禹 칭위안
吳 ?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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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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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年 6月 12日
(
1914-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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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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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民國(現
中華人民共和國
)
푸젠성
푸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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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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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年 11月 30日
(
2014-11-30
)
(100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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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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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가나가와縣
誤다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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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청원
(
吳?源
,
고 세이겐
(구레 기요하라),
禹 칭위안
,
1914年
6月 12日
~
2014年
11月 30日
)은
中國
푸젠성
出身으로
日本
에서 活動한
바둑 棋士
이자 日本을 代表하는
국수
다. 本名은
五千
(吳泉,
禹 醉眼
, 구레 이즈미)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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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留學 前인, 中國 時節 ‘少年 五千(吳泉)’의 스승은 固守餘(顧水如), 固守여는 北京 어느 起源에서 偶然히 少年 오천의 바둑을 구경하게 되고, 少年의 재주에 反해 한판 試驗器를 둔 後 弟子로 삼았으며, 以後 自己집으로 出退勤시키며 少年을 가르쳤다. 하루는 오천의 어머니가 少年과 같이 와서는 少年의 이름을 지어 주십사 要請했다. 그날은 마침 高先生의 兄인 淵如(연여)가 함께 있었는데, 연여가 “샘물은 맑지(泉水是
淸
的)."라고 말했다. 이어 高先生이 말하기를, “샘물은 아득한 곳에서 솟아 멀리까지 흐르지(泉水是
源
遠流長的).”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五千은 吳淸源(오청원)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생겼고 以後 이 이름으로 有名해지게 된다.
그는 바둑을 좋아하는 父親의 影響으로 7살 때부터 바둑을 배웠다. 1928年 어머니, 兄과 함께 日本으로 移住,
世故에 겐사쿠
의 門下에 들어갔다.
1934年 라이벌
기타니 미노루
와 共同으로 '危機(圍棋)의 革命 新布石法'을 發表, 1939~1941年 기타니 미노루와의 治水 고치기 十番棋에서 勝利해 바둑界의 1人者의 자리에 올랐다.
그 後 다른 日本 頂上級 바둑 騎士들과의 십번기에서도 勝利해 約 20年동안 1人者의 자리를 지켰다. 1983年 隱退하였고 門下에
린하이펑
,
루이나이웨이
를 뒀다.
國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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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科 이름은 여러 番 바뀌었다. 1936年 日本 國籍으로 바꾸고 이름을
구레 이즈미
(吳泉)로 바꿨다가 1940年 이름을 고 세이겐(吳 ?源)으로 다시 바꿨다. 1946年에는 國籍을 다시 中華民國으로 바꿨다. 1979年에는 다시 日本 國籍을 取得했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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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청원은 1930~1950年代 日本 頂上級 바둑棋士들과의 置數고치기 10番棋에서 모조리 相對의 치數를 고쳤다. 置數고치기 10番期는 日本
에도 時代
에 始作된 바둑界의 '끝장對決'이다. 바둑을 10番 둬서 4板 差異가 나면 治水(氣力의 程度에 따라 누가 먼저 둘 것인가를 定하는 基準)를 고친다.
- 바둑을 둘 때,
重用
(中庸) 33張에 나오는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 君子의 도는 어두워 보이나 날로 빛난다)'이라는 글句를 적어 넣은 揮毫 부채를 들고 大國에 臨했다.
- '살아 있는 旣成(棋聖)' 또는 '20世紀의 旣成'이자 '現代바둑의 傳說(아버지)'로 불린다.
- 中國
푸젠성
푸저우
에는 '오청원 바둑會館'이 있다.
- "바둑은 弔花(調和)", "
妙手
를 세 番 내면 진다"라는 名言을 남김으로써 變則보다는 '原則과 定石'의 重要性을 强調하였다.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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