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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쿠라 新派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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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쿠라 新派치
永倉 新八
사망 2년 전인 1913년(다이쇼 2년)에 삿포로(札幌)에서 촬영한 사진(앞줄 가운데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인물). 홋카이도개척기념관 소장.
死亡 2年 前인 1913年(다이쇼 2年)에 삿포로(札幌)에서 撮影한 寫眞(앞줄 가운데 지팡이를 들고 있는 人物). 홋카이도開拓記念館 所藏.
無事 情報
時代 막말 ~ 다이쇼 時代
出生 덴抛 10年 陰曆 4月 11日 ( 1839年 5月 23日 )
死亡 다이쇼 4年( 1915年 ) 1月 5日 (享年 75歲)
改名 나가쿠라 新派치(長倉新八 → 永倉新八) → 스기무라 요시에(杉村義衛)
別名 휘: 노리유키(範之)
別名: 街武臣(がむしん)
마쓰마에번 燔師
主君 마쓰다이라 伽陀하루 (松平容大)
氏族 나가쿠라 氏 스기무라 氏
父母 아버지: 나가쿠라 干支 (長倉勘次)
特技事項 曾孫: 스기무라 에츠로 (杉村??), 스기무라 主로 (杉村重?)

나가쿠라 新派치 ( 日本語 : 永倉 新八 )는 막말 無事 이다. 區 姓은 나가쿠라( 長倉 ).

마쓰마에 番을 脫番 後, 신선조 에 入隊, 2番帶 組長 및 擊劍 師範 을 맡았다. 메이지 時期에는 스기무라 요시에 (杉村義衛)로 改名하고 쓰키街打錠 에서 擊劍事犯을 지냈다.

生涯 [ 編輯 ]

마쓰마에번 에도 조후(江戶定府) 道理쓰기驛(150席)을 맡고 있던 나가쿠라 干支(長倉堪次)의 둘째 아들로, 番의 우에야시키(上屋敷) [1] 에서 태어났다. 高카(弘化) 3年( 1846年 ), 오카다 도시아키라(岡田利章, 3代 오카다 駐마쓰岡田十松)의 信徒無念類 劍術 圖章인 擊劍館에 入門한다. 4年 뒤에 스승이 死亡하고 오카다 죠고에몬(岡田助右衛門)에게서 배워 15歲에 基里加味(切紙)가 되었고, 안세이 (安政) 3年( 1856年 ) 18歲에 혼모쿠로쿠(本目錄)가 되었다. 겐푸쿠를 올리고 新派치라고 稱하게 되었다.

劍術에 心醉한 나가쿠라 新派치는 겐푸쿠를 올린 해에 番을 떠나 떠돌며, 나가쿠라 性을 稱하고 에도 魂쵸(本町) 가메社와 鄭(??町)의 有利모토 슈盞(百合元昇三)의 道場에서 劍을 배운다. 그 後, 理致카와 禹하치로(市川宇八?, 後날의 下가 祈禱芳賀宜道)와 함께 劍術 遂行의 旅行을 떠나게 되고, 에도로 돌아온 뒤에는 심형도類(心形刀流) 이바 히데나리(伊庭秀業)의 文人이던 쓰보우치 슈메(坪?主馬)의 눈에 들어 圖章 師範 代理를 맡게 되었고, 그곳에서 當時 門下生으로 있던(훗날 新센龜尾에 入隊해 나가쿠라와 行動을 같이하게 되는) 시마다 가이(島田魁)와도 알게 되었다. 그 뒤, 後날 新센龜尾 의 局長이 되는 곤도 이사미 의 天然이심類(理心流) 圖章 示威館(試衛館)의 食客이 된다.

以後 나가쿠라 新派치는 곤도 等과 함께 老視龜尾(浪士組)에 加擔하였고, 新센龜尾 結成 뒤에는 2番帶 助長에 國內(局內) 擊劍 事犯을 맡는 等 重役에 있었다. 겐지(元治) 元年 ( 1864年 ) 新센龜尾의 無名(武名)을 天下에 알린 이케다野 事件 에서 나가쿠라 新派치는 곤도나 오키打 所持 (1番帶 助長) 等과 함께 이케다野에 突入, 오키他家 氣絶하고 도도 헤이스케(藤堂平助, 8番帶 助長)가 負傷으로 離脫, 自身도 왼손 엄지에 깊은 傷處를 입은 渦中에도 魴魚灸가 너덜거리고 칼이 부러질 때까지 奮戰하였다.

곤도 이사미의 行動이 차츰 獨斷的으로 흘러가는 것을 念慮한 나가쿠라는 사이토 하지메 (3番帶 助長), 하라다 社노스케(原田左之助, 10番帶 助長), 時마다 하지메, 오제키 마사이치로(尾?雅一?), 가쓰야마 다케하치로(葛山武八?)와 함께 脫退를 무릅쓰고 '곤도의 飛行(非行) 5個 組'를 아이즈番 酒 · 마쓰다이라 伽陀모리 에 呼訴하는 等 곤도 이사미 · 히지카타 度時調 (신선조 部長)와의 路線 對立을 보였다. 以後 幕府의 名으로 미와마리龜尾(見廻組)의 格70爻(俵) 산닌부치(三人扶持, 교토 미와마리龜尾 隊員과 同格의 地位)로 세워졌고, 아부라코地 事件 (油小路事件)에서는 하라다 等과 함께 稿料에지(御陵衛士)를 暗殺하였다.

