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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한 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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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한 戰爭
날짜 紀元前 109年 - 紀元前 108年
場所
結果 한나라 의 勝利, 古朝鮮을 倂合하고 그 地域에 漢四郡 設置.
交戰國
古朝鮮 한나라
指揮官
우거왕  
性器  
張沆
老人
限度

왕겹
洋服
順遞
兵力
未詳 50,000名 ~ 100,000名
被害 規模
未詳 未詳

古朝鮮-한 戰爭 (古朝鮮-漢 戰爭)은 紀元前 109年 부터 紀元前 108年 까지 古朝鮮 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戰爭이다. 戰爭은 한나라가 勝利해서 古朝鮮에 終末을 告했다. 當時 韓半島 南部에 있던 진국 의 漢나라에 對한 往來와 朝貢을 우거왕 이 妨害하고 있다는 名分으로 한나라가 戰爭을 일으켰다. 한 武帝 紀元前 108年 에 古朝鮮을 멸망시켰으며 以後 漢나라는 랴오둥半島 와 韓半島 北部 地方에 漢四郡 ( 樂浪郡 ? 眞番郡 ? 臨屯郡 ? 玄菟郡 )을 設置했다.

戰爭 背景 [ 編輯 ]

衛滿朝鮮의 形成 [ 編輯 ]

'古朝鮮'이라는 單語는 一然 (一然)의 《 三國遺事 》(三國遺事)에서 最初로 登場했다. 電氣 靑銅器文化가 形成된 紀元前 2300年頃을 전후해 建立된 古朝鮮은 中原地域에서 紀元前 18世紀頃에 遼河 地域에서 南下한 동이족 에 依해 建國된 賞王朝 와 長期間 南北으로 竝立해갔다. 中國 上나라의 臣下 記者 는 紀元前 1112年에 朝鮮에 와서 百姓들을 敎化시켰으며, 周나라 의 諸侯로 封해졌다. 그 後 紀元前 194年에 滅亡해 衛滿朝鮮 으로 이어졌다.

위만 은 紀元前 3世紀 末에서 2世紀 初 中國 燕나라 에서 箕子朝鮮 으로 亡命했다. 準王 (準王)의 信任을 얻은 위만은 西쪽 變更을 守備할 뿐만 아니라 博士에 任命되어 100里의 땅을 下賜받았다. 위만은 滿足하지 않아 流離民을 모아 勢力을 기른 뒤 準王을 쫓아내고, 政權을 차지했다. 準王은 最側近 臣下들과 한(韓)으로 도망간 뒤 스스로 한王(韓王)이라 稱했다.

철기 文化 [ 編輯 ]

위만은 한(漢) 나라를 통해 鐵器文化를 積極的으로 받아들였다. 鐵器는 靑銅器와 달리 農業에 쓰이는 等 生産道具로 使用되었다. 靑銅器는 支配層의 權威를 뒷받침했다면 鐵器는 生産道具로 使用되어 被支配層의 삶에 直接的인 影響을 미쳤다. 이에 農業의 能率이 올라 生産이 增大되었다.

鐵器文化로 因해 强力한 軍事力까지 가지게 되었고, 周邊 나라들을 征服하며 領土를 넓혀 갔다.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 衛滿朝鮮은 더욱 剛한 나라가 되었다. 中國의 한(漢) 나라는 이들의 成長이 匈奴 와 結合해 自身들에게 威脅이 될까 걱정하였다. 이에 한(漢)은 衛滿朝鮮이 自身들을 大國(大國)으로 섬기고, 朝貢을 바칠 것을 要求했다.

中繼 貿易 [ 編輯 ]

衛滿朝鮮은 中國의 한(漢)과 韓半島 南쪽의 나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地理的 特性을 利用해 中國의 한(漢)과 韓半島 南쪽의 나라들이 貿易에서 衛滿朝鮮을 반드시 거치도록 하여 큰 經濟的 利益을 얻었다. 이뿐만 아니라 衛滿朝鮮은 限에서 物件을 들여와 다른 周邊國들에게 利益을 붙여 팔았다. 이러한 中繼 貿易으로 衛滿朝鮮은 많은 利益을 얻을 수 있었다.

位만이 執權한 以後 衛滿朝鮮은 꾸준히 成長하였다. 鐵製 武器와 中繼 貿易(朝貢貿易)으로 利益을 獨占해 經濟的인 利得을 얻을 수 있었다. 衛滿朝鮮이 中繼 貿易으로 利益을 얻는 것을 본 한(漢) 나라는 東北아시아 의 各 나라가 朝貢을 바칠 때 衛滿朝鮮을 거치지 않고 韓에게 直接 바치도록 要求하였다. 그러나 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은 이 要求를 拒絶하였고, 遊牧 民族인 匈奴와 함께 勢力을 키워나갔다. 이를 빌미로 한(漢)이 衛滿朝鮮의 水陸을 모두 攻擊해왔고, 以後 衛滿朝鮮과 한나라의 戰爭이 벌어졌다.

