便안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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便안렬
?安烈
高麗의 領三司事

이름
別名 者(字) 衝가(忠可)
號(號) 大恩(大隱)
身上情報
出生日 1334年 4月 16日 ( 1334-04-16 )
出生地 元나라 瀋陽 (瀋陽)
死亡日 1390年 2月 1日 ( 1390-02-01 ) (55歲)
死亡地 高麗 開京 에서 死刑
經歷 判三司事(判三司事)
領三司事(領三司事)
本館 原州 (原州)
父母 變量(?諒)
兄弟姊妹 便雁帛(兄), 便안서(제)
配偶者 原州 元氏
子女 長男 變現(?顯)
次男 變異 (邊?)
作爲 源泉府院君(原川府院君)

便안렬 (?安烈, 1334年 4月 ~ 1390年 2月 1日 ( 陰曆 1月 16日 ))은 高麗 末期의 文身 (文臣), 무신 (武臣)이다. 元나라 瀋陽 出身이나 공민왕 을 따라 高麗로 들어왔다. 本貫은 原州 (原州), 者(字)는 衝가(忠可), 號(號)는 大恩(大隱)이다. 1351年 進士試에 壯元 及第했다. 紅巾賊 을 擊退하여 京城收復功新 1等功臣이 되었고, 李成桂 (李成桂), 崔瑩 (崔瑩) 等과 함께 倭寇를 擊退하여 源泉府院君(原川府院君)에 封해졌으며, 判三司事(判三司事)와 領三司事(領三司事)에 이르렀다. [1]

大護軍 金佇 (金佇) 等이 李成桂의 勢力을 牽制하고 禑王의 復位를 謀議했던 일에 連累되어 處刑되었다. 朝鮮 太祖 에 依해 朝鮮 個國 二等功臣에 追贈되었다. [2]

生涯 [ 編輯 ]

1334年 4月에 태어났다. 恭愍王 10年( 1361年 ) 안우 (安祐)를 따라 紅巾賊을 敗走시키는 데 功을 세워 2等 功臣 判小府監事(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開城(開城)을 收復하고 1等功臣이 되었다. 禮儀判書(禮儀判書)가 되어 秋性補助一等功臣推誠輔祚一等功臣)의 號를 받고 判密直司事(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4年 崔瑩과 더불어 濟州 를 征伐한 뒤 知門下府事(知門下府事)·門下評理(門下評理)를 歷任하였다.

禑王(禑王)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號를 받은 뒤 양광全羅度都指揮使 兼 助戰元帥(楊廣全羅道都指揮使兼助戰元帥)로서 나세 (羅世) · 조사민(趙思敏) 等과 함께 倭寇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門下贊成事(門下贊成事)로 昇進하였다.(우왕 2年, 1376)

丹陽 (丹陽)과 安東 (安東)의 倭寇를 몰아낸 뒤 源泉府院君(原川府院君)에 封해지고 判三司事(判三司事), 뒤에 領三司事(領三司事)가 되었다.

黃山大捷(禑王 6年, 1380) [ 編輯 ]

禑王 6年( 1380年 )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로서 都巡察使(都巡察使) 李成桂, 流失 等과 함께 雲峰(雲峰), 黃酸(荒山), 部令(扶寧) 等地에서 倭敵을 大破하고 改善한 뒤, 정방製造(政房提調)가 되어 그 勢力이 임견미 (林堅味)· 이인임 (李仁任) 等과 겨룰 만큼 커졌다. 禑王은 黃酸 戰鬪에서 크게 專攻을 세운 변안렬과 李成桂에게 金 50兩씩, 왕복명 以下 여러 將帥들에게는 銀 50兩씩을 주었으나, 모두 다 辭退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敵을 擊滅하는 것은 그 職責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大勝利를 거두었는데 냇물이 발갛게 되어 6, 7日이나 그 色이 變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고 그릇에 담아서 맑아지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마실 수 있었다. 鹵獲한 馬匹이 1,600餘 疋이고, 其他 武器는 헤아릴 수 없었다. 知人 김국을 派遣하여 勝戰을 報告했더니, 腎盂는 기뻐서 密直司 人員步를 보내어 宮中에서 술을 주어서 慰勞하고, 김국에게 郎將 벼슬과 말 1疋을 주었다. 처음에 敵의 兵力이 我軍의 10倍나 많았지만 70餘名이 겨우 살아 智異山으로 逃亡쳤다. [3] [4] [5]

