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冒頓單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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冒頓單于
冒頓單于
탱리高度선우
在位 紀元前 209年-紀元前 174年
前任 두만선우
後任 路上선우
座도기왕
在位 ??-紀元前 209年
前任 ??
後任 鷄肉
身上情報
出生日 紀元前 234年頃
死亡日 紀元前 174年
王朝 匈奴
家門 연제氏
父親 두만선우
子女 路上선우

冒頓單于 ( 中國語 簡體字 : 冒??于 , 正體字 : 冒頓單于 , 병음 : Modu Chanyu ); 몽골語 : ????? ?????? modun ?an’juj , ? ~ 紀元前 174年 , 在位: 紀元前 209年 ~ 紀元前 174年 )는 紀元前 3世紀 말 ~ 紀元前 2世紀 초의 匈奴 鮮于 다.

묵돌이라는 이름은 투르크어 人 "바야투르(Bayatur, 勇敢한 者)"의 漢字 音借로 알려져 있다. [1] 아버지인 두만선우 (頭曼單于)와 葛藤을 빚다가 그를 除去하고 匈奴의 선우가 되었다. 以後 初寒戰爭 時期에 董狐 (東胡) · 月池 (月氏) · 精靈 (丁零) 等을 비롯한 周邊의 民族들을 征服하였고, 中國을 統一한 한나라 (漢)의 高弟 (高帝)와의 戰爭에서 勝利하였으며, 西域 의 累卵(樓蘭) 等 26個의 나라를 平定하여 匈奴의 勢力을 크게 强化하였다. 묵특선우 로도 알려져 있다.

선우가 되기까지 [ 編輯 ]

秦나라 秦始皇 은 萬里長城을 쌓고, 몽염 에 北方 守備를 맡겨 匈奴에 對備하게 하였다. 以後 秦始皇이 죽고, 몽염度 權力다툼의 渦中에서 죽게 되자, 匈奴의 指導者 두만 鮮于 오르도스 地域을 回復하고 다시 이 一帶를 누비게 된다. 묵돌은 그의 맏아들이다. 이때 두만에게는 後宮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두만은 묵돌 代身에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月池 에 人質로 보낸 後, 月池와 戰爭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돌은 月池에게 殺害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月池의 名馬를 훔쳐 匈奴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太子에게 주게 되어 있는 左舷王 의 爵位를 내리고, 1萬 名의 騎兵의 大將으로 삼았다. '勇敢한 者'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도 이와 關聯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묵돌의 地位는 安定的이지 않았다. 이에 묵돌은 叛亂을 圖謀하였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인 鳴鏑(鳴鏑)을 가지고, 自身의 麾下에 있는 1萬의 騎兵을 훈련시켰다. 訓鍊 동안 그는 自身이 어떤 標的을 向해 활을 쏘면 모두가 그 標的을 向해 활을 쏴야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어기고 쏘지 않는 者는 반드시 목을 베었다. 처음으로 그는 自身이 가지고 있던 名馬를 쏘았다. 몇몇 部下가 따라 쏘기를 躊躇하기에 목을 벤 後, 이番에는 自身의 蓮池(配偶者)를 向해 활을 쏘았다. 이番에도 몇몇 部下가 躊躇하기에 또 다시 목을 베었다. 마지막으로 사냥터에서 그는 自身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向해 활을 쏘았다. 1萬 名의 騎兵은 한 名도 躊躇 없이 두만을 向해 활을 쏘았고, 묵돌이 두만을 代身해 鮮于 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紀元前 209年 )

周邊 征服 [ 編輯 ]

예로부터 匈奴의 東方에는 董狐 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돌이 자리에 오른 後, 동호가 牽制의 움직임을 보인다. 董狐의 王은 처음 묵돌에게 使者를 보내 匈奴의 寶物인 千里馬를 要求하였다. 一部 臣下들이 反對하였지만 묵돌은 千里馬를 膳物로 주었다. 다시 董狐의 王은 묵돌의 愛妾 하나를 줄 것을 要求하였다. 이番에는 많은 臣下들이 反對하였으나 묵돌은 自身의 愛妾 또한 膳物로 주었다. 또 다시 桐호왕은 兩國의 境界에 있는 舊脫脂 [2] 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臣下가 묵돌에게 "寇奪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돌은 "土地는 國家의 根本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同好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王을 죽였다.

