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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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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분자 (劉盆子, 11年 ~ ?)는 中國 新나라 後漢 初期의 人物로, 傳한 성양경王 의 子孫으로서 적美軍 에게 꼭두각시 皇帝로 옹립되었다. 태산군 式縣(式縣) 사람이다.

生涯 [ 編輯 ]

成樣康王 柔順 의 曾孫이자 式節候 유헌 의 孫子로, 전한이 亡하고 新나라 에서 前漢의 王后들을 廢하면서 아버지 流氓 도 爵位를 잃어 一家가 그냥 式縣 사람이 됐다. 그러다가 적美軍 이 일어나 式玄을 지나가면서 두 兄 有功 ·有無와 함께 사로잡혀 끌려다녔다. 맏兄 유공은 相서 를 익혀 적美軍의 指導者 番숭 과 함께 輕視第 에게 服屬해 아버지의 作位인 食後를 回復했고 侍中이 되어 長安에 남았으나, 유분자는 둘째兄 有無와 함께 적미群衆에 남아 소에게 꼴을 먹이는 牧童이 됐다.

갱視 3年(25年), 輕視制와 對立한 적美軍이 輕視第 君을 各地에서 무찌르고 和音 땅에 이르렀는데, 群衆에 있던 제나라 出身 무당 이 성양경王에게 福을 빌던 中 神이 내려와 미쳐서 天子를 세우라고 부르짖고는 病이 들었다. 警時祭에게 兄 방망(方望)을 잃은 彷徉(方陽)은 番숭에게 輕視制를 代身하는 새 天子를 세우도록 勸했다. 무당의 말과 祭場들의 意見이 一致해 적美軍은 새 皇帝를 세우기로 하고 群衆에서 성양경王의 後孫 70餘 名을 찾았는데, 그 中에서 有無·유분자 兄弟, 그리고 전 西安後(西安侯) 有效(劉孝) [1] 가 가장 가까웠다. 나이 順으로 제비를 뽑으니 유분자가 第一 어렸는데, 皇帝로 뽑히고 모든 將帥들이 그 앞에 엎드려 臣下로 일컬었다. 當時 15歲에 不過한 데다 옷도 해지고 맨발로 다니는 處地였는데, 무리가 自身에게 엎드린 것을 보고 두려워 皇帝가 되지 않으려 했다. 유공이 제비를 잘 간직하라고 하자, 제비를 물어 끊어 버렸다. 結局은 어쩔 수 없이 皇帝가 됐지만, 牧童으로 繼續 살았다. 理解 6月, 卽位하여 年號를 件歲 로 定했다.

적美軍이 輕視制의 將軍 腸앙(張?) 等과 內通해 長安城에 들어가니, 輕視制는 降伏하고 廢位됐다. 이에 長樂宮에 살았지만, 祭場들은 서로 功을 내세우며 떠들고 다투니 結論이 나지 않았다. 적美軍은 百姓들을 掠奪하기에 餘念이 없었다. 臘日이 되자 番숭 等이 大會를 열어 停電에 와서 앉았는데, 宴會 자리가 全혀 整頓되지 않아 大司農 凉陰(楊音)李 칼을 끼고 亂場판이 된 자리를 놓고 꾸짖었으나, 술과 고기를 두고 칼부림을 벌이다가 서로 죽고 다치는 者들이 있었고, 위위 第갈치(諸葛穉)가 百餘 名을 죽여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이런 混亂한 宴會를 보고 恐慌에 빠져 하루終日 울기만 했다. 輕視제가 敗亡한 後 液晶(掖庭)의 宮女 數 百千 名이 監禁돼 굶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감천弓(甘泉宮)의 樂士들이 유분자를 보고 叩頭하고 飢餓에 빠졌다고 呼訴했고, 유분자가 쌀을 내어주어 이들은 굶어죽지 않게 됐다.

