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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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昀 ( 中國語 : 紀? , 1724年 1805年 )은 淸나라의 文人으로 者는 효람 (曉嵐), 號는 춘범 (春帆)이다.

生涯 [ 編輯 ]

紀昀은 『四庫全書(四庫全書)』를 責任 編輯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乾隆 33年(1768) 査頓 老見憎(盧見曾)을 庇護하다 削奪官職당하고 우루무치(烏魯木齊)로 流配되었다. 北京에서 우루무치로 流配된 紀昀은 마음이 便치 않았고, 이때부터 世上萬事가 모두 定해져 있다는 運命論을 믿게 되었다.

紀昀은 晩年에 算數 電源으로 돌아가 生活하기보다는 오히려 朝廷에 남아서 編纂活動을 繼續했다. 그는 우루무치에서의 生活을 오히려 轉禍爲福의 機會로 삼았고, 다시 朝廷에 돌아왔을 때는 改嫁한 兒女子의 氣分이었으며, 또한 自身의 身世가 冊 사이에 낀 좀벌레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의 폭넓은 知識이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고, 또한 夭折한 아들과 같은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使命感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皇帝의 뜻에 따라 ≪四庫全書≫를 編纂했고, 自身의 該博한 知識과 폭넓은 經驗을 바탕으로 ≪열미초당필기≫를 지어 社會의 非理를 告發하며, 나이 든 文人이자 學者로서 한 瞬間의 熱情이나 사랑보다는 人生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道理를 說明했던 것이다.

루쉰 은 紀昀을 일컬어 “後人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의 자리를 꿰찰 수 없었다”고 好評했다.

열미초당필기 [ 編輯 ]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는 紀昀이 晩年에 보고 들었던 것을 回想하여 쓴 筆記體 小說로, 오늘날 그를 文人으로 남게 한 作品이다. 모두 1244가지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여우와 鬼神 이야기가 半數 以上을 차지하고 있다. 紀昀은 여우와 鬼神에 對한 自身의 見解를 밝히면서 이들의 몸을 빌려 管理 世界의 不淨腐敗와 賂物收受, 財物 앞에서 벌벌 떠는 人間의 악착스러움, 封建 禮敎 아래에서 犧牲되어 가는 奴婢와 兒女子, 다른 사람을 죽여 自身의 배를 채우거나 가난에 쪼들려 子息과 아내를 파는 百姓들의 慘酷한 삶, 겉으로는 知識人인 척하면서 뒤로는 寡婦의 財産을 가로채려고 謀議를 꾸미는 儒學者들, 사람이 죽어나가는 판에 卓上空論만 하는 知識人들의 僞善을 暴露하고 있다.

≪열미초당필기≫는 每 卷이 脫稿될 때마다 많은 文人들과 書店 商人에 依해 草綠되어 傳해졌고, 剽竊作까지 出現할 程度로 人氣가 많았다. 베이징(北京) 大學校 初代 總長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열미초당필기≫를 ≪ 紅樓夢 (紅樓夢)≫·≪ 聊齋志異 (聊齋志異)≫와 함께 淸代(淸代) 3代 流行 小說로 손꼽았다. 그러나 1950∼1960年代에 와서 ≪열미초당필기≫는 各種 文學史와 小說史에서 封建倫理를 宣揚하는 反動小說로 낙인찍히기 始作했고, 甚至於는≪요재지이≫와 함께 이야기할 만한 좋은 作品이 아니라 오히려 階級 對立 作品으로까지 認識되었다. 그러다가 1980年代 後半부터 ≪열미초당필기≫에 對한 再評價가 始作되었고, 그에 對한 붐이 일기 始作했다.

그는 自身의 父兄, 조카, 親舊, 스승, 同僚, 部下뿐만 아니라 下人, 下女, 甚至於는 날품팔이꾼 等에게서도 이야기의 素材를 제공받았고, 特히 下層民들의 思想과 感情, 欲望과 異常을 濾過 없이 傳達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紀昀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이야기의 記錄者인 自身과 이야기의 話者, 그리고 이야기 主人公의 視角을 錯綜시킴으로써 새로운 審美 世界를 創造해 내었고, 心理 描寫보다는 外部 描寫에 重點을 두어 松明(宋明)의 理學(理學)에 빠져 있는 講學가(講學家)들의 虛僞에 찬 行動과 속셈을 巧妙하게 그려냄으로써 스스로의 價値를 높였다.

  • 이민숙 驛, 2009年, 지만지, ISBN   978-89-6228-3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