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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平 보리사地 대경대社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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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平 보리사地 대경대社塔碑
(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Stele for Buddhist Monk Daegyeong from Borisa Temple Site, Yangpyeong)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寶物
種目 寶物 第361號
( 1963年 1月 21日 指定)
時代 高麗 太祖 22年(939年)
參考 全體높이 : 350m, 碑身높이 : 176m, 碑身너비 : 0.89m, 碑身두께 : 0.24m,
材料 : 石造(碑身 - 沙巖, 鬼斧 - 花崗巖)
住所 서울特別市 龍山區 용산동6街 168-6
國立中央博物館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楊平 보리사地 대경대社塔碑 (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는 新羅 末에서 高麗 初에 活躍한 僧侶인 대경대社(大鏡大師) 여엄 (麗嚴 : 862∼930)의 行跡을 記錄한 塔碑이다. 高麗 太祖 22年( 939年 )에 세워졌다. 本來는 京畿道 楊平郡 용문면 연수리 보리社(菩提寺) 터에 서 있었는데 1914年에 景福宮으로 옮겨졌다가 現在는 國立中央博物館에 있다. 1963年 1月 21日 大韓民國의 寶物 第361號로 指定되었다.

塔碑 모습 [ 編輯 ]

높이가 3.5미터인 이 塔碑는, 거북받침돌은 구슬을 물고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는 머리 모습을 하고 있고, 거북등 周圍에는 꼬아 놓은 실 模樣의 무늬가 띠를 두르듯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거북돌이 크기에 비하여 납작하며, 비의 갓인 머릿돌은 너무 크게 만들어져 서로 調和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머릿돌에 새겨진 구름과 龍의 무늬가 매우 힘차게 彫刻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거북받침돌은 花崗石, 非몸돌은 沙巖(砂岩)이며, 머릿돌의 제액(題額)은 磨滅되어 判讀할 수 없다. 末尾에 ‘天福四年歲次己亥’라 적혀 있어 太祖 22年(939)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塔碑文 內容 [ 編輯 ]

이 塔碑門의 內容은 대경대社의 行跡을 알려주는 貴重한 資料이다. 대경대社의 性(姓)은 金(金)이고, 忠南 南浦 (藍浦) 出身인데, 新羅 景文王 10年(870) 9歲 때 無量壽社(無量壽寺)로 出嫁하였다. 처음에는 主從(住宗) 法師에게서 華嚴(華嚴)을 工夫하고, 뒤에는 禪宗에 置重하여 성주사(聖住寺)의 無染(無染) 禪師에게 선(禪)을 배웠다. 그 後 唐나라로 가서 雲車 都膺(雲居道膺)으로부터 法을 배운 後 孝恭王 13年(909)에 歸國하여 敬順王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小白山에 隱居했는데, 高麗 太祖가 그를 맞이하여 法을 듣고 只今의 京畿道 楊平郡人 地平(砥平) 보리社(菩提寺)의 住持로 봉했다. 대경대社는 이곳에서 太祖 13年(930)에 入寂하였는데, 그 때의 나이는 69歲, 法臘은 60歲였다. 太祖는 對境(大鏡)이라는 諡號와 眩氣(玄機)라는 塔號를 내리는 한便, 최언위(崔彦?)에게 碑文의 글을 짓게 하고 이환추(李桓樞)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다. 939年에 이르러 대경대社의 弟子 최문尹(崔文尹)李 碑文을 새겨 碑가 세워졌으며, 太宗 25年(942)에 그의 門徒들의 이름이 非몸돌 뒷面에 새겨졌다. 이 陰氣에 依해서 그 門下에 융천(融闡)·欣淨(昕政)·蓮肉(連育)·聰慧(聰惠)·壯抄(莊礎)·正잠(定岑) 等 500餘 名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글씨 [ 編輯 ]

글씨는 幅 2.5센티미터 程度의 歐陽詢體(歐陽詢體)의 해서 로, 劃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살린 데서 오는 强靭함이 묻어나는데, 高麗 前期의 特徵이 잘 담겨 있는 部分이다.

寫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