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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亡德四肢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慶州 亡德四肢

慶州 亡德四肢
(慶州 望德寺址)
(Mangdeoksa Temple Site, Gyeongju)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亡德社 金堂터
種目 私的 第7號
( 1963年 1月 21日 指定)
面積 24,304m 2
時代 統一新羅
位置
경주 망덕사지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경주 망덕사지
慶州 亡德四肢
慶州 亡德四肢(大韓民國)
住所 慶尙北道 慶州市 배반동 956番地
座標 北緯 35° 49′ 3″ 東京 129° 14′ 35″  /  北緯 35.81750° 東京 129.24306°  / 35.81750; 129.24306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慶州 亡德四肢 ( 慶州 望德寺址 )는 慶尙北道   慶州市 낭山의 기슭에 있는 절터이다. 1963年 1月 21日 大韓民國 私的 第7號로 指定되었다.

開設 [ 編輯 ]

三國遺事 》(三國遺事)는 亡德史를 짓게 된 것이 新羅 國家를 佛法(佛法)의 힘으로 外勢로부터 守護한다는 思想에서 지어진 四天王寺 (四天王寺)를 黨에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앞서 新羅를 侵攻하려는 (唐)의 水軍이 670年 671年 두 次例에 걸쳐 느닷없는 風浪으로 바다에서 沈沒하고, 新羅에서 와 있던 박문준(朴文俊)으로부터 新羅에서 浪士 南쪽에 天王祠를 지어 皇帝의 萬壽無疆을 빌며 法會를 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唐 高宗 (唐高宗)은 禮部豺狼(禮部侍郞) 惡붕귀(樂鵬龜)를 新羅에 보내 事實 關係를 確認하게 하였다.

新羅의 문무왕 (文武王)은 四天王寺를 黨의 使臣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四天王寺의 南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그곳으로 惡붕귀를 引導하였다. 그러나 惡붕귀는 "이 절은 四天王寺가 아니라 亡德尿酸 ( 望德遙山 )의 절이다."라며 새로운 절에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新羅의 官吏들이 金 1千 兩을 賂物로 주었고, 歸國한 惡붕귀는 高宗에게 "新羅는 天王祠(四天王寺)를 짓고 새 절에서 皇帝의 萬壽無疆을 빌고 있었을 뿐입니다."라고 報告했다. 以後 새 절의 이름은 악붕귀의 말에서 딴 亡德社 ( 望德寺 )가 되었다고 한다. [1]

《三國史記》 및 《三國遺事》에는 경덕왕 (景德王) 14年( 755年 ) 망덕사의 塔이 흔들렸다는 記錄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黨에서 안사의 亂 이 일어나자 當時 新羅 사람들은 "黨을 위해 지은 節이니 그에 應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 亡德社塔은 以後에도 원성왕 (元聖王) 14年( 798年 ), 애장왕 (哀莊王) 5年( 804年 ), 헌덕왕 (憲德王) 8年( 816年 )에 서로 부딪쳤다고 《三國史記》는 記錄하고 있다.

發掘 調査 [ 編輯 ]

亡德社터 敷地는 大部分 耕作地로 開墾되어 있으며, 東西 木塔과 金堂, 講堂, 中門, 回廊, 翼廊의 터 및 幢竿支柱 等이 남아 있어 典型的인 統一新羅 時代의 雙塔 嘉藍 配置를 보인다. 2013年 에는 절터 整備를 위하여 實施한 試掘 調査에서 講堂터의 位置를 追加로 確認하였으며, 高麗 初期까지 査察이 存續하였음도 밝혀졌다.

金堂 터에는 둥근 模樣의 主座(柱座)를 가진 네모 模樣의 주춧돌이 12個 남아 있다. 木塔의 터는 논 한가운데 흙으로 쌓은 段의 痕跡이 確認되는데, 13層으로 되어 있었던 두 塔 中 西塔은 나무와 흙에 埋沒되어 東塔에 비해 그 毁損 狀態가 더욱 深刻하다. 銅塔은 北面 길이 123cm, 동면 길이 127cm로 흙으로 쌓은 基壇 높이는 120cm 程度이다. 南面과 東面에 돌階段의 痕跡이 남아 있는데 元來는 北面과 書面에도 돌階段이 設置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基壇 周圍에 탱註釋(撑柱石)과 免席, 址臺石이 남아 있으며, 남아 있는 基壇 石材만으로도 基壇 復元이 可能할 程度로 狀態가 좋다. 基壇 위의 주춧돌은 한 邊에 네 個씩 羅列한 것이 17個 남아 있으며, 윗部分에 主座가 없는 네 個의 四天柱 주춧돌 가운데 하나는 實測値 가로 세로 모두 60cm의 正四角形을 이룬다. 外晋州 네모꼴 주춧돌은 12個 가운데 6個가 實測이 可能하다.

