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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키노와능·노치노쓰키노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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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키勞와 陵·노치노쓰키노와 陵
月輪陵?後月輪陵
國家 일본의 기 日本
位置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野마구 이마쿠마老센잔情
開院日 1242年 1月 25日 (782年 前) ( 1242-01-25 )
種類 墓地
所有者 日本 宮內廳
墓地 수 25陵 5懷寵 9畝
座標 北緯 34° 58′ 38.3″ 東京 135° 46′ 55.2″  /  北緯 34.977306° 東京 135.782000°  / 34.977306; 135.782000

쓰키노와능 ( 日本語 : 月輪陵 ( つきのわのみささぎ ) 쓰키老와노미사詐欺 [ * ] 노치노쓰키노와능 ( 日本語 : 後月輪陵 ( のちのつきのわのみささぎ ) 노치노쓰키노와노미사사기 [ * ] )은 日本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野마구 에 位置한 天皇陵 이다.

沿革 [ 編輯 ]

헤이안 時代 에는 金賞天皇이 崩御하면 土葬을 하고 太上天皇이 崩御하면 化粧을 하는 것이 通例였다. 그런데 天皇이 在位 中에 崩御하는 것을 凶事(凶事)로 여기는 認識이 생기면서 大部分의 天皇이 讓位한 뒤 崩御하는 것이 慣例가 되었고 9世紀 中葉부터는 모든 天皇을 다 化粧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陵을 造成하는 것과는 別個로 化粧한 場所에 火葬銃(火葬塚)을 만들거나 재를 모아 懷寵(灰塚)을 만드는 慣行도 생겼다.

한便 헤이안 時代에는 陵과 社員이 剛하게 連結되어 있었다. 다이고 天皇 의 陵은 다이고지 北쪽에 造成되었고 管理도 政府 機構인 帝陵料가 아니라 다이高地에서 擔當했다. 遠征 이 行해질 때에는 寺院 안에 陵을 造成하는 慣行이 생겼고 後카쿠社 북릉 처럼 納骨堂으로 活用된 法華堂度 登場하게 되었다.

時調 天皇의 쓰키勞와 陵 [ 編輯 ]

兆큐의 난 이 調整의 敗北로 끝나면서 朝廷의 權威는 墜落했고 皇位 繼承도 가마쿠라 幕府 의 意向이 剛하게 反映되기 始作했다. 1242年 時調 天皇 이 急逝하자 센뉴地 에 土葬됐고 墓所로 活用하기 위해 신어당을 세웠다. 이것이 센뉴地 內에서 天皇의 葬禮를 치른 첫 番째 事例다. 센뉴지에서 葬禮를 치른 것은 時調 天皇의 遺詔를 따른 것이라고 傳해지지만 天皇의 外할아버지 救助 미치이에 가 센뉴지와 聯關이 있었고 天皇의 아버지 고호리카와 天皇 의 陵이 센뉴地 近處에 있었다는 點이 參酌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가마쿠라 時代 初期의 僧侶 슌兆 가 時調 天皇이 還生한 것이라는 戰勝까지 나오게 되었다.

葬禮와 懷寵의 運營 [ 編輯 ]

以後 日本 皇統은 至妙人桶 다이카쿠止痛 으로 쪼개지고 難보쿠初 時代 로 이어진다. 至妙人통이 輩出한 첫 番째 天皇인 고후카쿠社 天皇 의 陵은 法貨糖이 그 役割을 代身했는데 事實上 至妙人通의 影堂(?堂)이 되어 많은 至妙人桶 天皇들이 合掌되어 只今의 後카쿠社 북릉으로 發展하게 되었다.

北朝의 네 番째 天皇인 高코곤 天皇 도 崩御한 뒤 센뉴지에서 葬禮를 치르고 法華堂에 納骨됐다. 이때 官은 明紬를 쓰지 않고 僧侶들만 모여서 佛敎式으로 葬禮를 進行했다. 以後 天皇의 葬禮는 센뉴지가 獨占하여 以後의 天皇들도 모두 法華堂에 納骨되는 것이 通例가 되었다. 그 中에서도 高쓰値미카도 天皇 부터 고요제이 天皇 까지 다섯 名의 天皇은 懷寵度 만들어졌다.

