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六臣公園

死六臣 公園
(死六臣公園)
位置 서울特別市 銅雀區 노량진동
座標 北緯 37° 30′ 51″ 東經 126° 56′ 55″  /  北緯 37.51405° 東京 126.948632°  / 37.51405; 126.948632
類型 記念公園
面積 47,827 m 2
開院 1978年 5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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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서울의 公園

死六臣 公園 (死六臣公園)은 서울特別市 銅雀區 노량진동 에 있는 死六臣墓 와 그 外 飼育神秘 等이 安葬된 公園 이다. 元來 이곳에 있던 성삼문 · 耳介 · 박팽년 · 金文起 [ 出處 必要 ] 의 墓에, 하위지 · 유성원 의 家廟를 새로 造成하였다.

死六臣 [ 編輯 ]

首陽大君이 조카인 斷種 ( 1445年 )으로부터 王位를 빼앗고, 王이 되자 이에 不服하고 端宗 復位에 힘 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 , 하위지 , 耳介 , 유성원 , 박팽년 , 金文起 [ 出處 必要 ] 를 顯彰하여 모신 곳이다. 이들은 端宗 3年(1455年)에 首陽大君의 王位簒奪에 憤慨하여 端宗의 復位를 노리던 中, 1456年 6月 明나라 使臣의 歡送宴에서 成三問의 아버지 成勝(成勝)가 世祖 一派를 處斷하기로 計劃하였으나, 이 事實이 事前에 漏泄되어 失敗하였다. 이들의 計劃이 挫折되자 擧事 同志이며 集賢殿 出身인 金叱 (金?) 等이 世祖에게 端宗復位 計劃을 密告하여 連累者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 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殘酷한 拷問에도 屈하지 않고 世祖를 ‘殿下’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眞相을 自白하면 容恕한다는 말을 拒否하고 刑罰을 받았다. 성삼문 , 박팽년 , 耳介 는 단근질로 죽음을 當하였고, 하위지 는 慘殺 當하였다. 유응부 는 잡히기 前에 自己 집에서 아내와 함께 自殺하였다. 이밖에 死六臣의 家族으로 男子인 境遇는 모두 죽음을 當하였고, 女子의 境遇는 남의 奴婢로 끌려가는 等 70餘名이 母斑 嫌疑로 禍를 입었다. [ 出處 必要 ]

死六臣墓 [ 編輯 ]

朝鮮 世祖 2年(1456) 朝鮮의 6代 임금인 斷種 의 復位를 圖謀하다 목숨을 바친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耳介 , 유성원 , 金文起 6名의 臣下 卽 死六臣(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端宗 3年(1455)에 端宗의 叔父인 首陽大君(뒤의 世祖)李 王位를 빼앗고 端宗을 몰아내자 이에 憤慨하여 端宗의 復位를 꾀하다 發覺되어 慘酷한 最後를 맞았다.

死六臣의 忠誠心과 壯烈한 意氣를 追慕하기 위해 肅宗 7年(1681)에 이곳에 書院을 세우고, 正祖 6年(1782)에는 神道碑(神道碑:王이나 高官 等의 平生 業績을 기리기 위해 무덤 近處 길가에 세우는 碑)를 세워 두었다.

1955年 에는 飼育神祕를 세우기도 하였고, 以後 墓域을 擴張하여 새롭게 整備하여 忠孝思想을 기리고자 하였다. 元來의 墓域에는 성삼문 · 耳介 · 박팽년 · 金文起 渺漫 있었으나 後에 하위지 · 유성원 家廟를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

主要 施設 [ 編輯 ]

死六臣 歷史觀
  • 紅살門
  • 의절사
  • 死六臣 墓
  • 死六臣歷史觀
  • 散策路 等

갤러리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