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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安 고려동 遺跡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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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安 고려동 遺跡地
(咸安 高麗洞 遺蹟址)
대한민국 慶尙南道 記念物
種目 記念物 第56號
( 1982年 8月 2日 指定)
面積 8,842m 2
數量 6筆地
時代 朝鮮時代
位置
함안 모곡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함안 모곡리
咸安 모곡리
咸安 모곡리(大韓民國)
住所 慶尙南道 咸安郡 산인면 모곡리 571
座標 北緯 35° 16′ 31″ 東京 128° 27′ 40″  /  北緯 35.27528° 東京 128.46111°  / 35.27528; 128.46111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咸安 고려동 遺跡地 (咸安 高麗洞 遺蹟址)는 慶尙南道 咸安郡 산인면 모곡리에 있는 朝鮮時代 의 遺跡地이다. 1982年 8月 2日 慶尙南道의 記念物 第56號 고려동遺跡地 으로 指定되었다가, 2018年 12月 20日 現在의 名稱으로 變更되었다. [1]

槪要 [ 編輯 ]

高麗 後期 成均館 眞사 오(李午) 先生이 高麗가 亡하고 朝鮮 王朝가 들어서자 高麗 에 對한 忠節을 지키기로 決心하고 이곳에 居處를 定한 以後 代代로 그 後孫들이 살아온 場所이다.

이오는 이곳에 담牆을 쌓고 高麗 遺民의 居住地임을 뜻하는 ‘ 考慮東學(高麗洞壑) ’이라는 碑石 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自給自足을 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朝鮮王朝에 벼슬하지 말 것과 自己가 죽은 뒤라도 自身의 新株 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遺言하였다. 그의 遺言을 받든 後孫들은 19代 600餘 年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現在 마을 안에는 고려동學費, 고려동담牆, 考慮宗宅, 자미 單, 考慮田畓 3,000餘 坪, 者未定, 率間情, 복정들이 있다. 後孫들이 先祖의 遺産을 所重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子女의 敎育에 專念함으로써 學德과 節義로 이름있는 人物들이 많이 輩出되었다.

現地 案內文 [ 編輯 ]

高麗 末에 成均館의 眞사였던 이오 先生은 高麗가 亡하고 朝鮮 王朝가 들어서자 高麗의 流民으로 節義를 지키기로 決心하고 百日紅이 滿發한 이곳을 擇하여 담을 쌓고 居處를 定하였다. 그리고 高麗 遺民의 居住地임을 뜻하는 考慮東學이란 碑石을 세웠다. 여기에서 담안 或은 腸內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2]

世上은 世上을 떠날 때까지 朝鮮 王朝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고, 아들에게도 새 王朝에서 벼슬하지 말 것과 新株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當付하였다. 그리고 담 안에 住居와 우물 專擔 等을 마련함으로써 後孫들이 自給自足할 수 있는 터를 닦았다. 以後 先生의 維持를 받들어 後孫들은 600年이 넘게 이곳에서 살아왔고 고려동이라흔 이름도 傳하고 있다. 現在 이 마을에는 載寧 李氏 後孫 30餘戶과 모여 살면서 先祖의 뜻을 기리고 있다. 마을 안에는 考慮東學票비, 고려동 담牆, 考慮宗宅, 자미 單, 高麗箭 3,000餘 坪, 者未定, 率間情, 복정 等이 있었으나, 이들 建物은 韓國戰爭 동안에 大部分 消失되었으나, 以後 復元되었다. 湖上空의 生家로 알려진 住宅만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으나, 그마저 200餘年 前의 것이라고 한다. [2]

복정 [ 編輯 ]

宗婦가 媤어머니를 위해서 祈禱를 하니 우물 속에서 顚覆 이 나와서 媤어머니께 飮食으로 해드렸다고 해서 우물의 이름을 복정이라고 했다고 傳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