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壘키우스 아풀레이우스 社투르니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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壘키우스 亞플레이우스 社투르니누스의 銅錢

壘키우스 아풀레이우스 社투르니누스 (Lucius Appuleius Saturninus, 紀元前 100年 死亡)은 紀元前 2世紀 에 活動한 로마 共和政 의 政治人이다. 護民官 으로 煽動政治에 能하였으나 結局 殺害당했다.

첫 番째 護民官 時期 [ 編輯 ]

紀元前 104年 社투르니누스는 로마의 外航인 오스티아 에서 밀을 輸入하는 것을 監督하던 財務官었다. 民衆派人 그는 特別히 過失이 없음에도 元老院의 牽制로 交替되었고 이듬해 護民官에 當選되었다. 護民官이 된후 그는 유구르타 와의 戰爭에서 돌아온 退役兵士의 處理問題로 苦悶하던 가이우스 마리우스 와 손을 잡고 여러 가지 改革 政策을 推進하였다. 그는 그라쿠스 兄弟 의 信奉者였고 그들의 政策을 自身의 主要 政策으로 부활시키려고 하였는데 主要 內容은 아래와 같다.

  • 穀物法 改正: 가이우스 그라쿠스 가 制定한 庶民 供給用 法을 改正하여 더 낮은 價格으로 庶民에게 供給함
  • 式民法 : 카르타고 및 北아프리카에 退役兵士를 위한 植民都市 建設, 兵士 1人當 100有겔룸(25 헥타르 )의 土地를 支援

社투르니누스의 주된 적은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였는데 메텔루스는 마리우스의 政敵이企圖했으며 財務官時節 社투르니누스를 失脚시키려고 했으나 同僚 元老院 議員들의 反對로 失敗했었다.

두 番째 護民官 時期 [ 編輯 ]

紀元前 100年 에 社투르니누스는 다시 護民官 에 選出되었고, 마리우스는 6番째로 執政官 이 되었다. 社투르니누스는 새로운 農地法을 들고 나왔는데 킴브리 族과의 戰爭이 끝난 後 退役한 마리우스의 兵士들에게 갈리아 의 킴브리 族의 땅을 無償으로 分配하는 것, 시칠리아 마케도니아 및 아카이아에 로마 植民都市를 建設하는 것, 이탈리아 人들에게 로마 市民權과 同等한 權利를 附與하는 것等 改革的인 內容이었다.

이것은 다시 保守派와 元老院의 貴族派에게 挑戰狀을 내민 것이었고 元老院은 反對했으나 社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退役甁을 모아 示威를 벌이면서 結局 通過시켰다. 社투르니누스 一派는 더 나아가 民會에서 可決된 法案에 對하여 元老院 議員은 5日以內에 法案을 認定하는 宣誓를 해야한 다는 條項을 追加시켰고 元老院은 이에 强力히 反對했다. 執政官 마리우스는 中間에서 이를 仲裁해야하는 立場이었지만 먼저 나서서 그 宣誓를 하고 말았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는 끝까지 宣誓를 拒否하고 亡命했고 많은 元老院 議員이 마리우스의 反對派로 돌아섰다.

죽음과 그 以後 [ 編輯 ]

社투르니누스는 紀元前 99年 세 番째 護民官에 出馬했다. 그의 急進的인 政策으로 立地가 줄어든 마리우스는 그와 距離를 두고자 했다. 社투르니누스는 無難히 當選되었고 그의 同僚 글라우키兒는 現職 法務官으로 出馬權限이 없었음에도 不拘하고 집定款 選擧에 出馬를 强行했다.

그渦中에 貴族派 執政官 候補가 社투르니누스의 支持者에 依해 殺害되는 事件이 벌어졌고 執政官 選擧는 霧散되었다. 激忿한 元老院은 社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兒를 國家의 敵으로 規定하고 執政官 마리우스에게 武力을 使用하게 했다. 社투르니누스는 支持者들과 함께 카피톨리노 언덕 에서 籠城을 벌였으나 結局 마리우스에게 降伏했고 마리우스는 그들을 한 建物에 監禁했다.

그러나 保守派와 元老院派가 建物 지붕을 뚫고 들어가 그안에 있는 社투르니누스와 支持者들을 돌로 쳐죽였고 社투르니누스가 죽은 뒤, 元老院은 그의 改革政策을 大部分 無效化했고 마리우스는 平民派의 支持 마저도 잃었고 失脚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