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陵 임영관 三門

江陵 임영관 三門
(江陵 臨瀛館 三門)
(Main Gate of Imyeonggwan Guesthouse, Gangneung)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國寶
種目 國寶 第51號
( 1962年 12月 20日 指定)
數量 1棟
時代 高麗時代
所有 國有
位置
강릉 임영관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강릉 임영관
江陵 임영관
江陵 임영관(大韓民國)
住所 江原道 江陵市 임영로131番길 6 ( 용강동 )
座標 北緯 37° 45′ 12″ 東京 128° 53′ 32″  /  北緯 37.75333° 東京 128.89222°  / 37.75333; 128.89222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江陵 임영관 三門 (江陵 臨瀛館 三門)은 江原道 江陵市 용강동 에 있는 門(門)의 하나이다. 1962年 12月 20日 大韓民國의 國寶 第51號로 指定되었다.

單層의 맞배지붕으로 3칸 2號(戶)의 莊重한 形態를 갖춘 優秀한 八脚門(八脚門)이다. 建立된 年代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手法(手法)으로 보아서 朝鮮 初期의 것으로 推定된다. 비록 規模는 작지만 韓國 木造 建築思想 뛰어난 構造와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옛 名稱은 '江陵 객사문'이었는데, 2010年 4月부터 '임영관 三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槪要 [ 編輯 ]

高麗時代에 지은 江陵 客舍의 正門으로, 現在 客舍 建物은 없어지고 이 門만 남아 있다. 客舍란 高麗와 朝鮮時代 때 各 고을에 두었던 地方官衙의 하나로 王을 象徵하는 나무牌를 모셔두고 初하루와 보름에 宮闕을 向해 절을 하는 望闕禮를 行하였으며, 王이 派遣한 中央管理나 使臣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客舍는 高麗 太祖 19年(936)에 總 83칸의 建物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門壘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懸板은 恭愍王이 直接 쓴 것이라고 한다. 몇 次例의 報酬가 있었고, 日帝時代에는 學校 建物로 利用하기도 하였다. 學校가 헐린 뒤 1967年에 江陵 警察署가 들어서게 되고 現在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南山의 오성정·錦山의 月花亭·鏡浦의 방해정은 客舍의 一部를 옮겨 지은 것이다.

門은 앞面 3칸·옆面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面에서 볼 때 사람 人(人)字 模樣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裝飾하여 짠 恐怖構造가 기둥 위에만 있는 柱心包 樣式으로 簡潔한 形態로 꾸몄다. 앞面 3칸에는 커다란 널板門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部分이 볼록한 배흘림 形態이다.

簡潔하고 素朴하지만 細部建築 材料에서 보이는 세련된 彫刻 솜씨는 高麗時代 建築樣式의 特徵을 잘 보여주고 있다.

現地 案內文 [ 編輯 ]

客舍란 客觀(客館)이라고도 하며 高麗時代와 朝鮮時代에 各 고을에 두었던 官廳建物의 하나로 임영관 三門은 客舍의 正門이다. 왕이 派遣한 中央管理가 묵었던 場所로 朝鮮時代에는 客舍의 建物 中 가장 重要한 位置에 자리한 前大淸(殿大廳)에 國王을 象徵하는 全敗(殿牌)를 모셔두고 每달 初하루와 보름에 宮闕을 向하여 절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1]

江陵部 客死인 임영관(臨瀛館)은 高麗 太祖 19年(936年)에 創建하였다고 하며, 以後 朝鮮時代까지 여러 次例에 걸쳐 中窓·重修되었던 것으로 發掘調査 結果 確認되었다. [1]

임영관 三門은 高麗 末에 지어진 것으로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聞으로 江原道內 建築物 中 唯一하게 國寶로 指定된 文化財이며, 簡潔하고 素朴한 柱心包(柱心包)系 樣式과 맞배지붕의 三門(三門)이다. 배흘림 기둥은 現存하는 木造文化財 中 가장 크며,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세련된 彫刻 솜씨는 高麗 末, 朝鮮 初期 建築의 特徵을 잘 나타내고 있다. [1]

老後와 變形으로 最近 完全 解體·補修하였으며, 恭愍王의 親筆로 傳하는 임영관 懸板이 임영관의 撤去時 임영관 三門에 걸었던 것을 2006年 10月 임영관 復元 竣工 後 本來의 位置인 前大廳에 옮겨 걸었다. [1]

寫眞 [ 編輯 ]

各州 [ 編輯 ]

  1. 現地 案內文 認容

參考 資料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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