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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大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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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숭現事
(龜岩書院崇賢祠)
(Guamseowon Confucian Academy in Daegu)
대한민국 大邱廣域市 文化財資料
구암서원 - 2014年
種目 文化財資料 第2號
( 1982年 3月 4日 指定)
數量 1棟
時代 朝鮮時代
管理 達成徐氏大宗會
戰勝者 구암서원
住所 大邱廣域市 北區 燕巖公園路17길 20 ( 山格洞 )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구암서원 (龜巖書院)은 大邱廣域市 北區 山格洞 에 있는 서원 이다. 1975年 2月 5日에 '建造物 慶北 第2號'로 指定, 1982年 3月 4日에 大邱廣域市의 文化財資料 第2號로 指定되었다.

槪要 [ 編輯 ]

區系 서침 의 德을 기리기 위해 位牌를 모시고 祭祀지내는 書院이다. 서침은 高麗末∼朝鮮初의 變革期에 鄕村에 隱居하며 學問 硏究에 努力하였다. 大邱浮民이 구계선生을 구암서원 숭現事에 奉享하게 된 緣由는 다음과 같다. 區系先生이 朝鮮初에, 達成徐氏 胄孫(胄孫)으로 世居地인 達成에 살았는데 임금께서 達成이 國家의 軍事要塞로 必要하다고 하면서 命換其址(명환기地)케 하고 蓮信(現在의 映宣市長자리)과 新池(現在의 西門市場)下의 蒙利土地(蒙利土地)에 對한 稅金을 徐氏 一門에 받게 하고,南山古驛(남산고역)과 東山一帶(동산一帶)의 땅을 下賜하며, 두터운 賞과 世祿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胄孫(胄孫) 區系先生이 「이 나라의 모든 것이 國王의 땅이거늘 國家施策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臣(新) 혼자만이 富貴를 바라겠습니까?」 라고 쾌연히 辭讓하고는 一家의 사사로운 恩惠를 받기 보다는 大邱浮民이 고르게 恩惠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大邱地方의 還穀利子(還穀利子)를 한섬에 다섯되씩 減해 주시기를 請하여 임금의 允許를 받아 實施 하게 되었다. 그 뒤 大邱浮民이 朝鮮말까지 그 惠澤을 입었다. 그 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書院이다 書院에 들어서면 官吏死因 백인당, 正門인 燃費루, 東齋(敬禮再), 書齋(累學才), 講堂(초현當), 內三門(景仰門), 맨위에 祠堂인 숭現事가 있다. 구암서원은 正南向으로 大邱를 한눈에 볼 수 있는 眺望을 가지고 있고, 大邱 市內에서 가장 規模가 큰 書院으로 保存 狀態가 좋은 便이다.

歷史 [ 編輯 ]

구암서원은 1665年(玄宗 6年)에 硏究山(連龜山) 西南쪽(現在 大邱初等學校 西南쪽 언덕)에 숭現事(崇賢祠)를 建立하고 大邱浮民이 區系 서침을 奉享하였다. 以後 1717年(肅宗 43年)에 大邱廣域市 中區 동산동 229番地로 移建하고, 1718年(肅宗 44年) 3月에 서거정 을 追加 配享하고, 1741年(英祖 17年) 2月에 藥峯 徐渻(徐?)을, 1757年(英祖 33年) 8月에 艦載 西海(徐?)를 追加 配享하였다. 1868年(高宗 5年) 大院君 의 書院 撤廢令에 따라 毁撤되었다가 1924年 儒林에서 復設하고, 1943年 숭現事와 講堂을 中搜 하였고, 숭現事를 1974年에 補修하였다. 1975年 2月 5日 建造物 慶北 第2號로 指定되었다가 大邱直轄市 昇格 後에 大邱市 文化財資料 第2號로 指定되었으며, 1996年 大邱廣域市 北區 산격1棟 燕巖公園路 17길 20番地 燕巖公園內로 옮기고 2008年 8月27日 儒林에 依해 藥材 서사원(徐思遠)을 趨向하였다

숭現事 [ 編輯 ]

숭現事(崇賢祠)는 先賢(先賢)을 높이 받들어 祭享하는 祠堂으로써 1665年(玄宗 6年)에 硏究山(連龜山)에 세워졌는데, 1718年(肅宗 44年)에 大邱廣域市 中區 동산동 229番地로 移建하였다. [1]

背向 人物 [ 編輯 ]

背向 人物 4人 가운데 3人이 大邱 徐氏이기 때문에 門中書院 性格이 剛하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毁撤, 重建 等의 履歷은 歷史 項目 參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