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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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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첨
姜民瞻
모사화(1788년 정조 12년 박춘빈작) 보물 588호
模寫畫(1788年 正祖 12年 박춘빈作) 寶物 588號
高麗 兵部尙書
在任 1020年~1021年
國王 高麗 顯宗
이름
민첨(民瞻)
시호 銀렬(殷烈)
身上情報
出生日 963年 11月 29日 ( 0963-11-29 )
出生地 高麗 山南道 講主
死亡日 1021年 11月 12日 ( 1021-11-12 ) (57歲)
死亡地 高麗 開京
國籍 高麗
性別 男性
家門 晉州 姜氏
父親 江보능
母親 신氏 否認
子女 剛斷(姜旦)
墓所 銀烈士
軍事 經歷
服務 高麗軍
最終階級 怨讐
主要 參戰 高麗-거란 戰爭
徐薰 秋成치리翊戴功臣

강민첨 (姜民瞻, 963年 11月 29日 ~ 1021年 11月 12日 )은 高麗 의 文官이다.

高麗 거란 3次 戰爭 時 上元帥 강감찬 (姜邯贊)과 함께 怨讐(元帥)가 되어 出戰하여 鬼誅大捷 을 勝利로 이끌었다. 그는 이 功으로 上將軍으로 進級하며 知中樞府事·兵部尙書에 올랐으며, 高麗-거란 戰爭 從前 2年 만에 別世하게 道字 高麗 朝廷에서 3日 동안 照會를 하지 않았다. 玄宗은 死後 그에게 情1品 太子太傅(太子太傅) 와 情2品 門下侍郞平章事(門下侍?平章事)로 推定하고 銀렬(殷烈)이란 諡號를 내렸다.

生涯 [ 編輯 ]