게이오 (慶應) 4年( 1868年 ) 도바 후시미 戰鬪에서 나가쿠라 新派치는 決死隊를 募集해 칼 한 자루만 들고 敵中에 突擊하는 大膽함을 보였지만, 에도로 물러난 뒤 新센龜尾가 甲양진무臺(甲陽?撫隊)로 改編되고 新政府軍과 고슈(甲州) 가쓰누마(勝沼)에서 벌인 戰鬪에서 敗北하였고, 에도에 돌아온 後 곤도 等과도 訣別하고 만다. 그 後, 歲이에이타이(靖兵隊, 세이호타이靖共隊)를 結成해 간토 北部 地域에서 抗戰하였지만, 요네자와番 에 머무르다 아이즈 番移 降伏했다는 消息을 듣고 에도로 돌아왔고, 예전에 屬했던 마쓰마에 番의 燔師(150席)로 參加하는 것이 許諾되었다. 1871年 ( 메이지 4年), 마쓰마에 番의 가로였던 시모拘泥 都市値로(下?東七?)의 仲裁로 番의 意思 스기무라 게이案(衫村介庵)의 딸 기누와 結婚해, 게이안의 데릴사위 兼 養子가 되어 마쓰마에로 갔다.

1873年 에 나가쿠라 新派치는 丈人이자 養아버지인 게이안으로부터 스기무라 家門의 家督을 相續받아 스기무라 하루히(衫村治備, 나중에 요시에義衛)로 改名하고, 이어 홋카이도 (北海道)의 오타루 로 移住하였으며, 警察 官僚였던 쓰키伽陀 기요시(月形潔)의 招聘으로 1882年 (메이지 15年)부터 4年間 街바토 집치감(樺?集治監, 刑務所)의 劍術 事犯을 맡아 看守들에게 劍術을 指導하였다. [2] 退職 後에는 도쿄 우시고메 區 (牛?區)에 劍術 道場을 열었는데, 1899年 (메이지 32年) 아내와 子息들이 오타루 市內에 藥局을 열게 되어 다시 오타루로 왔고, 1905年 (메이지 38年) 오타루 미도리 1쵸메(옛 오타루 少年科學館 附近)로 移徙했다가, 1909年 (메이지 42年) 7月에 다시 오타루 하나條노 情에 살았고, 도후쿠 帝國大學(東北帝國大學) 農科大學(홋카이도 大學의 前身)에서 劍道部 指導를 맡았다.

1915年 ( 다이쇼 4年) 1月 5日, 蟲齒 가 原因이 된 骨膜炎 , 敗血症 이 發病해 오타루에서 死亡하였다. 享年 77歲였다. 墓所는 오타루 市 中央墓地와 삿포로 時 社토즈카 墓園(里塚?園), 도쿄都 其他 舊 多키盧哥와(?野川)의 슈토쿠地(??寺) 敬畏墓地(境外墓地)의 세 곳이 있다. 社토즈카 墓園의 나가쿠라 新派치 墓는 碑石의 글字를 新政府의 侯爵이 된 하치스카 마사아키(蜂須賀正韶)가 썼으며, 슈토쿠지는 生前 나가쿠라와 서로 不和를 겪었던 곤도 이사미의 보리社이기도 하다.

著書 [ 編輯 ]

나가쿠라 新派치는 메이지 時代에 《로시분큐호코쿠키시》(浪士文久報?記事), 《일곱 個의 傷處 자국》(七ケ所手負場所?ス) 等을 著述하였는데, 當時 오타루 新聞(小樽新聞)의 記者였던 基시마 지카라(吉島力)의 取材에도 協力해 《新센龜尾 젠마쓰키》(新選組?末記)를 남겼다. 이들 著書는 單純히 邪惡한 殺人鬼 劍客 集團으로만 알려져 있었던 에도 幕府 末期 新센龜尾의 이미지를 전환시켜 新센龜尾에 對한 再評價가 이루어지게 하는 契機를 낳았다.

