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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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學 (北學)은 朝鮮 後記 實學 의 한 流派이다. 重商學派라고도 한다. 當時 實學者들 가운데 漢城의 都市 雰圍氣 속에서 자란 一派가 있었다. 이들은 漢城의 商工業 發展과 直間接的 關係를 가지고 있어 主로 商品의 流通이나 生産手段의 發展을 主張했다. 이들의 思想은 利用厚生(利用厚生)으로 要約된다.

背景 [ 編輯 ]

胡亂을 經驗한 漢城의 雰圍氣는 元來 反淸숭明의 北伐 運動이 主流였고, 朝鮮 이야말로 中華文化의 唯一한 繼承者라는 小中華主義를 朱子性理學 이 思想的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勿論 그들도 明나라 를 높이는 데만 目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랑캐인 淸나라 를 끝까지 正統으로 認定치 않고 三田渡의 屈辱 에 對한 劣等感을 떨치는 한便, 朝鮮의 文化的 優位性을 確認하려는 自尊心의 發露였다.

그 例로 1703年 (肅宗 29年) 尤庵 宋時烈 의 維持에 따라 萬東廟 [1] 를 세워 明나라 萬曆帝 [2] 崇禎帝 [3] 을 祭祀지냈고, 2年 後인 1705年 에는 淸나라 와의 外交的 摩擦을 무릅쓰고 昌德宮 內에 大報壇(大報壇)을 세워 亡한 名皇帝들에 對한 祭祀를 아예 公式化했다. 그리고 正祖 ~ 順調 때 《존주휘편(尊周彙編)》을 編纂해 倭亂·胡亂 以後의 숭明半晴運動을 總整理한 것도 그런 目的이었다. 아예 1728年 英祖 때는 李麟佐의 亂 을 鎭壓한 功臣들에게 내린 錄券에 崇禎帝의 휘와 같은 분 [4] 字가 들어갔다고 같은 뜻의 量 [5] 字로 바꿔넣고 當時 모든 敎書들까지 글字를 고치도록 했을 程度였다.

그러나 18世紀 中葉 以後 與黨인 老論 의 一角에서 時代의 變化를 能動的으로 受容하려는 새로운 學風이 일어났다. 이 學風은 淸나라에서 배우자는 內容을 담고 있어 흔히 ‘北學(北學)’이라고 한다. 勿論 이들 亦是 어디까지나 老論 으로 朱子性理學의 프레임 위에서의 새 文化 受容을 말하는 거였다. 이때의 中國은 康熙帝 (1662~1772)~ 乾隆帝 (1736~1795)의 最全盛期를 謳歌하고 있던 時期로, 中國 歷代 文化의 精髓가 總整理되고 産業 成長과 西洋 科學 技術 文明 導入이 이뤄지던 時期였다.

따라서 中國의 主人인 滿洲族 은 如前히 蔑視하되 그 안에 담긴 中國文化와 産業, 技術은 受容한다는 柔軟한 姿勢가 바로 北學이다. 政經 分離라 할 수 있는 이런 思想的 基盤은 後日, 西洋의 技術을 받아들이되 精神과 思想은 東洋으로 것으로 해 野蠻的인 西洋人을 感化시키자는 동도서기論의 論理에까지 影響을 주게 된다. 이러한 北學의 代表者는 홍대용 · 朴智元 · 박제가 · 이덕무 等이다.

學問의 對象 [ 編輯 ]

北學派는 淸나라 의 全盛期 모습에만 感化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商業 都市로 變貌한 18世紀 後半의 漢城과 蕩平策으로 대표되는 英祖 正祖 의 人材 登用度 그들에게 새로운 刺戟을 줬다. 그들은 17世紀 初 침類大學史 (初期 實學者를 일컬음) 들이 追求한 折衷的 學風과 17世紀 後半 漢城 南人들 (野黨)李 提起한 苦學(古學) 및 農村經濟에 對한 關心度 積極 受容하였다.

이제 漢城의 一部 老論은 商工業發展의 모토 위에서 農村問題 解決도 아울러 考慮하면서, 淸나라의 文物을 積極的으로 受容해 富國强兵과 利用厚生(利用厚生)을 높이자는‘북학’으로 旋回한 것이다. 北學의 哲學的 基礎는 ‘인물성동論(人物性同論)’에 있었다. 사람과 萬物의 本性이 같다고 보는 이 主張은 萬物에 對한 關心을 높여 積極的으로 利用厚生을 達成하도록 했다.

北學이 體系化된 것은 朴齊家의 《北學議(北學議)》라는 著述이었지만 홍대용 · 朴智元 · 이덕무 · 박제가 等이 남긴 厖大한 著作들은 서로 그 뜻이 동조화돼 새 傾向을 이루고 있었다. 北學派의 共通點은 淸나라 사신단에 섞여 北京 에 다녀온 人物들로 그들의 中國 紀行文이 發端이 된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들은 淸文化의 優秀性을 통해 朝鮮의 現實을 改革하기 위한 우리 內部의 認識 改革이 必要하다고 主張했다. 그들의 問題認識 속에는 當時의 兩班社會의 矛盾에 對한 것도 깔려있어 그에 對한 痛烈한 諷刺와 批判 亦是 엿보이며, 農業이나 商工業 等 肉體的 勞動에 對한 天時라는 傳統的 士農工商의 틀을 벗어나 生産이란 行爲 自體를 높이 評價하였다. 北學派들은 過去 經世致用學派들과 利用厚生이란 點에서 共通點을 갖지만, 經世致用學派들이 宋代 의 文化 經濟的 隆盛을 理想鄕으로 삼는 復古的이었던 것과 달리, 當時 淸나라의 商業과 手工業 發展相을 導入하고자 하는 前進的 性格을 지니고 있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忠淸北道 槐山 (槐山) 所在
  2. 明나라 新種: 壬辰倭亂 當時 朝鮮 派兵을 決定하고 實行한 皇帝. 當時 大規模 派兵 때문에 明의 國力은 衰弱해져 滿洲族의 跋扈를 불러일으켰다. 自國의 滅亡의 端初가 된 無理한 派兵 때문에 壬辰倭亂 當時부터 只今까지도 中國人들은 그를 朝鮮皇帝란 別名까지 붙여 놀릴 程度였다.
  3. 明나라 毅宗: 明나라 마지막 皇帝
  4. (奮-떨칠 分)
  5. (揚-날릴,떨칠 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