近世의 天皇陵 [ 編輯 ]

고코墓 天皇 부터 닌코 天皇 까지는 化粧하는 意識만 擧行하고 實際 化粧은 하지 않은 채 모두 센뉴지에 土葬을 했다. 1620年 고요제이 天皇의 國母 가주지 하루코 가 逝去하자 그 墓를 센뉴지에 만든 것을 契機로 皇族의 墓도 센뉴지에 造成되었다. 이로써 센뉴지는 名實相符 皇室의 陵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化粧을 하지 않고 土葬을 하게 된 理由는 아오치 노리모토 가 쓴 『可觀小說』에 記載된 오쿠 하치베에 의 이야기가 有名하지만 野史에 不過해 實際 歷史인지 疑心을 받고 있다. 그 外에도 에도 幕府 儒敎 를 普及하여 佛敎式 化粧이 進行되지 못했다거나 金賞天皇이 崩御하면 土葬을 하는 옛 事例를 되살렸다는 說도 있다.

고메이 天皇 이 崩御하자 神佛 分離 의 影響에 따라 다시 山陵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덴지 天皇 의 陵 近處에 造成하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센뉴지가 反對했고 結局 센뉴地 近處에 桐山陵을 만드는 것으로 決定됐다. 이 論難으로 고메이 天皇의 葬禮는 崩御한 뒤 1個月이 지나서야 겨우 擧行됐다. 葬禮는 火葬 意識도 省略하고 完全히 土葬을 했으며 이로써 近世 天皇陵을 造成하는 例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陵墓 [ 編輯 ]

5基의 懷寵 中 고요제이 天皇의 懷寵을 除外한 4期는 나무를 심어 옆으로 줄세워져 있다. 심어져 있는 나무는 비쭈기나무 지만 過去에는 다른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고요제이 天皇의 懷寵은 石造9層塔이 造成되어 있는데 무로마치 時代 의 記錄에는 當時에만 해도 陵과 懷寵의 區別이 明確하지 않아 時調 天皇의 陵을 참고삼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는 推測이 남아 있다.

時調 天皇의 陵을 除外한 센뉴地 近處에 造成된 天皇陵은 에도 時代 에 在位했던 모든 天皇들의 陵이다. 天皇陵은 全部 石造9層塔으로 되어 있으며 區劃은 돌冊으로 하고 있고 正方形으로 區分되어 있다. 一部는 돌冊에 돌門이 있다.

16名의 餘원 과 4名의 親黃의 陵墓는 無縫塔 或은 寶篋印塔을 세웠다. 社네히吐 親王 의 무덤이 가장 먼저 造成되었지만 連帶는 不明이며 無縫塔을 왜 세웠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여원은 皇后인지 後宮인지에 따라 各各 陵과 墓를 造成했고 그 規模도 달랐다. 元來는 無縫塔을 세웠지만 도쿠가와 마사코 의 무덤에 처음으로 寶篋印塔을 세웠다. 幕府가 調整에 覺書를 보낸 記錄이 있기에 쇼군가 出身인 그의 立場이 反映된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마사코 以後에 造成된 餘원의 무덤은 다시 無縫塔이 세워졌지만 고노에 고레코 의 무덤에 다시 寶篋印塔이 造成됐다. 도쿠가와 마사코의 例를 흉내냈다는 所聞이 當時에도 있었는데 以後 餘원의 무덤에는 모두 寶篋印塔을 세우기 始作했다. 다만 도쿠가와 마사코와 달리 다른 寶篋印塔에는 돌冊을 두지 않는 等 格의 差異를 두었다.

요시코 內親王 의 무덤만 7層塔을 세웠는데 이는 1870年(메이지 3年)에 새로 만든 것이고 元來는 寶篋印塔이 있었다. 寶篋印塔을 세울 當時부터 調整은 내친왕의 무덤을 도쿠가와 마사코와 同格의 禮로 해줄 것을 幕府에 要請했고 幕不渡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19世紀에는 세 名의 親王의 무덤이 造成되었는데 모두 皇后의 子息들이지만 세워진 寶篋印塔은 餘원의 寶篋印塔보다는 작다.

피장자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