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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謹行 (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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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謹行 (李謹行, ? ~ 682年 )은 唐나라 의 將帥로 高句麗 , 新羅 와의 戰爭 記錄에 자주 登場하며, 그 外의 北方 遊牧 民族을 擊破하는 데 功을 세웠다.

속말말갈 出身으로 아비는 돌持戒 (突地稽)인데, 部(部)의 酋長이다. 隋나라 末期, 그에 屬한 1000名의 軍士를 거느리고 內附해오니, 榮州 (營州)에 居處하게 하고, 金紫光祿大夫(授金紫光祿大夫), 要서태수(遼西太守)에 除授하였다.

唐 太宗 秒에, 朝貢을 받들면서 그의 部를 榮州 로 삼고 摠管의 職을 除授되었으며 有黑疸 (劉黑?)李 謀反瑕疵, 아버지 돌持戒 가 直接 井州에 와서 辰王(秦王)에게 上書하여 不絶을 請하였고, 軍功으로 기국공(耆國公)에 封해졌으며, 그의 부는 옮겨 昌平(昌平)에 居處하게 했다.

고개도 (高開道)가 突厥의 兵力으로 柳州를 攻擊하자, 돌持戒 가 맞아 싸워 패배시켜으며 뒤이어 優位將軍으로 승진시키고 李氏 姓을 하사하였으나 돌持戒 는 얼마 안가 죽었다.

李謹行은 容貌가 壯大하고, 勇猛은 群衆을 뒤덮었으며, 여러番 昇進하여 榮州도독이 되었는데, 稼動 (家童)은 數千名에 이르러 財物로써 스스로 雄傑이 되니, 異人 (夷人)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적石島 (積石道) 經略大使가 되었는데, 논흠릉 (論欽陵, 가르친링)이 10萬을 거느리고 황중 (湟中)을 擄掠질하였다. 羅睺(候邏, 堡礁, 巡察)가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데, 兵士들은 땔감을 求하려 半以上이나 흩어져 있었다. 李謹行은 오랑캐가 들이닥쳤다는 消息을 듣고, 旗幟를 꼽고 북을 치고, 門을 열어 살펴보게 하였다. 논흠릉은 伏兵이 있는지 疑心하여, 敢히 進擊하지 못했다.

666年 高句麗 연개소문 의 아들 연남생 의 要請으로 唐나라 軍이 派遣될 때, 좌감문위로 任命되어 高句麗 로 왔다. 674年 請해 (?海)에서 吐蕃 을 擊破하니, 璽書를 내려 功勞를 致賀하고, 연국공에 封하였다. 뒤이어 675年 20萬 大軍을 이끌고 新羅 征伐에도 나서고 乘勝長驅했으나 매소성 戰鬪 에서 新羅軍의 急襲으로 普及 物資를 빼앗기고 數千 騎兵이 거의 壞滅한 被害를 입는다

事後 柳州 都督을 追贈되고, 健陵 (乾陵)에 배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