田制改革과 關係 [ 編輯 ]

威化島 回軍 直後에 照準 은 破格的인 田制改革案을 提示했고, 이 改革案을 둘러싸고 論難이 加重되었다. 그래서 道黨에서 투표한 結果 參席者 53名 가운데 照準 · 정도전 等 18名이 贊成하고, 異色 · 조민수 ·便안렬· 離任 ·우현보· 倦勤 ·유백유 等이 反對하였다. [6]

道黨에서 그 可否를 討議할 때 市中 異色은 오랜 法制를 輕率하게 고칠 것이 아니라는 意見으로 自己主張을 固執하면서 듣지 않았으며, 이림·우현보·便안렬·倦勤·유백유 等은 異色의 主張을 追從하였다. 정도전·윤소종은 照準의 主張에 加擔했고, 鄭夢周는 이 中間에서 일정한 立場을 가지지 않았다. 또 여러 官僚에게議論하게 하니, 論議에 參加한 自家 53名이었는데 改革을 要求한 者가 十中八九였으며, 要求하지 않는 者는 모두 다 名門巨族의 子弟들이었다. [7]

威化島 回軍以後 私田改革은 重要한 政治 懸案이었다. 이런 雰圍氣에서 변안렬이 異色의 意見을 좇아 私田改革에 反對한 것은 李成桂와 더 以上 함께 할 수 없다는 立場을 드러낸 것이었다.변안렬은 自身의 政治的 活路를 摸索하는 過程에서 李成桂와 聯合했고, 威化島 回軍에 參與하였다. 변안렬은 威化島 回軍 以後 다시 都堂에 參與하면서 權力者로 浮上하였다. 하지만 李成桂 一派의 政治的 構想에는 뜻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 代身에 異色과 政治的 立場을 함께 하면서 昌王을 擁立하고 事前改革에 反對하였다. 그 結果 변안렬은 李成桂와 葛藤을 빚으면서 다시 政治的 危機를 맞게 되었다. [8]

禑王 復位 事件 [ 編輯 ]

1389年(昌王 1) 大護軍 金佇(金佇) 等이 李成桂의 勢力을 沮止하고 禑王의 復位를 謀議했던 일이 發覺되었다. "11月, 金佇(金佇)가 몰래 禑王을 黃려부(黃驪府)에서 謁見(謁見)하니, 禑王이 울면서 말하기를,“내가 平素부터 곽충보(郭忠輔)와 사이가 좋으니, 그대가 가서 計劃을 세워 李成桂를 除去한다면, 나의 뜻은 成就될 수 있다.”하였다. 金佇가 와서 充補에게 알리니, 充補는 거짓으로 應諾하고는 달려와서 李成桂에게 알렸다.

金佇가 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異色(李穡) 等과 함께 連累되었다고 거짓 自白하여 漢陽(漢陽)에 流配되었다가 뒤에 殉節하였다.

最後 [ 編輯 ]

金佇와 정득後(鄭得厚)를 逮捕하려 하니, 得後가 金佇와 같이 謀議하고 밤에 太祖의 邸宅(邸宅)으로 潛入하다가 門客(門客)에게 잡히게 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金저를 巡軍獄(巡軍獄)에 가두니 工事(供辭)가 便안렬(?安烈) 等에게 關聯되었다. 臺諫(臺諫)李 請하므로, 太祖(李成桂)가 極力 救援하였으나 昌王은 듣지 아니하였다.(《태백산사고본》 1冊 1卷 26張 A면)" [9]

大恩便안렬墓域 京畿道 南楊州市 진건읍 용정리에 있다. 2002年 9月 16日 京畿道의 文化財資料 第116號로 指定되었다.