戰爭 經過 [ 編輯 ]

한(漢) 武帝는 匈奴를 먼저 친 다음 南方의 南越 과 東北方의 衛滿朝鮮을 次例로 攻擊했다. 王儉城 을 向해 한(漢)의 淚腺將軍 洋服과 左將軍 順遞 산둥半島 搖動 에서 各各 進擊하였다. 그러나 梁君 모두 衛滿朝鮮의 거센 抗戰으로 밀려났다. 淚腺將軍 洋服은 軍士를 잃고 달아나 열흘 동안 山속에서 숨어지냈다. 이로 인해 戰爭은 膠着化되었다. 이에 한 武帝는 使臣을 보내 和議를 試圖하였으나 所得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漢나라는 王儉城(王儉城)에 對한 攻擊을 멈추지 않았고, 衛滿의 孫子인 우거왕 (右渠王)은 城門을 굳게 닫고 抵抗하면서 數個月 間 熾烈한 接戰을 벌였다.

1年間의 戰爭으로 衛滿朝鮮의 사람들은 지쳤고, 支配層은 分裂되기 始作했다. 衛滿朝鮮이 成立할 當時 移住民과 土着民 사이의 胎生的 限界가 戰爭 狀況에서 主戰派와 主和派로 나뉘어 分裂을 더 거세게 만들었다. 이를 눈치챈 限은 只今 降伏하면 높은 벼슬과 財産을 내리겠다고 懷柔하였으나 우거왕과 그를 따르는 臣下들은 限에 맞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內部 葛藤을 이기지 못하고 主和派가 右渠王을 殺害한 뒤 降伏하고, 漢나라로 亡命하였다. 紀元前 108年에 古朝鮮의 滅亡으로 戰爭의 끝이 났다.

우거왕이 죽었으나 王儉城은 쉽사리 陷落되지 않았다. 거듭된 戰鬪 끝에 우거왕의 大臣이었던 性器(成已)가 죽은 後에 戰爭이 마무리되었다. 성기도 漢나라에 매수당한 우거왕의 아들에게 죽임을 當했다.

한(漢) 나라는 衛滿朝鮮을 相對로 戰爭에 最終 勝利하였다. 그러나 한(漢)君 指揮部 모두가 初期 戰鬪에서의 敗北, 和議의 霧散 等의 理由로 處罰을 면치 못하였다.

漢四郡 [ 編輯 ]

漢四郡(漢四郡)은 中國의 한(漢)나라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設置한 4個의 軍(郡)을 가리킨다. 『 詐欺 』에 衛滿朝鮮이 紀元前 108年에 한나라의 攻擊을 받아 滅亡한 뒤 한나라가 그 地域에 樂浪郡 (樂浪郡)· 臨屯郡 (臨屯郡)· 眞番郡 (眞番郡)· 玄菟郡 (玄?郡)을 設置하였다고 記錄되었다. 이들 中 臨屯郡과 眞番郡은 設置 後 20餘 年 만인 紀元前 82年에 廢止되었고, 管轄하던 地域은 樂浪郡과 玄菟郡에 所屬되었다. 紀元前 75年에 玄菟郡은 新興勢力의 抵抗을 이겨내지 못하고 滿洲 興京 (興京) 方面으로 옮겨졌다.

以上의 4個 軍 以外에 帶方郡 (帶方郡)이라는 郡縣이 登場한다. 帶方郡은 遼東에서 獨立된 勢力을 가지고 있던 공손氏가 設置한 것으로 帶方郡을 통해 樂浪郡 南部 地域의 一部를 管轄하게 하였다. 臨屯郡(臨屯郡)과 眞番郡(眞番郡)李 廢止되고, 玄菟郡(玄?郡)은 이동한 이때에 樂浪郡(樂浪郡)은 維持되고 있었으나, 後漢 末 한족(韓族)과 濊族(濊族)李 勢力을 키워 나가면서 軍의 南部 地域에 對한 統制權을 喪失한 狀態였다. 以後 313年에 樂浪郡과 帶方郡이 各各 高句麗 百濟 에 依해 消滅되었다.

意義 [ 編輯 ]

衛滿朝鮮과 한나라의 戰爭은 韓半島를 둘러싼 最大의 戰鬪로, 그들의 땅에 한나라의 植民地인 漢四郡 (漢四郡)李 세워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中國을 相對로 本格的으로 벌인 戰爭이라는 點과 數的으로 밀렸던 初期 戰鬪에서 奇襲 攻擊과 抗戰으로 勝利를 얻었다는 點에서 意味가 있다.

古朝鮮-한 戰爭은 衛滿朝鮮과 한(漢)나라의 戰爭으로 여러 나라로 分離되어 있던 韓民族이 ‘三國(三國)으로 定立되는 基礎가 마련되었다. 以後 中國과의 戰爭은 高句麗가 擔當했으며, 高句麗는 韓半島의 防波堤 役割로써 ‘韓(韓)民族'으로 거듭나도록 時間을 벌어주었다. 또한 强大國이었던 中國을 相對로 威脅을 주었던 첫 事例였었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