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濟世
(明濟世 1885 - 1964)는 韓國의 獨立運動家 兼 政治人이다. 本貫은
서촉
.
1948年
8月 15日
부터
1949年
11月 24日
까지 招待
審計院
院長을 지냈다. 1910年 韓日合邦 以後 光復團에서 活動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外國語學校를 卒業, 滿洲와 시베리아 各地를 轉轉하며 抗日運動을 하였다. 1919年 3?1運動 때 逮捕되어 5年間 服役하고 出獄後 不變團을 組織하여 活動했다. 光復 後 建國準備委員會 委員, 大韓獨立促成國民會 幹部, 招待
審計院長
等을 지냈으며, 50年 6?25戰爭 때 拉北되었다가 病死하였다.
平安北道
寧邊郡
(寧邊郡) 出生.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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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初期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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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年
大韓每日申報 平安北道知事腸을 지냈다.
[1]
1910年
8月
國權이 被奪되자 光復團에 加入, 活躍하다가 러시아로 건너갔다. 以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의 外國語學校를 卒業하고, 滿洲 各地와 시베리아 各地를 轉轉하며 抗日 獨立運動을 하였다. 그 뒤 歸國하여
1919年
3?1 萬歲 運動
때 總督府 日警에 逮捕되어 5年間 服役하고 出所했다. 出獄하자 1919年 3·1運動 때 歸國하여 손병희·權東鎭 等과 活動한 後 다시 中國으로 돌아가 上海 臨時政府에 參與했다.
[1]
以後 조선홍(趙宣弘) 等 30餘 名과 함께 톈진에서 不變團(不變團) 等을 組織하여 獨立運動을 繼續하였다.
政治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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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年
8月
光復 直後
여운형
의 建國準備委員會에 加擔하여 建準 委員이 되었으나
安在烘
等이 建準을 脫退할 때 그도 建準을 脫退하고, 臨政支持 立場을 보였다.
李承晩이 歸國하자
大韓獨立促成國民會
에 參與하여 督促 幹部가 되었다. 1945年 11月 臨時政府要人 還國 歡迎會에 參與하였고 1945年 12月 信託統治가 決定되자 信託統治 反對 立場에 섰다.
金九
가 모스크바 3上會談에 反撥, 强力한 反託運動을 推進하자
12月 30日
結成된 信託統治反對 國民總動員委員會 委員이 되었다.
[2]
以後 美蘇共同委員會 參與를 놓고 美蘇共委에 對한 支持 立場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金九
와
京橋莊
側과 한때 갈등하기도 했다. 美蘇共委에 參席한 그는 共委를 支持하지는 않았으나 對話 內容을 듣고
李承晩
,
金九
等에게 傳達하였다.
1947年
1月 26日
京橋莊
에서 열린 反託獨立鬪爭回 結成에 參與하고 反託鬪爭回 指導委員의 한사람으로 選出되었다.
最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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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年
4月
金九
,
김규식
이 南北協商에 參與하자 金九 等과 距離를 두고 5.10 單獨 總選擧를 支持하였다.
1948年
8月
政府樹立에 參與하여 初代 審計院長에 任命되었으나,
8月 20日
民族陣營强化委員會 常務委員에 選出되었다.
[3]
1950年
6·25戰爭
때 서울에 있다가 人民軍에 依해 拉北되었다가 1956年 7月 在北平和統一協議會의 執行委員과 常務委員을 지냈다.
[1]
以後 北韓에서 活動하다 北韓에서 病死하였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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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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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
나
다
明濟世 - Daum 百科事典
- ↑
아! 悲運의 歷史現場 京橋莊(1993, 白凡思想實踐運動聯合) 255
- ↑
韓國現代民族運動硏究 2(逆比韓國學硏究叢書 13)(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8)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