家族 [ 編輯 ]

  • 部: 變量(?諒) - 判三司事(判三司事)로 追贈
    • 兄(兄): 便雁帛, 高麗 戶部戰서
    • 第(弟): 便안서(?安緖)
    • 否認: 原州 元氏
      • 아들: 變現(?顯)
        • 孫子: 邊隙衝(?克忠), 別坐公派祖, 원종삼等功臣
        • 孫子: 便極民(?克愍), 參議公派祖
      • 아들: 變異 (邊?, 1360年 ∼ 1439年), 原從功臣, 虎勇司 同僉節制使, 판南原府使, 全羅道 兵馬都節制使 兼 水軍都節制使, 忠淸道 水軍都按撫處置使, 中軍 冢弟
        • 孫子: 변차희(?次熹, 첨追供派祖,1392~1462), 子 回文, 長興庫職場, 扶安眞兵馬節制使, 朝鮮朝 世宗때 僉知中樞院使
        • 孫子: 변상조(?尙朝, 南部令公派祖): , 원종삼等功臣, 朝鮮朝 世祖때 南部令을, 아내(順天 金氏)
        • 孫子: 변상근(?尙覲, 護軍公派祖) 朝鮮朝 世宗때 宣節將軍 軍器寺판관
        • 孫子: 변상회 (?尙會,1399~1485, 參判公派祖) 號 霧淞當, 원종삼等功臣, 好調?禮曹參判 症禮曹判書 兼 豫無關提學 지 競演春秋館社 원평群
        • 孫子: 변상동(?尙同, 監察公派祖,1400生) 朝鮮朝 司憲府監察
        • 孫子: 변상빙(?尙聘, 郡守公派祖), 원종삼等功臣, 世宗朝에 行臺監察로서 홍원숙과 같이 옭高 그른일을 살피는 일로 競技 左右徒步辭職이 되고 原從功臣三等에 錄勳 通政大夫 간성군수 歷任
        • 孫子: 변상복 (?尙服, 釜馬公派祖) 號 송헌(松軒), 朝鮮朝 通政大夫 江陵大都護府社, (定宗의 딸 덕천옹주 와 婚姻)
        • 孫女 사위: 정유길(鄭由吉), 利點(李漸), 이승손(李承孫)
      • 아들: 便예(?預)
        • 孫子: 변영청(?永淸) 使用公派祖
        • 孫子: 便細聽(?世淸) 中郞將公派祖

朝鮮王朝實錄 [ 編輯 ]

大恩 변안렬이 高麗의 忠臣이었음에도 不拘하고 便안렬의 커진 勢力은 高麗 禑王과 李成桂로부터 同時에 牽制를 받는 立場이었음을 朝鮮王朝實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다음 狀況은 威化島 回軍 以後 實錄에 記錄된 內容이다. '禑王이 밤에 患者(宦者) 80餘 名과 함께 甲옷을 입고 太祖 및 조민수·便안렬(?安烈)의 집으로 달려왔으나, 이들이 모두 專門(殿門) 밖에서 軍士를 둔치고 집에 있지 아니한 까닭으로 殺害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10] (《太白山史庫本》 1冊 1卷 24張 A면)'

定宗 1卷, 1年(1399 己卯 / 名 建文(建文) 1年) 3月 9日(競進) 太上王이 새벽에 먼저 留後司에 들어가서 便안렬(?安烈)의 옛집에 나아갔다.(《태백산사고본》 1冊 1卷 7張 A면) [11]

太祖 2年 戒喩(1393,紅무 26) 7月22日(乙丑) 太祖는 開國 功臣을 冊錄토록 校誌를 내리었다. "죽은 檢校 市中(檢校侍中) 便안렬(?安烈)은 二等 功臣 警報(慶補)의 예(例)가 될 만하며, 褒賞(褒賞)하는 銀錢(恩典)을 類似(有司)는 擧行하라."(《조선왕조실록》 1輯 46面)

高麗史 [ 編輯 ]

太祖 때 鄭道傳이 編纂한 《高麗史》에, 太祖가 신우(辛禑) · 신창(辛昌) 및 便안렬(?安烈)을 죽였다고 記錄하여 個國 朝鮮의 葛藤을 惹起 시켰는데 이는 鄭道傳이 李芳遠의 心腹에게 죽임을 當하는 原因 中 하나였다, 世宗은 6年 甲辰(1424,零落 22) 12月 1日 太祖 때 鄭道傳이 《高麗史》를 編纂할 적에, 太祖가 신우(辛禑)·신창(辛昌) 및 便안렬(?安烈)을 죽였다고 記錄한 高麗 時代의 史草(史草)를 納入(納入)하여, 귀양을 보냈다.

