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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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빈 (吳世彬, 1952年 ~ )은 大韓民國 의 法曹人이다. 大田高等法院 長과 서울高等法院 章 等을 歷任하고 獨逸 괴팅겐臺에서 競爭法을 硏究하여 法院 內部의 企業法 커뮤니티를 이끌었다. 本貫은 海州 이며, 忠淸南道 洪城郡 出身이다.

生涯 [ 編輯 ]

오세빈은 大田高等學校 , 서울大學校 法學科를 卒業하고 1973年 第15回 司法試驗 合格하여 司法硏修院 5基를 마치고 光州地方法院 判事에 任用되었다. 1975年 光州地方法院 判事 1982年 서울民事地方法院 判事를 거쳐 1998年 大田高等法院 首席 部長判事가 되었으며 1999年 서울高等法院 部長判事를 지냈다. 2005年에 大田地方法院張에 任命되면서 司法硏修院 敎授와 大淸法學硏究會 韓國競爭法學會 理事를 지내기도 했으며 2005年 11月 서울東部地方法院長 2006年 8月 大田高等法院長을 마치고 2008年 2月 서울高等法院長을 歷任하면서 2008年부터 中央選擧管理委員會 委員에 任命되어 2009年까지 任期를 마쳤다. 中央選擧管理委員을 끝으로 公職에서 물러나 法務法人 同人 辯護士를 하면서 2011年 3月부터 現代自動車 社外理事와 監事委員을 繼續하고 있으며 2011年 4月에는 私學紛爭調停委員會 委員長, 2015年 6月에는 第3期 市民司法委員會 委員長에 任命되었다.

抗訴審 裁判長으로 在職할 때 被告人이었던 서울 ㅇ고 前 校監 金某氏와 辯護士 李某氏로부터 “核心的인 證據의 造作 可能性이 높은 狀況에서 檢證없이 證據 能力을 認定해 공정한 裁判을 받을 權利를 侵害했다”며 10원을 賠償하라는 訴訟을 當했지만 [1] 서울중앙지법은 "訴訟指揮權 不法行事 證據없다"는 理由로 原告敗訴 判決했다. [2]

2007年 1月 眞實과 和解를 위한 過去史 整理委員會가 公開한 緊急措置 違反 事件 裁判에 오세빈을 包含시키자 "當時 3年 次에 不過해 判決에 影響을 줄 位置에 있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3]

2007年 10月 26日 作故한 自身의 父親(享年 86歲)을 그리워하는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題目의 글을 法院 內部 通信網에 올려 "어릴 적 아버지는 나의 親舊이자 課外先生이셨다"는 內容의 思父曲을 揭示하였다. [4]

大田高等法院長으로 在職할 때 "親切하고 能率的인 法院上을 具現함과 同時에 市民과 함께하는 法院의 이미지를 確固히 하기 위해 努力한 結果 全國의 國民滿足度 調査에서 大田高等法院 管內 法院이 上位에 랭크될 수 있었습니다."고 했고 實際로 2007年에 大田高等法院 담牆을 허물어 市民 公園으로 만들었다. [5]

2009年 1月 28日 서울高等法院長을 끝으로 35年間의 法官 生活을 마치면서 서울高等法院 職員들에게 '判事의 그 始作과 끝'이라는 題目의 이메일을 보내면서 1975年 光州地方法院 初任判事 當時 "弱하고 여린 마음에 長髮 被疑者들에게는 科料를 宣告하고 事情이 딱한 刑事犯의 境遇에는 令狀을 棄却해 指摘을 받기도 했다"고 하면서 1972年 維新憲法 體制 以後 "刑事合意 裁判을 하면서 緊急措置, 維新反對를 외치는 被告人들의 抗議를 받으며 우리 모두 물러나자는 部長님의 말씀에 默默히 따르기로 마음먹은 적도 있다"며 "特히 執匙法 違反으로 切親한 親舊와 동생이 내 法廷에 섰을 때 마음속 깊이 苦悶하며 괴로워했다"고 하면서 "法官 生活을 마무리하며 나 自身이 正直하고 정의로운 法官이었는지를 反省하겠다"고 했다. [6]

各州 [ 編輯 ]

  1. [1] [ 깨진 링크 ( [2] 過去 內容 찾기])]
  2. [3]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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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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