  • 963年 高麗 光宗 14年 晉州에서 元尹 벼슬을 한 아버지 襁褓陵과 어머니 居昌 신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姜民瞻의 誕生地는 現 銀烈士 로 誕生地를 나타내는 비가 서 있다.
  • 977年 15歲까지는 鄕校에서 詩書藝악을 닦았으며, 1005年 穆宗 8年, 4月 文科에 及第하였다. 將仕郞, 文林郞, 度敎令 同情을 거쳐, 安邊都護府 장서기(掌書記)로 일을 하였다.
  • 1007年 국자主婦同情(國子主簿同正), 도호사錄參軍(都護司錄參軍), 上書職場同情(尙書直長同正),
  • 1010年 玄宗 1年 隘守鎭腸(隘守鎭將)- 거란侵入視 桶군록사(統軍錄事) 兆원 (趙元)과 함께 흩어진 軍士를 모아 9日間 서경성을 지켜 開京의 顯宗을 南쪽으로 無事히 蒙塵하게 했다.
  • 1011年 導管視(都官試) 員外郞 (正6品)에 祭需되고 비어臺 (斐魚袋 허리에 차던 緋緞으로 된 裝身具)를 下賜 받았다.
  • 1011年 8月 거란의 侵攻으로 동북면의 高麗軍이 빠진것을 안 동여진(東女眞)은 倍 100餘隻 으로 考慮 3景(京) 中 하나인 東京(東京) 競走를 侵攻했다. 考慮는 首都 開京(開京) 外에, 옛 高句麗의 首都였던 平壤을 書經(西京)이라 하고, 옛 新羅의 首都였던 慶州를 東京(東京)이라 하여 3頃으로 삼았는데,동여진이 高麗의 東京(東京) 競走를 侵攻하여 옛 王宮을 廢墟로 만들고, 芬皇寺(芬皇寺)를 消失시킬 程度로 慶州를 焦土化 시켰다.
  • 1012年 5月 顯宗 3年, 동여진이 淸夏縣, 영일縣, 장기현 (現 浦項市)一帶를 또 다시 侵攻하자 玄宗은 강민첨 將軍을 按察使 로 派遣하였다. 강민첨 將軍은 문연 이연택 조자기 等을 將帥로 삼고 진명도部署 所屬의 考慮水軍을 指揮하여, 강민첨 將軍 麾下의 戈船(戈船) 鐵甲船 75隻과 考慮水軍 3千餘名으로 동여진 海賊船 100餘隻,2000餘名의 동여진 海賊과 東海 앞바다에서 激烈한 海戰을 벌여 동여진 海賊을 全滅 시켰다. 以後 동여진은 1012年 10月 餘震의 모일라 部族長 一行이 30星 部落을 거느리고 貨主에 와서 高麗와 盟約을 맺는다.
  • 1016年에는 內史舍人(內史舍人)이 되었고, 1017年에는 태복경(太僕卿)李 되었다.
  • 1018年 12月 顯宗 9年 거란이 10萬을 軍士를 이끌고 再侵入하자, 大將軍(大將軍) 在職 中에 怨讐(元帥)가 되어 敵將 蕭排押 (蕭排押)거란군을 흥화진,資産(慈山),連奏 에서 大破하고,귀주와 半嶺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고려거란3차전쟁과 鬼誅大捷을 實質的 統率과 指揮하여 戰爭을 勝利로 이끈 民族의 救國 英雄이다.
  • 1019年 銀靑興祿大夫 鷹揚上將軍 (鷹揚上將軍) 上柱國(上柱國) 천수현個國남(天水縣開國男) 食邑300號에 봉해지고 右散騎常侍(右散騎常侍) 任命,
  • 12月에는 秋成치리翊戴功臣(推誠致理翊戴功臣)로 任命되었다.
  • 1020年 3月 兵部尙書 任命, 顯陵 개醬의 공으로 金紫興祿大夫가 되었다.
  • 1021年 11月 12日 에 別世하니, 朝廷에서는 3日 동안 照會를 하지 않았으며, 그의 功勞로 아들 段에게도 녹자(祿資)를 하사했다.
  • 玄宗은 강민첨 事後 太子太傅 ,門下侍郞平章事(門下侍?平章事) 首相級으로 追贈하고 銀렬(殷烈)이란 諡號를 내려, 晋州(진양) 姜氏 은열공派 가 誕生되었다.
  • 考慮는 受賞(首相) 門下侍中(門下侍中)에 任命된 사람이 없을 境遇 序列上으로는 아래지만 品階 種1品 同級인 中書令이 存在함에도 不拘하고, 門下侍中의 바로 밑인 情2品 門下侍郞 平章事가 受賞(首相)李 되었다.
  • 1046年(正宗 12)에 功臣圖形(功臣圖形)에 올려 삼한壁上功臣이 되었으며, 淸州 忠賢社에 인헌공( 강감찬 )과 함께 背向 되었다.
  • 11月. 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對中上部(大中祥符) 3年(1010)에 거란이 들어와 擄掠질하였을 때, 서북면都巡檢使(西北面都巡檢使) 楊規(楊規)와 部指揮(副指揮) 김숙흥(金叔興) 等은 先鋒에 나아가 힘써 格鬪를 벌이며 連이은 戰鬪에서 敵을 突破하였지만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集中되어 모두 戰場에서 戰死하였다. 또한 大衆上部 11年(1018) 거란 兵士가 闌入하였을 적에는 兵部尙書 知中樞院事(兵部尙書知中樞院事) 강민첨(姜民瞻)李 怨讐(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突擊하여 半嶺(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軍이 退却하면서 槍과 甲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姜民瞻은 이에 10,000名을 捕虜로 잡거나 斬首하였다. 그 功을 追念한다면 褒賞을 施行하기에 合當할 것이다. 功臣角(功臣閣)에 모습을 그려 이로써 後代를 勸勉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十一月. 制曰, “大中祥符三年丹兵入寇, 西北面都巡檢使楊規副指揮金叔興等挺身奮擊, 連戰破敵, 矢集如蝟毛, 俱沒陣下. 又於大中祥符十一年丹兵入,兵部尙書知中樞院事姜民瞻爲元帥, 鼓奮擊, 大敗於盤嶺之野, 丹兵奔北, 投戈委甲, 行路隘塞. 民瞻乃斬萬級. 追念其功, 合行褒奬. 可圖形功臣閣, 以勸後來.”

강민첨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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