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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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더비 (Seoul Derbies)는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를 緣故地로 하는 蹴球 클럽들間의 京畿 를 의미한다. 로컬 더비(Local Derby)의 正義에 따라 서울 地域을 緣故로 하는 蹴球 클럽들間의 모든 競技가 서울 더비이지만 수많은 蹴球 클럽을 保有한 大韓民國 最大 都市 서울의 特性上 모든 서울 더비 競技를 이 文書에서 다루지는 못한다.

프로蹴球 出帆 以前 [ 編輯 ]

서울 더비의 歷史는 日帝强占期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代表的인 것은 연희전문학교 (現 延世大學校 )와 보성전문학교 (現 高麗大學校 )와의 라이벌戰으로 1927年 前朝鮮蹴球大會 準決勝에서 만난 것으로부터 始作하며, 只今도 兩敎는 定期的인 交流戰을 가지고 있다. 한便 學院蹴球가 아닌 成人 蹴球에서도 서울 더비가 있었는데, 1933年 前朝鮮蹴球大會 決勝에서 朝鮮蹴球團 京城蹴球團 이 優勝을 다투었던 것이 바로 그 代表的 例이다. [1] 特히 이 競技는 보성전문 (現 高麗大學校 ) 出身이자 朝鮮蹴球團 所屬인 김원겸 과, 연희전문 (現 延世大學校 ) 出身이자 京城蹴球團 所屬인 李榮敏 의 對決로도 注目을 끌었다.

서울 東大門 더비 [ 編輯 ]

解放 以後 主要 實業蹴球團들이 서울을 緣故地로 하였으나, 本格的인 緣故地 槪念이 導入된 것은 1983年 프로蹴球 가 創設되고 1987年 廣域軟膏劑 가 導入된 以後이다. 1989年 일화 천마 (現 城南 FC ), 1990年 럭키금성 황소 (現 FC 서울 ), 1991年 유공 코끼리 (現 濟州 유나이티드 )가 서울 緣故 프로蹴球團으로 東大門運動場 을 홈구장으로 共同 使用하면서 東大門 더비라고 불린 서울 더비 매치의 歷史는 始作되었다.

하지만 프로野球 草創期인 1980年代부터 서울 緣故地를 黃金市場으로 認識하고 서울에 2個 球團이 竝立, 競爭하면서 더비 競技를 펼치면 野球産業이 더 發展할 것으로 豫想한 野球界와 [2] 달리 蹴球界는 1990年代에도 서울 緣故地의 市場性을 認識하고 더비를 興行 要素로 活用하여 K리그 파이와 蹴球産業을 키울 생각을 하지 못 하였고 只今도 이런 雰圍氣가 남아있지만 蹴球 國家代表팀 FIFA 월드컵 本選 進出 等 國際大會 成績에만 沒頭하고 國內 프로蹴球 活性化는 恒常 뒷전인 狀況이었다.

거기에 當時 프로蹴球가 全般的으로 人氣가 없던 狀況이었고, 3個 球團들이 1996年 서울 緣故 空洞化 政策 으로 地方으로 移轉하기까지 서울을 緣故로 했던 期間이 各各 逸話가 7年, LG가 6年, 유공이 5年으로 軟膏 定着 段階였으며, 인터넷이 없던 時節이라 弘報/마케팅 手段의 限界 그리고 只今처럼 K리그에서 더비 協約式 或은 同一 緣故地 球團들은 유럽과 南美 等에서 피 튀기게 라이벌戰을 한다고 하니 興行을 위해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면서 人爲的인 더비 만들기 雰圍氣가 없었기 때문에 東大門 더비는 大衆的으로 크게 注目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서울 東大門 더비 中 K리그 歷史에 意味있고 關心을 끌었던 競技들이 있는데 첫番째가 1992年 리그컵 決勝戰 으로 일화 천마 LG 치타스 이렇게 두 球團이 서울 緣故 球團 라이벌의 自尊心을 걸고 衝突한 競技로 [3] 韓國 프로蹴球 K리그 史上 最初로 타이틀이 걸린 決勝戰에서 한 都市를 同一한 緣故地로 하는 두 球團이 激突한 더비 매치 로 歷史的 意義가 깊다.