東邦의 동호를 무찌른 묵돌은 西方의 月池 도 征服하고, 南으로 한나라 와의 境界 地帶에 있는 累番 백양 을 倂合하여 이제 막 登場한 漢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한나라와의 戰爭 [ 編輯 ]

紀元前 202年 , 漢 高祖 乳房은 秦나라 崩壞 以後 혼란스럽던 中國을 統一하였다. 高調는 匈奴를 牽制하기 위해 側近인 漢王 新 을 北方에 配置하고 匈奴 討伐을 命한다. 하지만 漢王 신은 匈奴 討伐이 어렵다 생각하여 和平을 試圖했고, 以後 高祖가 이를 冊亡하자 匈奴로 投降해 버렸다.

漢王 神이 投降하자 묵돌은 그의 印度를 받아 臺(代)의 땅을 攻擊해 들어갔고, 現在의 山西省 東쪽의 平聲에 이르렀다. 漢 高調는 몇 次例 漢王 神과 匈奴의 軍隊를 무찌르고 平成까지 北上했으나, 이는 묵돌의 誘引策이었다. 묵돌은 漢나라 軍隊를 백登山 에서 7日間 包圍하였다( 백登山 包圍戰 ). 以後 한 高調는 묵돌의 蓮池(선우의 王妃)에게 膳物을 주어 包圍를 풀고 長安 으로 逃亡쳤다.

以後 高調는 유경 을 보내 다음의 事項을 約束하였다.

  1. 한 皇室의 女人을 선우의 臙脂로 바친다.
  2. 每年 韓銀 匈奴에게 솜, 緋緞, 술, 쌀 等을 바친다.
  3. 皇帝와 선우와의 사이에 兄弟의 盟約을 맺어 和親한다. [3]

漢王 新 以後에도 노관 이 乳房을 背信하고 匈奴로 들어간 바 있다.

以後 한 高祖가 죽고, 孝혜제 가 卽位하였다. 묵돌은 高祖의 皇后인 여태후 에게 "나도 獨身이고 그대도 獨身이니 잘해보자"라는 內容의 便紙를 보냈다. 여태후는 크게 怒하여 匈奴를 討伐하고자 하였으나, 周邊에서 모두 高祖의 例를 들어 挽留하여 討伐을 取消하였다.

月池 討伐과 死亡 [ 編輯 ]

묵돌 時節 月池 는 匈奴의 西方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當時 西域 나라들에게 影響力을 行使하고 있었다. 當時 우현왕이 漢나라와 小規模 戰爭을 벌인 이듬해인 紀元前 176年 (한나라의 孝文帝 時代), 묵돌과 孝文帝가 便紙를 交換하였다. 묵돌이 보낸 다음의 便紙에는 月池 討伐의 內容이 나타난다.

只今 작은 官吏들이 約束을 깨트렸기 때문에 [4] 그 罪를 물어 이番에 又玄王에게 그 罰로써 西쪽으로 月池를 討伐하게 하였소. 多幸히 하늘의 加護로 鍛鍊된 精銳 兵士와 强健한 말로써 月池를 쳐부수어 이를 모조리 죽이거나 降伏시키고 累卵, 오손, 호게 및 그 隣接 26個 國을 平定하여 이들을 모두 匈奴에 倂合하였소. 이리하여 各 遊牧民族은 合하여 한 집안이 되었고, 北쪽 地方은 이미 安定을 찾았소.
 
— 司馬遷, 《詐欺》, 匈奴熱戰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묵돌은 月池는 勿論, 西域의 여러 나라를 占領하여 北方 遊牧民族을 하나로 統合했던 것이다. (以後 月池는 大月氏와 素月地로 나뉜다.)

위 便紙를 받은 孝文帝는 答狀을 통해 又玄王을 責望하지 말 것을 付託했으며, 선우에게 옷 數十 疋을 膳物로 주었다. 便紙를 交換한 지 얼마 못 되어 묵돌은 죽고, 아들인 鷄肉이 卽位하여 노상 鮮于 라 稱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사와다 이사오 (2007). 《匈奴》. 아이필드.  
  2. 사와다 이사오, 앞의 冊, p40에 따르면 寇奪지는 "서로 境界를 接하고 있는 遊牧民族이 不必要한 싸움을 避하고자 各各 守備兵을 配置했던 中間地帶"이다.
  3. 사와다 이사오, 같은 冊, p.42
  4. 又玄王과 한나라 官吏들이 선우와 皇帝에 보고함 없이 戰鬪를 벌인 일을 뜻함
前任
두만 鮮于
匈奴 鮮于
紀元前 209年 ~ 紀元前 174年
後任
노상 鮮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