일화 [ 編輯 ]

  • 나가쿠라 新派치는 劍術로 新센龜尾 助長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實力者였으며, 아베 主로(阿部十?)는 後날 「첫 番째가 나가쿠라, 두 番째가 오키打, 세 番째가 사이토였다」고 述懷했다. 宂費檢(龍飛?)이라 불리는, 下端 姿勢에서 敵의 칼을 쳐 위로 걷어 올리면서 베어 내리는 技術이 나가쿠라 新破치의 長技였다고 한다.
  • 豬突的인 性格을 가지고 있어, 日本語로 '豬突的이다'라는 뜻의 歌舞샤라(我武者羅)와 이름 新派치(新八)를 합친 街武臣(がむしん)이라는 別稱이 있었다고 한다.
  • 곤도 이사미에게 肅淸된 前任 新센龜尾 國葬 세리자와 카모(芹?鴨)와는 같은 信徒無念類 免許開戰(免許皆?)으로써 親한 사이였다고 한다.
  • 아이즈 番에 곤도의 飛行 5個 條를 呼訴했을 때, 나가쿠라 等의 主張은 곤도 이사미를 '局長'으로써 認定은 하지만 自身들은 그의 '家臣'이 아니라 '同志'라는 主張이었다. 곤도가 勢力을 키운 原因으로써는 肅淸된 5番帶 助長 다케다 幹流사이(武田?柳?)로, 隊員들은 家神으로써 國葬을 崇慕하고 있다고 主張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도바 후시미 戰鬪 뒤 오사카(大坂)나 에도 等地에서는 히지카타 토시條가 없을 때는 大腸 代理(이때 곤도 이사미는 負傷을 입었고 히지카타가 實質的인 大將을 맡고 있었다)를 맡는 等 히지카타의 信賴度 두터웠다.
  • 新센龜尾 時節 遊廓 시마바라(島原)의 街메야(?屋)의 게이샤 高쓰네(小常)를 아내로 두고 있었는데 딸 貽笑코(磯子)를 낳은 뒤에 死別하였다. 이소코는 나가쿠라가 교토를 떠날 무렵 高쓰네의 언니에게 맡겨졌고, 1900年(메이지 33年)에 간사이(?西)에서 女俳優 오카미 高카메(尾上小?)가 되어, 後날 再會할 수 있었다고 한다.
  • 1894年 (메이지 27年) 淸日戰爭 이 勃發하자 當時 55歲였던 나가쿠라 新派치는 발도臺(?刀隊)로 志願했지만, 「마음만 받겠다」며 거절당했다. 이에 對해 나가쿠라는 「하긴 옛 新센龜尾의 손을 빌려서야 사쓰마의 體面도 서지 않는다는 거겠지?」라며 自嘲했다고 한다.
  • 晩年에는 映畫 를 좋아해서 孫子를 데리고 映畫館에 다녔다고 하며, 그 感懷를 「곤도나 히지카타는 젊은 나이에 죽어버렸지만 나는 이렇게 오래 살아서 이런 경이로움도 보게 되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映畫館 出口에서 現地 야쿠자와 싸울 뻔 했는데, 나가쿠라가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자 야쿠자들은 그만 氣가 죽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3] (맨손으로 싸웠다거나 지팡이로 또는 길가의 나무토막을 주워 싸웠다는 說도 있다).
  • 나가쿠라 新파치가 살았던 오타루 하나條노 正義 집터는 現在의 日本 홋카이도 오타루 市廳 玄關 왼쪽의 오타루 聯合 衛生 組合 事務室 자리에 있었다.
  • 몇 남지 않은 옛 新센龜尾 生存者로써 新센龜尾의 行跡을 알리는데 힘썼고, 新센龜尾에 好意的이던 마쓰모토 料準(松本良順)과 함께 도쿄 道 其他 舊(北?)의 多키盧哥와(?野川)에 곤도와 히지카타의 墓를 세웠다. 이곳이 슈토쿠地 敬畏墓地(??寺境外墓地)이다.
  • 新센龜尾로 勤務하던 時節에 입은 傷處의 由來를 《일곱 군데의 傷處》(七ケ所手負場所?ス)라는 題目으로 冊으로 썼다. 晩年에 술에 醉해서는 훈도시 바람에 銃劍을 두드리며 「나라를 위해 일한 몸이다. 내 矜持다」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 「竹島 소리를 듣지 않으면 밥이 목으로 안 넘어간다」, 「나는 劍術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며, 晩年까지 劍術 練習과 指導에 힘을 쏟았다.
  • 늘그막에 나가쿠라의 所聞을 들은 도후쿠 帝國大學 農科大學의 劍道部員이 나가쿠라에게 劍術 地圖를 依賴했는데, 나가쿠라의 家族들은 모두 高齡을 理由로 말렸지만 나가쿠라는 「姿勢만 가르치면 된다」며 指導하러 나섰고, 練習 中에 몸을 다쳐서 馬車에 실려 學生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各州 [ 編輯 ]

  1. 에도 詩타야(下谷) 샤미센보리(三味線堀)로 只今의 日本 도쿄都 (東京都) 다이토구 (臺東區) 고지마(小島) 2쵸메에 位置해 있었다.
  2. 街바토 집치감 建物은 1972年부터 쓰키伽陀 街바토 博物館(月形樺?博物館)으로 쓰이고 있다.
  3. 여러 名의 不良輩를 노려보기만 하는 것으로 쫓아버렸다는 이야기는 小說家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 1923~1990)가 나가쿠라의 孫子인 스기무라 미치오(杉村道男)와의 인터뷰에서 取材한 內容이다(이케나미 쇼타로 저 《센고쿠와 막말》 가도카와 書店, 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