낫는 體驗했다. 四十 세 서울 상도동 사자암에서의 첫 集會 後 信徒가 漸增瑕疵 啓示 때문에 好生祈禱院을 造成했다. 自身의 治病 體驗을 信徒에게 善戰하고 按手·按察·方言으로 患者들의 治病하여 한때 神도 五百餘 名이었다. 一千九百六十五 年 果川 청계산 자락으로 信徒 五十餘 明과 移住했다가 一千九百六十陸 年 忠北 中原郡 산척면 석천리로 함께 移住한 信徒들과 集團으로 生活하다가 消滅했다. 信徒들은 敎主 金龍基를 主님이나 아버님이라고 불렀고 末世 審判이 只今 일어나고 地上 天國이 建設되고 말세 避難處가 好生祈禱院이라고 確信했다. 經典은 基督敎 《聖經》을 그대로 使用했다.
  3. “서울六百年社: 帳幕聖殿(이삭敎會)” . 2014年 5月 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6月 14日에 確認함 .  
  4. 東亞日報, 新興宗敎團體, 1975年 4月 3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