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식 (189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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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식 (金明植, 1890年 9月 26日 ~ 1943年 4月 11日 )은 日帝强占期 社會主義 系列에서 活動한 社會主義 獨立運動家이다. 雅號는 松山(松山)이다.

生涯 [ 編輯 ]

濟州道 의 名門家에서 出生했다. 해미현감 김응전(金膺銓)의 孫子이며 정의縣監 김문주(金汶株)의 長男이다. 日本 에 留學하여 와세다 大學校 哲學과 學事 學位하였으며, 도쿄 留學 期間 中 아시아 地域의 被壓迫 國家 靑年들로 構成된 祕密結社 신아同盟團 에서 活動했다. 신아同盟團은 以後 社會革命黨 으로 改編되었고, 歸國한 김명식은 社會革命黨과 상하이派 高麗共産黨 에서 活動하며 勞動運動 團體인 朝鮮勞動共濟會 創立에 參加했다.

상하이派 는 民族主義 勢力과의 廣範圍한 連帶를 꾀하는 統一戰線 路線을 걷다가, 1922年 김윤식 의 死亡을 契機로 김윤식 社會葬을 推進한 장덕수 의 右派와 이를 反對한 김명식, 유진희 의 左派로 分離되었다. 동아일보 記者였던 김명식은 상하이派 左派를 이끌고 基督敎 靑年 勢力과 合作하여 新生活史를 設立하고, 社會主義 大衆雜誌 《新生活》을 發行하기 始作했다. 社長은 3·1 運動 民族代表 33人 中 한 사람인 朴熙道가 맡았고, 김명식은 主筆이 되었다.

1922年 11月 發生한 新生活 筆禍 事件 으로 逮捕된 김명식은 懲役 2年型을 言渡 받아 咸興刑務所 에서 服役하다가 健康이 惡化되어 1923年 出獄했다. 이때 拷問과 收監 生活로 健康을 傷한 그는 平生 障礙人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1927年 左右合作으로 結成된 民族運動 團體 新幹會 의 濟州支會長을 맡았으며 1930年 에는 오사카市 에서 朝鮮人 勞動運動을 指導한 嫌疑로 收監된 바 있다. 1930年代 後半에 漢字語를 廢棄處分하고 無條件 ‘純 우리말’로 代替하려던 한글 運動者들의 行動을 “파시즘을 彷彿케 하는 國粹主義的 行動이며 이미 漢字語 使用에 익숙해진 朝鮮 民衆에 對한 外部로부터의 文化的 暴力”이라고 規定하며, “아무리 ‘凍死’(動詞)를 ‘움직씨’로 代替瑕疵 해도 千餘 年 동안 漢字를 써온 朝鮮 民衆에게는 그래도 ‘凍死’가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主張했다. [1] 以後 轉向하여 日帝 强占期 末葉에는 《 東洋地廣 》과 《趙匡》을 통해 多數의 親日 評論을 發表하기도 했다. 1943年 病死했다.

平生을 社會主義者로서 民族解放을 위해 日帝와 職?間接的인 鬪爭으로 一貫한 그가 남긴 마지막 遺言은 “日本이 亡할 때까지 死亡申告를 하지 마라”였다고 한다.

1999年 建國訓長 愛族章 이 追敍되었다.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박노자 (2007). 《우리가 몰랐던 東아시아》. 한겨레出版. 14~15쪽. ISBN   978-89-8431-224-1 . 例를 들어 共産 系列의 名 論客 김명식은 이미 1930年代 後半에 漢字語를 廢棄處分하고 無條件 ‘純 우리말’로 代替하려던 한글 運動者들의 行動을 “파시즘을 彷彿케 하는 國粹主義的 行動이며 이미 漢字語 使用에 익숙해진 朝鮮 民衆에 對한 外部로부터의 文化的 暴力”이라고 規定하며, “아무리 ‘凍死’(動詞)를 ‘움직씨’로 代替瑕疵 해도 千餘 年 동안 漢字를 써온 朝鮮 民衆에게는 그래도 ‘凍死’가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主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