목은 異色 과의 關係 [ 編輯 ]

목은 異色은 변안렬과 관계되는 몇 首의 詩를 남겼다. 異色은 倭寇가 極烈하여 이를 擊退하려 李成桂와 便안렬 等 여러 元首들이 出征한다는 消息을 듣고, 詩를 지어 激勵하였다. 異色은 當時에 賞의 李成桂, 時在 변안렬을 親히 配送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고 있다.

勝利 決斷한 朝廷의 計策이 훌륭한지라 郊外의 電送에 軍律 또한 精剛해졌으니

서로 依支함은 恰似 수레와 덧방나무요 紊亂치 않음은 鎭靜 그물과 별里줄 같네

여러 將帥의 勇猛은 다 氣가 넘치거니와 두 怨讐의 指揮權은 유별히 光彩가 나네

알建大 남은 種子 없이 다 殲滅할 테니 亡할까 하여 다시 뽕나무에 매주었으면 하네

아래 詩는 李成桂와 便안렬의 勇猛과 智慧, 그리고 義理를 稱頌한 詩이다.

天地가 閉場하면 宜當 봄이 돌아오고 勇士의 蟄伏은 제 몸 保存키 위함인데

힘을 기르되 때로 숨겨서 겁내지 않고 널리 밝아서 甲옷 쓴 이는 成人이었네

血氣의 勇猛은 고작 一當百에 그치지만 義理가 至極하면 天下의 臣下가 된다오

양 몰아 범을 침은 相對가 안 되고말고 軍事 착함은 律로 내는 데 있을 뿐이네

아래 詩의 理工科 卞君은 李成桂와 변안렬을 말한다. 1380年 李成桂가 都巡察使로 변안렬이 都體察使가 되어 倭寇와 熾烈한 戰鬪를 벌이게 되었을 때이다. 李成桂와 변안렬은 雲峰 戰鬪에서 倭를 물리치고 크게 功을 이루었다.

理工科 卞君은 勇猛 智慧 다 갖춘 데다 義理는 하늘 닿아라 어이 그리 우뚝한고

일 當해 두려워하고 計策 내서 成功하니 唯獨 軍法에만 모두 정명한 게 아니로다

상산은 地帶가 낮고 큰 고개는 險峻한데 고기들이 솥 안에서 살려고 버둥대거니

崩潰되는 形勢가 반드시 急激할 테지만 함정만 있고 堅固한 性 없음이 한스럽네

가을바람 썰렁해지면 몸은 움츠러들지만 가을밤 漸次 길어지면 꿈은 말아지리니

願컨대 우리 主張이 높은 功烈을 세워서 一擧에 妖氣의 뿌리를 모두 絶滅시키고

百萬의 蒼生이 다 安定을 되찾게 하여 다시 餘生에 風月을 즐기게 해주었으면 하네 [12]

圃隱 鄭夢周 와의 關係 [ 編輯 ]

鄭夢周는 便안렬의 祭祀에 參席하여 그를 哀悼하는 祭文을 목은 異色 , 冶隱 吉再 , 陶隱 이숭인 , 이방번 ( 李成桂 의 아들이며 변안열의 사위이다.) 等과 같이 지었다.

다음은 鄭夢周의 祭文이다.

"壬申年 正月 欺罔일은 故人 臺恩功이 殉節하신 두番째 해입니다. 眞實한 벗이며 市中의 職責을 맡고 있는 令日인 鄭夢周는 술盞을 부어 共의 墓에서 아륍니다. 凜凜하기가 秋霜같음은 공의 忠熱이요, 열렬하기가 百日(白日) 같음은 공의 儀節 이었습니다. 이 밤을 소리 내어 크게 울건대 어느 날이든 敢히 잊겠습니까? 받드리는 祭需는 비록 薄하오나, 마음으로 통하는 郵政은 두터우니 魂靈께서는 바라건대 오셔서 드시옵소서. 아! 원통하도다."

