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력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무력
金武力
金官伽倻 王子
父王 구형왕
이름
武力(武力)
別號 武力地(武力知)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出生地 未詳
死亡日 未詳
死亡地 未詳
國籍 金官伽倻 新羅
性別 男性
王朝 金官伽倻
家門 金氏
兄弟姊妹 露蹤 , 武德

김무력 (金武力, ?~?)은 駕洛國 의 王族이자 金官伽倻 의 王子였다. 6世紀 中盤 진흥왕 때의 將軍이다. 新羅 김유신 將軍의 祖父이며, 駕洛國 의 마지막 第10代 王인 구형왕 의 3男 中 둘째 아들이다. 12世紀에 出刊된 三國史記 에 김무력의 生涯에 對한 內容이 실려 있다. [1] 父王 구형왕 을 따라 眞骨 에 編入되었으며 管山城 戰鬪 에 參加하여 백제 聖王 의 목을 베는 成果를 올렸다. 官職은 角干 에 이르렀다. 첫 夫人 朴氏는 법흥왕 보도부인 의 동생으로 법흥왕 의 東西였다. 다른 이름은 솔우공이다. [2]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背景 [ 編輯 ]

김무력은 駕洛國 의 第12代 王인 구형왕 (仇衡王) 或은 구해왕 (仇亥王)의 次男( 三國史記 에는 三南)으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위로 兄 世宗과 동생 無得이 있었고, 15歲 되던 532年 9月 新羅 法興王 과의 戰爭에서 敗하자 구형왕은 나라를 新羅 에 讓與하고, 代身 新羅의 眞骨 貴族으로 編入되었다. 아들 世宗角干 , 武力, 無得 3兄弟는 競走에서 活躍했는데, 特히 진흥왕 때 名匠 이사부 (異斯夫)를 도와 北方經略에 參與하였다.

그런데 다른 說에 依하면 그가 구형왕의 아들이 아니라 孫子 라는 說도 있다. [2]

" 三國遺事 駕洛國記에는 문무왕 이 (外三寸인) 김유신 의 祖上인, 駕洛國의 金首露王 祭祀에 關한 詔書를 내린 事實을 傳하고 있다

駕洛國 始祖의 9世孫인 구형왕이 新羅에 降伏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인 
世宗角干
의 아들이 솔우공(김무력)이고, 그 아들인 서운(
김서현
)의 딸 
문명왕후
께서 나를 낳으셨다.
[2]
 때문에 時調人 
수로왕
은 나에게는 15代 組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墓가 아직 남아 있으니 宗廟에 合祀하여 祭祀를 繼續하도록 하라.
[2]

三國遺事 의 駕洛國記에 실린 문무왕 의 特別 敎書, 駕洛國 太祖 太祖 金首露王 新羅 王室의 宗廟에 合祀하도록 하라는 命令에 依하면 구형왕 - 世宗 - 솔우공(武力) - 김서현 - 문명왕후 - 문무왕 自身으로 稱하고 있다. 三國遺事에 실린 文武王의 말에 依하면 그는 구형왕의 孫子가 되고, 이는 普通 구형왕의 아들로 여겨지는 通說과는 相反된다.

구형왕 新羅 에 投降한 뒤 그도 眞骨 貴族으로 編入되었는데, 그는 軍人이 되어 新羅 眞興王 때 名匠 이사부 (異斯夫)의 副官으로 北方 經略에 參與하였다.

管山城 戰鬪 [ 編輯 ]

當時 百濟 聖王 이 卽位하여 538年 都邑을 熊津에서 私費(扶餘)로 옮기고 新羅 와 和親하여 백제 中興을 꾀하고 있었다. 聖王은 551年 漢江流域을 되찿으려고 高句麗 를 攻擊하여 沃川地方에서 漢江流域에 이르는 6個軍을 奪還했다. 그러나 이때 新羅는 困境에 處한 高句麗와 同盟하여 백제가 奪還한 6個 軍을 모두 빼앗아 이곳에 新株 (新州)를 設置했으며, 武力은 이때 戰場에서 活躍의 功勞로 사돌部이었던 김무력이 迊飡 으로 올라서고신주 도독이 되었다.

百濟의 聖王은 이에 對한 報復으로 554年 大伽倻 와 聯合하여 新羅 管山城 (管山城:忠北 沃川)을 攻擊했다. 當時 管山城에서는 新羅의 君主 우덕 (于德)李 城을 지키고 있었으나 百濟軍의 攻擊에 苦戰을 면치 못하였다. 마침 神主에 있던 武力은 自身이 거느린 兵力을 이끌고 急遽 出戰하여 그해 7月 聖王을 只今의 大田 東區 직동(皮骨)에 있었던 勞苦山城에서 戰士시켰으며, 4名의 佐平을 慘殺하고 兵士 2萬9千餘名의 受給을 베는 大勝을 거두어 三國統一 의 基礎를 다졌다.