또한 1994年 11月 9日 에 開催된 일화 천마 유공 코끼리 와의 正規리그 競技 亦是 서울 緣故地를 하는 두 라이벌 球團이 K리그 優勝 向方을 가르는 血戰을 펼칠것으로 豫想되면서 競技 前부터 話題가 되었다. [4] 또한 이런 더비 要素 以外에도 舊蘇聯 일화 천마 의 傳說的인 골키퍼 사리체프 와 이에 對應하기 위해 유공 코끼리 에서 데려온 亦是 레프 야신 클럽 러시아 國家代表 出身의 1993年 올해의 러시아 골키퍼賞을 受賞한 샤샤(本名 알렉산드르 포드쉬발로프 ) 골키퍼와의 對決로도 話題를 모았으며 平日 3時 京畿임에도 不拘하고 10,000餘名의 觀衆이 들어왔다. [5] 이 競技에서 유공 코끼리 는 일화의 자책골, 허기태 選手의 追加골과 고정운 페널티킥 을 비롯한 決定的 슈팅을 여러次例 善防하며 期待에 副應한 샤샤 의 大活躍에 [6] 힘입어 2:0으로 일화 천마 를 制壓하였다. 이 競技 結果 유공 코끼리 는 마지막 한경기만을 남겨둔채로 勝點 1點差로 일화 천마 를 바싹 뒤쫓아 逆轉 優勝의 실날같은 希望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便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亦是 이 期間 中 라이벌 關係를 形成하여 [7] 이렇게 3個의 서울 더비 매치가 進行되었으나 1995年 10月 25日 일화 천마 LG 치타스 의 競技를 마지막으로 1996年 서울 緣故 空洞化 政策 으로 서울 緣故 프로蹴球團들이 사라진 後 서울 더비의 命脈이 끊겼다.

일화 천마 vs LG 치타스 全的 (1990?1995) [ 編輯 ]

※ 한국프로축구연맹이 非公式競技(이벤트京畿)로 看做하고 있는 1992 리그컵 챔피언決定戰 2競技의 記錄은 包含하지 않았다.

大會 競技 數 일화 천마 勝 無勝負 LG 치타스 勝 일화 천마 得點 LG 치타스 得點
K리그1 35 12 12 11 47 44
리그컵 5 2 1 2 5 6
K리그 通算 40 14 13 13 52 50

일화 천마 vs 유공 코끼리 全的 (1991?1995) [ 編輯 ]

大會 競技 數 일화 천마 勝 無勝負 유공 코끼리 勝 일화 천마 得點 유공 코끼리 得點
K리그1 29 13 13 3 36 25
리그컵 5 2 2 1 5 4
K리그 通算 34 15 15 4 41 29

LG 치타스 vs 유공 코끼리 全的 (1991?1995) [ 編輯 ]

大會 競技 數 LG 치타스 勝 無勝負 유공 코끼리 勝 LG 치타스 得點 유공 코끼리 得點
K리그1 29 9 11 9 32 33
리그컵 5 2 1 2 8 5
K리그 通算 34 11 12 11 40 38

서울 江南北 더비 [ 編輯 ]

FC 서울 vs 서울 이랜드 FC [ 編輯 ]

2014年 4月 14日 이랜드 그룹 서울 을 緣故地로 하는 프로蹴球團의 創團을 發表하였고 2015年부터 서울 이랜드 FC 라는 球團으로 2部 리그인 K리그2 에 合流하였다.

旣存의 FC 서울 서울 이랜드 FC K리그 의 같은 디비전에서 競爭할 境遇 1995年 以來로 서울特別市 를 緣故地 하는 프로蹴球團間의 서울 더비가 K리그 에서 다시 펼쳐질 豫定이다. [8] [9]

한便 K리그 보다 먼저 2021年 FA컵 3라운드에서 FC 서울 서울 이랜드 FC 가 만나게 되면서 FA컵 舞臺에서 1995年 以後 26年만에 서울 緣故 프로蹴球團들끼리의 서울 더비가 復活하였고 [10] 서울 이랜드 FC 레안드로 의 決勝골로 1對0으로 勝利하였다. 3년후 2024年 코리아컵 3라운드에서 서울 이랜드 FC 臺 FC 서울의 두番째 서울 더비가 열리게 되었다.

下部 리그 서울 더비 [ 編輯 ]

K3리그 時節 서울 유나이티드 , 서울 擺撥 FC (解體), 서울 FC 마르티스 (脫退) 이렇게 서울 緣故 3個팀들間의 서울 더비가 過去 벌어졌다.

參考로 2009年 서울 유나이티드 K리그 클럽 FC 서울 2軍 사이의 練習 競技가 開催된 적이 있다.

現在는 K4리그 에서 서울 蘆原 유나이티드 서울 重浪 蹴球團 과의 서울 더비가 벌어지고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造築段優勝 兩軍모두 描記續出” . 東亞日報. 1933年 11月 5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 새로운 서울팬을 잡아라 " . 京鄕新聞 . 1984年 10月 24日.  
  3. “서울 緣故地 逸話-LG 自尊心 對決” . 中央日報. 1992年 11月 24日.  
  4. “逸話 有功 優勝 向方 가를 最終 血栓” . 中央日報. 1994年 11月 8日.  
  5. “逸話 有功 오늘 大激突” . 京鄕新聞. 1994年 11月 9日.  
  6. “動物的感覺으로 골문 封鎖” . 京鄕新聞. 1994年 11月 10日.  
  7. “新라이벌 探訪(2)-LG 치타스 vs 유공 코끼리” . 中央日報 . 1996年 3月 24日.  
  8. “서울 더비 꿈꾸는 이랜드, 果敢한 投資 必須다” . 스포탈코리아. 2014年 4月 15日.  
  9. 다만 R리그 2016시즌 1라운드에서 間接的으로 열렸으며 서울 이랜드 FC가 1:0으로 이겼다
  10. 2部 이랜드‘일곱 살 生日잔치’祝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