鄭夢周는 眞實한 벗이며, 잊을 수 없는 벗이라하고 마음으로 통하는 友情이 두터움을 表現하였다. 짧은 祭文에서 그는 便안렬의 충직하고 熱烈한 節義를 다 表現하고, 그와의 두터운 友情을 생각하며 그의 죽음을 원통해 하였다. 정뭉주전에서 , 변안렬은 志操가 맑고 높았으며 旗國과 度量이 넓고 컸으며, 文章에 能通하였고 무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李成桂와 함께 威化島 回軍에 參與하였으나, 禑王의 强化 追放에 傷心하여 門을 닫아걸고, 號를 大恩이라 하였다고 傳한다.

不屈가 [ 編輯 ]

1389年(供養王 1年) 10月 11日은 李成桂 의 生日이었다. 當時 武將들은 士兵을 거느리고 있었다. 易姓革命을 꾀하고 있던 李成桂는 변안렬이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언제나 精銳兵 200名을 거느리고 空甁(公兵)을 掌握해 專攻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李成桂는 自己 生日을 핑계로 정몽주 와 변안렬을 招待했다. 李成桂는 아들 李芳遠 을 시켜 <何如歌>를 부르게 하자, 변안렬은 <不屈가>로 鄭夢周는 <丹心歌>로 和答했다.

何如歌(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 後援이 무너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죽지 않으면 어떠하리"
不屈가(不屈歌)
"내 가슴 말(斗)처럼 구멍 뚫어 새끼줄로 길게 길게 꿰어 앞에서 끌고 뒤어서 당겨 갈리고 찢길망정 너희들 하는 대로 내 辭讓치 않으리라. 내 賃金 빼앗는 일 나는 굽힐 수 없도다."

김천택(金天澤)의 『靑丘永言(靑丘永言)』에 傳해오는 「不屈가(不屈歌)」가 그의 市價로 밝혀졌다. 따라서 그의 高麗 王朝에 對한 忠誠心을 엿볼 수 있다. 不屈가는 一名 ‘忠義가’라고도 한다. 原價(原歌)는 傳하지 않고, 한역가(漢譯歌)와 創作經緯가 『原州卞氏世譜(原州?氏世譜)』 更新步(庚申譜) 卷1 雜錄部(雜錄附)에 收錄되어 있다.

변안렬은 1351年에 恭愍王을 따라 高麗에 와서 歸化한 將帥로 武功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보다 2年 먼저 李成桂(李成桂)의 革命勢力에 依하여 죽음을 當하였는데, 그 理由는 「忠義가」의 創作動機에 잘 나타나 있다.

卽, 李芳遠(李芳遠)은 잔치를 베풀고 高麗 王室 追從者들의 마음을 떠보려 「何如歌(何如歌)」를 지어 그의 心中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鄭夢周는 「丹心歌(丹心歌)」로, 변안렬은 이 作品으로 高麗 王朝에 對한 忠節을 굽힐 수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한다.

傳하는 한역가는 “穴吾之胸洞如斗 貫以藁索長又長 前牽後引磨且? 任汝之爲吾不辭 有慾奪吾主此事吾不從”(穴奧地흉동여두 관이削杖雨裝 田犬後인마차알 임餘地位誤不辭 油浴脫誤駐車社오부종)이다. [13]

評價 [ 編輯 ]

大恩 便안렬의 評價를 위해서 高麗末을 살펴보면 禑王은 王氏가 아니라고 몰렸으며, 權力의 貪虐과 專橫을 일삼던 李仁任은 王權과 臣下들을 威脅하다가 李成桂에게 처형당하고, 急進改革가 鄭道傳은 李成桂의 힘을 빌어 易姓革命을 꿈꾸었다.

萬若, 변안렬이 抑鬱하게 殉節하지만 않았어도 高麗王朝는 繼續되었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高麗史에서 便안렬을 李成桂가 處刑했다고 記錄했다. [14]

大恩 변안렬은 李成桂와 함께 威化島에서 回軍 하였다. 이는 李成桂와 考慮를 바로세우려는 忠臣으로서 같은 뜻을 가졌지만 李成桂와 追求하는 目標는 달랐다. 그러나 변안렬은 禑王 復位 事件 에 휘말려 抑鬱하게 殉節했다.

