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습착치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습착치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습착치 ( 中國語 正體字 : 習鑿齒 , 簡體字 : ??? , 병음 : Xi Zuoch? 시쭤치 [ * ] , ?~ 384年 10月 [1] )는 中國 東進 (東晉)의 歷史家이다. 언위 ( 中國語 : 彦威 , 병음 : Yanw?i 옌웨이 [ * ] )이며, 《 양양기 (襄陽記)》와 《 韓進春秋 (漢晉春秋)》의 著者로 有名하다.

生涯 [ 編輯 ]

襄陽(襄陽) 사람으로 豪族 家門에서 태어났다. 蜀漢 (蜀漢)을 섬겼던 濕情 (習禎)의 後孫이다. 젊은 時節 뜻을 가지고, 많이 배우고 學識(學識)을 가졌고, 文筆(文筆)으로 有名했다. 형주自社(荊州刺史) 환온 (桓?)이 그를 登用하여 從事로 삼았고, 降下上(江夏相) 원교 (袁喬)가 그의 能力을 認定하여 환온에게 推薦하여, 서조主婦(西曹主簿)에 任命되었고, 그 後, 別加(別駕)에 昇進했다.

환온이 出征할 때, 그를 代身하여 지키기로 臨하여 從軍하기도 하였고, 責任있게 맡길 수 있었던 자리를 모두 견디고, 要職을 맡았고 實績이 있었고, 論議에 뛰어나 환온度 그의 能力을 認定하여 厚待하였다. 그러나, 首都에 到着 했을 때에 會計王 社마욱(司馬昱, 後에 間問題 (簡文帝))도 그를 尊重하였고, 환온이 “上王(相王, 會計王)은 누구를 닮은 人物인가?”라고 습착치에게 물었는데, “아직도 그와 같은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對答하자, 환온은 火내었고 好調參軍(?曹?軍)으로 左遷되었고, 後에 兄양태수(滎陽太守)를 歷任했다.

환온이 그 當時에 簒奪을 꿈꾸고 있었는데, 그 때에 습착치는 《 韓進春秋 》 54卷을 著述하였다. 韓進春秋는 後漢 光武帝 (後漢 光武帝)로부터 西進 민제 (西晉 愍帝)까지 著述된 역사서이지만, 三國時代에서는 위 問題( 조비 )는 後漢 獻帝 로부터 脅迫으로 선양을 하고, 秦나라는 宣揚했다고 말해도 簒奪한 逆臣이며, 司馬所 (司馬昭)가 蜀漢을 平定하고, 恨이 滅亡하여 秦나라가 興한 것으로 해서, 하늘의 뜻은 勢力이 있고 權威를 强奪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主張했다(촉한정통론).

그 後, 病을 앓아 故鄕에 돌아갔지만, 襄陽(襄陽)李 苻堅 (?堅)의 前震(前秦)의 領土가 되었고, 膚見은 그의 이름을 듣고 습착치를 그의 親舊인 僧侶 도안 (道安)과 招聘하여,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아 厚待하였다. 습착치는 다리에 病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膚見은 “晉(晉)이 오(?)를 平定했을 때에는 陸氏 兄弟(六氣, 陸運)를 얻었지만, 只今 우리들이 漢나라 南쪽을 차지하여 얻은 人物은 한 名으로 半分되었다,”라고 말했다. 그 後, 습착치는 襄陽에 돌아갔다. 그 다음에 東進(東晉)李 襄陽을 奪還하자, 調整은 습착치에 國史 編纂을 擔當하여 始作하려고 했지만, 正確히 그 무렵에 死亡했다. 죽기 前에 위나라를 簒奪者로 하는 自身의 설에의 反論에 反駁하였다.

아들 習癖江 (習??)은 才能과 學問이 뛰어나고 아버지와 같은 風格이 있어, 官職 等級은 表記將軍 從事중낭(驃騎將軍 從事中?)에 이르렀다.

各州 [ 編輯 ]

  1. 『健康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