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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戱高地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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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戱高地 는 서대문구 연희제1 · 2洞에 있는 山으로 演戱104高地 · 104高地 · 演戱山 · 鹽酸이라고도 한다. 演戱高地 戰鬪는 1950年 9月 21日 16時 15分에 美 第5海兵連帶에 내려온 攻擊 命令으로 始作되어 이틀 後인 9月 23日에 끝났다. 이 戰鬪의 主要 參加者는 美 海兵隊와 大韓民國 海兵隊 이고, 美國의 第5海兵聯隊長 머레이 中領이 聯隊長을 맡았다.

첫날 머리 中領은 韓國의 海兵 第 1大隊에게 北쪽에 位置한 105高地를 占領하기 위해 演戱稜線을 奪取하라는 命令을 내리게 된다. 104高地 兩쪽으로 1中隊와 2中隊가 突擊했고 이들이 開豁地에 到達하자마자 敵의 奇襲射擊으로 因해 발이 묶였다. 이를 打開하기 위해 砲兵 및 航空機가 支援되었고 이렇게 해도 狀況이 좋아지지 않자 戰車部隊와 함께 104高地 近處의 鐵路를 따라 進軍하게 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敵의 集中砲火로 막혔고 結局 이날 戰死者 11名과 負傷者 45名을 낸다. 이때 敵의 兵力은 約 40%의 損失을 입었다.

그 다음날인 23日 海兵 第 1大隊는 火力을 집중시키기 위해 3個 中隊를 竝進시키며 敵의 陣營으로 正面 突破했다. 이 過程에서 敵의 거센 反撥에 신양수 所謂, 김한수 中尉 等이 負傷을 입었다. 이에 海兵隊 司令官 申鉉濬 大領은 約 62名의 兵力을 1大隊에 支援한다. 이러한 일들이 繼續 되던 中 中隊長의 命令을 받고 개川을 넘어 躍進하여 狀況을 打開할 수 있는 機會가 왔으나 그동안의 戰鬪를 통해 各 中隊 모두 戰術的 小隊 運營은 事實上 어려웠고 이날은 大隊와 各 中隊가 모두 全혀 豫備隊를 運用하지 못했기 때문에 適切한 時期에 온 機會를 잡을 수 없었다. 이틀째의 攻擊에서도 海兵 第 1大隊는 戰死 32名, 戰傷 68名, 失踪 1名이라는 엄청난 損失을 보았으며 22日과 23日 2日間의 戰鬪에서 거의 모든 分隊長들을 잃었다. 最後의 戰鬪가 終了된 以後 我軍 戰死者는 178名, 人民軍 死亡者는 1,750名이었고 海兵 1大隊의 남은 兵力은 26名에 不過했다.

戰鬪의 意義 [ 編輯 ]

演戱高地 戰鬪는 海兵隊가 熾烈한 白兵戰 끝에 敵을 擊退하고 이 104高地를 占領함으로써 서울 奪還의 발板을 마련한 戰鬪이다. 이 戰鬪에 勝利함으로써 韓國 戰爭 最大의 轉換點이 된 仁川 上陸 作戰 이 成功할 수 있는 與件이 形成되었다. 이 戰鬪의 前後로는 仁川 上陸 作戰과 9.28 서울 收復 이 있었고 演戱高地 戰鬪는 이 두 事件을 이어주는 礎石을 마련한 重要한 戰鬪였다. 仁川 上陸作戰 成功 以後 始興, 安養, 水原을 次例로 占領하고 北쪽으로 올라가면서 人民軍 最後의 堡壘였던 演戱高地에 到達하게 되었는데 이를 占領하는 것이 서울 收復의 最大 關鍵이었다.

戰鬪의 記念 [ 編輯 ]

이 戰鬪는 不屈의 海兵隊 精神을 알려주는 戰鬪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海兵隊는 每年 9月 서울 收復을 祝賀하는 行事를 연다.

이를 기리기 위해 海兵隊 司令部에선 1982年 9月 28日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산100-1에 面積 200坪, 基壇높이 0.5m, 비높이 7.8m의 戰鬪 戰績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