朝鮮 開國後 太祖(李成桂)는 個國 二等功臣에 책록하였으며 便안렬의 家宅을 訪問하고 변안렬을 그리워하고 太祖는 便안렬의 後孫에게 벼슬을 여러次例 내리려 努力하였다. 그러나 便안렬의 後孫은 極口 辭讓하였으며, 太宗(11年)때가 돼서야 便안렬의 아들 變異를 上護軍(上護軍)에 任命되고 原從功臣(元從功臣)에 1等으로 책록韓 것이다. 변안렬은 高麗의 忠臣이었다. 李成桂에게 변안렬은 朝鮮을 開國하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가장 큰 山이었을 수도 있다. 大恩 변안렬은 高麗의 마지막 武臣으로 남음과 同時에 朝鮮을 開國하는 名分으로 남았다. [15]

변안렬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TV 드라마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高麗史』 卷126, 「列傳」39, 便안렬
  • 『高麗史節要』
  • 『太祖實錄』
  • 이성무·정구복·허홍식·고혜령·박종기·박홍갑·박한남·원창애, 『大恩 변안열의 生涯와 業績』, 지식산업사

같이 보기 [ 編輯 ]

參照 [ 編輯 ]

  1. 『高麗史』 卷126, 列傳39
  2. 《太祖實錄》 卷4, 太祖 2年(1393年) 7月 22日(乙丑) 3番째 記事
  3. 便안列傳에 收錄된 黃山大捷에는 便안렬의 專攻보다는 李成桂의 專攻이 擴大돼 있다. 專攻醫 評價는 同一하게 받았고 黃山大捷에서 便안렬은 都體察使(正1品)이고, 李成桂는 都巡察使(正2品)인데 指揮體系가 模糊하다. 이는 都體察使와 都巡察使의 品階는 高麗 時代에는 없었고, 朝鮮 成宗 代에 品階가 定해졌기 때문에 생긴 誤解이다. 또한 李成桂는 3도도巡察使(三道都巡察使)이다. 便안列傳에 描寫된 李成桂의 專攻은 獨自的인 專攻爲主로 나오는데, 指揮官이 決心하는 合同作戰의 內容이 없지만 黃山大捷은 倭寇의 말 1,600餘 疋을 鹵獲할 수 있을 程度의 全面全的인 大規模 戰鬪였음을 알 수 있다. 黃山大捷後 변안렬은 李成桂와 最高의 褒賞을 받았다. 변안열은 李成桂를 牽制하기 위한 禑王 側의 安全瓣으로도 볼 수 있다.
  4. <高麗史, 便안列傳>
  5. 著書 '大恩 便안렬의 生涯와 業績'<韓國歷史文化원>
  6. <<高麗史>> 卷118, 列傳31,照準
  7. <<考慮서>> 卷118, 列傳31, 照準
  8. '大恩 便안렬의 生涯와 業績'(韓國歷史文化硏究院, 2013)
  9. 實錄에 "昌王은 듣지 아니하였다." 라고 記錄 되었으나 實際 便안렬의 殉節 時期는 恭讓王의 在任 期間中 이었다.
  10. 이를 볼 때 禑王이 李成桂, 조민수, 변안렬을 殺害하려고 한 共通的인 理由를 알 수도 있다.
  11. 太上王(李成桂)李 변안렬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定宗實錄에 記錄되었다.
  12. 異色의 作品集, 《목은시고》 參照
  13. 「長時調(長時調)의 장르形成 過程 및 그 性格(Ⅰ)-‘不屈가(不屈歌)’의 內容(內容)을 中心으로-」(조규익, 『民族文化硏究』 第24號, 1991), 「辭說時調의 장르形成 再論」(김학성, 『大東文化硏究』 20輯, 성균관대학교大東文化硏究院, 1986),「大恩(大隱)의 不屈가보고(不屈歌補攷)」(황패강, 『國語國文學』 49·50, 1970), 「大恩(大隱) 便안렬(邊安烈)의 不屈가(不屈歌)」(황패강, 『檀國大學校論文集』 2, 1968)]
  14. " 이는 太祖(李成桂)로 하여금 鄭道傳을 내치는 要因中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以後 鄭道傳이 펼치는 政策은 太祖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結局 鄭道傳은 太祖가 16歲의 어린 方席을 世子로 冊封하는데 躊躇하지 않았던 것이다."
  15. 著書 '大恩 便안렬의 生涯와 業績'<韓國歷史文化원>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