亡德社塔에서는 新羅의 木塔 遺構 가운데 唯一하게 八角 形態의 心礎石(心礎石)李 確認되고 있는데, 東西 心礎石 모두 가운데 舍利孔에 舍利函을 奉安한 2段으로 構成된 네모 模樣의 구멍이 패여 있다. 八角形 한 邊 길이는 東塔이 60cm, 西塔이 東西南北 60cm에 北東, 北西, 南東, 南西 50cm이며, 舍利孔의 네모 模樣으로 된 구멍은 東塔이 가로세로 25cm, 西塔은 23cm이다(서탑 舍利孔의 境遇 四天王寺 木塔의 크기와도 비슷). 塔의 바닥에는 무늬 없는 前돌을 깔았던 것으로 確認되었다. [3]

한便 《 三國史記 》(三國史記)에는 新羅 신문왕 5年( 679年 )에 完工되었다고 되어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孝昭王은 事後 망덕사의 東쪽에 묻혔는데, 新羅王陵을 硏究한 故 이근직 敎授는 《三國史記》의 이 記事를 根據로 現在 亡德社 東北쪽에 位置해 있으며 흔히 新聞王陵으로 알려져 있는 新羅 古墳이 實際로는 酵素王陵이라 主張하였다.

傳說 [ 編輯 ]

  • 孝昭王이 卽位한 뒤 亡德史를 짓고 黨 皇室을 위해 福을 빌고자 했는데, 5年 만인 丁酉年( 697年 )에 落成會를 베풀고 王이 몸소 法會에 參席하였다. 이때 行色이 남루한 어느 僧侶가 王에게 落城 法會에 參加하게 해 줄 것을 要請했고, 王은 허름한 차림의 그 僧侶를 末席에 앉게 했다. 法會를 파할 무렵 孝昭王은 僧侶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고, 琵琶癌(琵琶癌)에서 왔다는 僧侶에게 "어디 가서 國王이 몸소 供養하는 法會에 參席했다고 말하고 다니지 말게."라고 말했다. 僧侶는 웃으며 "陛下께서도 어디 가셔서 眞身釋迦(眞身釋迦)를 供養했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라고 對答하고는, 갑자기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南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孝昭王은 그 僧侶가 眞身釋迦의 化身임을 뒤늦게 깨닫고 僧侶가 사라진 方向으로 例를 올렸다. 以後 僧侶가 지팡이와 바리때를 남겨 두고 사라진 南山 三星曲(對策千원)과, 僧侶가 스스로 居處라고 밝힌 琵琶癌 아래에 各各 불無事(佛無寺)와 석가사(釋迦寺)가 세워져 僧侶가 남기고 간 지팡이와 바리때를 모셨다고 한다. [2] 다만 망덕사의 建立은 孝昭王이 아닌 神文王 때의 일이다. [4]
  • 망덕사의 旋律(善律)이라는 僧侶가 《 六百般若經 》(大品般若經)을 死境하고자 施主를 모으다 미처 完成되기 前에 죽었는데, 저승에 온 旋律이 人間 世上에서 僧侶로써 佛經을 寫經하려다가 完成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안 閻羅大王 은 特別히 돌려보내 주면서 《大品般若經》 寫經을 마저 完遂하도록 했다. 旋律은 저승에서 돌아오는 길에 15年 前에 죽은 한 女人의 魂靈을 만났고, 女人은 自身의 父母가 金剛沙 所有의 논 한 이랑을 빼돌린 罪로 自身이 저승에서 苦痛을 받고 있다며, 돌아가면 自身의 父母를 찾아가 그 땅을 돌려주게 할 것과, 女人 自身이 生前 寢牀에 숨겨두었던 胡馬기름 과 이불 사이에 숨겨둔 를 찾아다 佛經 死境에 써달라고 自身의 故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瞬間 선율은 살아났는데, 이미 旋律 自身이 죽은지 열흘이나 지나 땅에 묻힌 뒤였고 사흘 만에야 그곳을 지나던 牧童이 旋律의 목소리를 듣고 亡德社에 알려 旋律을 求할 수 있었다. 以後 旋律이 女人이 알려준 대로 女人의 집을 찾아가 보니 果然 참기름과 베는 女人이 말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旋律이 女人의 冥福을 빌어주자 女人은 꿈에 나타나 感謝를 표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感歎하며 旋律의 佛經 死境 作業을 너도나도 도와, 旋律은 마침내 自身의 書院을 이룰 수 있었다. 旋律이 死境韓 이 《六百般若經》은 一然이 《三國遺事》를 짓던 當時까지도 동도(慶州) 承史의 書庫에 保管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이 해마다 봄과 가을에 돌려 읽으며 災殃을 岐陽(祈禳)했다고 한다. [5]
  • 亡德社터 南쪽으로 흐르는 남천 모래밭을 장사(長沙)라 하여, 新羅 訥祗王 때의 揷良州間 朴濟相 (朴堤上)李 王命으로 倭로 떠나갈 때 그 夫人이 이 모래밭 위에서 드러누워 오랫동안 울부짖었던 곳으로 《三國遺事》는 傳하고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三國遺事》權2, 기이2, 문호왕 법민
  2. 같은 冊 卷5, 感通7, 진신수공
  3. 金東旭, 《6~9世紀 新羅 木塔 形態의 變遷에 對한 硏究》 경기대학교 博士論文, 2006年, 97~98쪽.
  4. 《三國史記》 新羅本紀에는 神文王 5年(685年) 4月에 亡德社가 完工되었다고 했으며, 三國遺事 卷2 기이2 문호왕法民曹에도 禮部豺狼 악붕귀가 亡德社에 온 것이 孝昭王 때의 일이라 한 것은 틀린 말이라 적고 있다.
  5. 같은 冊 卷5, 감統制7, 旋律還生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