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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뱅베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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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뱅베니스트 ( 프랑스語 : Emile Benveniste , 1902年 5月 27日 1976年 10月 3日 )는 프랑스 言語學者 인도유럽어 比較言語學, 一般言語理論, 言語人類學을 主로 硏究했다. 18卷의 著書와 291篇의 論文, 300篇 以上의 書評을 남겼다.

生涯 [ 編輯 ]

뱅베니스트는 오스만 帝國 알레포 스파라드 유대人 家庭에서 태어났다. 그의 父母는 世界 유대 同盟 (UIA) 所屬 敎師였으며, 랍비 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UIA의 支援으로 파리 의 건너가 現地의 유대 學校에서 宗敎學을 工夫했다. 그러나 學校를 卒業한 後 파리 大學校 로 進學하면서 宗敎學을 抛棄하고 文學을 工夫했다. 以後 그를 눈여겨 본 실뱅 레비 의 推薦으로 言語學者이자 言語學者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의 弟子인 앙투안 메이예 의 弟子가 되었다. 그는 스승 메이예의 勸誘로 페르시아語 硏究를 하면서 言語學에 발을 들여놓았다. 工夫 途中에 1925年에 프랑스 外人部隊 에 入隊하였으며, 모로코 에 配置되어 리프 戰爭 에 參戰했다. 1927年에 轉役 後 프랑스 國籍을 取得했다.

같은 해에 高等硏究實習원 에서 敎鞭을 잡았으며, 1935年에 파리 大學校에서 《인도유럽어 名士 形成法의 起源》(Origines de la Formation des Noms indo-europeens)이라는 論文으로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37年에 콜레주 드 프랑스 의 敎授, 校內의 一般言語學-比較文法 硏究 委員會의 委員長을 지냈다. 以後에도 파리 大學校에서 敎鞭을 잡으면서 1959年에는 폴란드 科學 아카데미 會員으로, 1960年에는 金石文 및 文學 아카데미 會員으로 選出되었다. 以後 1969年 腦卒中 에 걸려 敎授職을 辭任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學術 活動에 復歸하였고, 國際 記號學 協會 初代 會長으로 選出되어 1972年까지 歷任했다.

1976年 파리에서 74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다.

業績 [ 編輯 ]

그는 古代 페르시아語, 오세트語 , 소그드어 , 아베스타語 , 아르메니아語 等의 言語를 硏究했다. 여기에서 出發해 그는 本格的으로 印度유럽어 比較文法을 硏究했다. 1948年에 發表한 《인도유럽어의 行爲者 名詞와 行爲 名士》(Noms d'agent et noms d'action en indo-europeen)는 20世紀 印度유럽어 比較文法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著述로 評價받고 있다.

印度유럽어 比較文法의 硏究가 進陟되고 다양한 言語 事實을 接觸하면서 그의 關心은 一般言語理論으로 기울어진다. 言語가 社會的 事實이라는 點에 着眼해, 言語記號의 象徵性과 文化, 社會의 意味論 問題에 關心을 가지고 이러한 觀點에서 言語 硏究를 試圖한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그는 印度유럽어의 制度 語彙의 形成과 組織을 《인도유럽어 制度 語彙 1: 經濟, 親族關係, 社會》(Le vocabulaire des institutions indo-europeens, 1: Economie, parente, societe), 《인도유럽어 制度 語彙 2: 權力, 法, 宗敎》(Le vocabulaire des institutions indo-europeens, 2: pouvoir, droit, religion)(1969)에서 論議했다. 이 著書는 比較文法에 있어서 그 價値를 아직 잘 評價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著書日 뿐만 아니라, 言語 硏究를 통하여 古代 印度 유럽 社會의 制度와 그 構造를 再現하려는 그의 깊은 人類學的 關心을 엿볼 수 있다.

본 文書에는 知識乙만드는지식 에서 CC-BY-SA 3.0 으로 配布한 冊 紹介글 中 "一般言語學의 여러 問題 2 Problemes de linguistique generale 2(千줄읽기)" 의 紹介글을 基礎로 作成된 內容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