유공은 적美軍이 將次 亡할 것이라 보고 自身들에게 火가 連累되지 않기 위해 동생에게 와서 帝位를 내놓을 節次를 알려주고, 巾舞 2年 正月 初하루에 열린 大會에서 유분자를 廢할 것을 常住했다. 그러나 番숭 等이 頑固하게 反對해 結局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스스로 引受를 풀고 叩頭하고 울고 歎息하면서 帝位를 辭讓했다. 番숭 等 數百 名은 이를 두고 슬퍼하고 가련히 여겨 조아려 謝罪하고 引受를 다시 채워 주니, 不得已하여 繼續 帝位에 있었다. 적美軍은 그間의 輕擧妄動을 삼가고 各自 映彩를 닫고 지키니, 三寶가 조용해져 사람들이 天子를 총명하다 하고, 百姓들은 앞다투어 長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0餘 日이 지나니 적美軍은 다시 掠奪을 始作했고, 城中에 糧食이 떨어지고 寶物도 이미 다 掠奪해버렸기에 宮室들을 불태우고 西쪽으로 갔다. 유분자는 王거를 타고 數百 氣가 따랐다. 적美軍은 輕視將軍 엄춘(嚴春)을 美(?)에서 擊破해 죽였다. 드디어 안정군 北地群 까지 進擊했으나, 큰 눈이 내려 골짜기를 메워버리니 많이 얼어죽었다. 나머지는 돌아오는 길에 陵을 掠奪하고 呂后 의 屍體를 辱보였다. 後漢 光武帝 (光武帝) 有數(劉秀)의 大使도 등우 가 長安에 와서 욱이玄을 쳤으나 적美軍에게 擊破됐다. 9月, 적美軍은 長安으로 들어왔다.

當時 韓中王 油價를 無挑軍으로 내쫓고 務安王(武安王)을 自稱해 韓中群 에서 獨立 勢力을 形成하고 있던 淵潛 이 山管을 나와 두릉縣에 駐屯하자(실은 油價에게 얼마 前 져서 두릉縣에 물러나 있던 狀態였음) 적美軍의 將帥 方案(?安)李 10餘 萬 軍을 거느리고 擊破했다. 등우가 方案이 精兵을 거느리고 나간 틈을 타 軟弱한 유분자를 노려 攻擊했으나 적美軍의 將帥 史錄(謝祿)李 救援을 오니 長安城 內의 高架(?街)에서 등우를 무찔렀다. 年잠이 이番에는 輕視將軍 이보(李寶)와 合해서 또 두릉을 쳤으나 또 方案에게 擊破됐고 이보는 方案에게 降伏했다. 그러나 이보가 淵潛에게 隱密히 書信을 보내 內通해, 年잠이 方案을 挑發하고 房안이 眞彩를 비운 사이 二報가 房안의 眞彩를 掌握했다. 房안은 敗走했고 十餘 萬 名이 죽었다. 삼보는 荒廢해져서 사람을 잡아먹을 地境이라 더 糧食을 求할 수 없었다. 12月, 아직 20餘 萬 名이 남아 있는 敵美軍은 東쪽으로 돌아갈 것을 決定했다.

그러나 西쪽의 두 길을 光武帝의 手下들이 掌握하고 있었다. 派間將軍 後進(侯進) 等은 新案에 駐屯하고, 件偉大將軍 輕減 等은 衣樣에 駐屯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敵美軍이 나오면 그쪽으로 合流하기로 約束했다. 이듬해 正月, 등우가 河北에서 와서 또 적미를 號(湖)에서 쳤고 또 敗走했다. 적美軍이 마침내 關門을 나섰으나, 光武帝의 程頥大將軍 風이 에게 孝저에서 격파당했다. 이를 들은 光武帝는 衣樣으로 와서 맞아 싸우게 했다. 大軍을 忽然히 만난 적美軍은 光武帝에게 投降하기로 했고, 유분자는 丞相 鼠銑(徐宣) 以下 30餘 名과 함께 웃옷을 벗어(육단) 降伏하고 全國玉璽와 輕視提議 7隻 寶劍과 獄壁을 건네주었다. 光武帝는 유분자를 가련히 여겨 賞을 厚하게 주었고 叔父 竈王 流量의 郎中으로 삼았다. 나중에 病으로 失明 瑕疵 衡陽 (滎陽)의 均輸官의 땅을 주어 終身토록 그 세로 먹고 살게 했다.

出戰 [ 編輯 ]

범엽: 《後漢書》 卷11 幽玄유분자熱前提1 中 유분자 中國語 위키文獻 에 이 글과 關聯된 原文이 있습니다. 後漢書 卷11 幽玄유분자熱前提1

各州 [ 編輯 ]

  1. 漢書 王子後表에 따르면 西安後 一家는 동평四王 의 後孫이며, 有限 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封해졌다. 有效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