末年 [ 編輯 ]

그 後 新株성주와 神主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냈으며, 이러한 발板으로 김무력의 漢江流域 爭取와 管山城 戰鬪의 勝利는 新羅 의 國力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武力 亦是 新興 武裝으로서의 발板을 確保하게 되어 新羅 社會의 最高위 人物로 浮上되었다. 두 番의 結婚 모두 新羅 王室 女性과 하였는데, 첫 夫人 朴氏는 新羅 法興王非 보도부인 朴氏 의 女同生이다. 뒤에 醉한 두 番째 夫人 아양弓奏 진흥왕 사도王后 의 딸이었다.

事後 [ 編輯 ]

慶尙南道 梁山郡 하북면 지산리 靈鷲山 稜線 아래에 埋葬되었다. 每年 10月에 그의 時祭가 擧行되고 있다.

김무력 墓 盜掘 事件 [ 編輯 ]

1990年 代 以後 慶尙南道 梁山에 있던 그의 墓는 伽倻國의 王子이자 金庾信의 祖父 墓로 外部에 알려지면서 盜掘과 受難의 對象이 되었다. 1999年 에 두 次例에 걸쳐 2007年 그의 墓가 세 番째로 盜掘되었다. [3] [4] 이 盜掘에서 副葬品이 多數 사라진 것으로 推定된다.

2007年 5月 3日 金海金氏 種津灰 量産支會에 따르면 2007年 4月 中旬 梁山市 하북면 지산리 靈鷲山 기슭에 位置한 金 共의 封墳 頂上 部分이 파헤쳐진 뒤 다시 메워진 事實을 確認했다. 金 共의 墓 頂上에서 왼쪽 部分의 잔디가 가로 2m 세로 1m로 반듯하게 잘라진 뒤 元來대로 덮여 있으며 墓의 왼쪽 邊두리 소나무 近處에는 미처 되메우地 못한 흙과 숯덩이들이 버려져 있는 等 專門 盜掘꾼의 所行으로 斟酌 [3] [4] 되나 犯人은 잡지 못했다.

宗親會 側은 '지난 99年 2次 盜掘 事件 때 副葬品이 없어진 것으로 確認돼 이番 盜掘 事件과 關聯해 警察이나 市廳 等 關係當局에 申告하지 않았다. 김무력의 墓의 잦은 受難은 金 공이 駕洛國 마지막 王의 아들인데다 金庾信 將軍의 祖父墓라는 事實이 알려지면서 盜掘꾼의 標的이 됐다. [3] 最初 盜掘時期는 正確하지 않지만 解放 後 量産地域의 機關長으로 온 金海 金氏 後孫이 駕洛國 王손임을 기리기 위해 碑石에 '王陵'이라고 表記하면서 盜掘이 잦아졌다 [3] '고 한다. 宗親會 側은 99年 2次 盜掘이 되자 '駕洛國 王子 新羅 角干 김무력 공 至妙'로 碑石을 고쳤으나 이番에 또 다시 盜掘事件이 發生했다. 宗親會 김종완 量産支會 事務局長은 "盜掘꾼에 依해 세 番째 墓所가 파헤쳐져 祖上을 볼 面目이 없다"며 "史跡地 指定 等 文化財 當局의 措置가 必要하다 [3] "고 말했다.

家計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Lee ed. (1983), Lee ed. (1993).
  2. 歷史 人物 編纂 委員會 지음, 不滅의 歲月: 김유신 (出版社 歷史디딤돌 | 2009) 188
  3. [ 깨진 링크 ([https://web.archive.org/web/*/http://www.idomin.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17979 過去 內容 찾기)] [梁山]駕洛國 마지막 王子墓 ' 또' 盜掘]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code=0300&gbn=v&key=20070503.22007213957{{ Archived 2007年 5月 5日 - 웨이백 머신

參考 文獻 [ 編輯 ]

  • 歷史 人物 編纂 委員會 지음, <<不滅의 歲月: 김유신>> (出版社 歷史디딤돌 | 2009)
  • 김시우, <<駕洛國 千五百年 잠깨다>> (駕洛國私的開發硏究院, 1995)
  • 이홍직 ed. (1983). 새國語辭典
  • 이일청 ed. (1993). 人命國師大辭典
  • 김시우 ed. (1995). 駕洛國 千五百年 잠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