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金永國)은
日帝强占期
의 地方行政 官僚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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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帝國
武官의 아들로 태어나
咸鏡道
地域에서
朝鮮總督府
官吏로 勤務했다.
1910年代
에
長津郡
과
定平郡
에서 郡書記로 在職한 데 이어,
1920年
부터는
咸鏡南道
道廳 所在地인
함흥군
에서 郡書記를 지냈다.
1928年
에 昇進하여 內陸의 오지 地域인
咸鏡北道
三水郡
軍需에 任命되었다. 이때 高等官 8等으로 情8位에 西魏되어 있었고 1930年에는 高等官 7等으로 昇進하며 種7位로 承緖되었다.
日帝 强占期에도 月給을 모아 땅을 사고 집을 짓는 等 比較的 餘裕있는 生活을 했다. 夫人은
昌德宮
養蠶所의 敎師 出身이었다. 아들 가운데 美術에 才能이 있는
김흥수
가
도쿄 美術學校
에 進學하여 畫家가 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군수직에서 물러난 末年에는 小作農으로 일하느라 生活이 어려워져
[1]
, 房이 많은 살림집을 旅館으로 改造하여 運營하게 되었다.
旅館 開設 後 얼마 되지 않아
1940年代
初盤에 死亡했다. 김영국 事後에
太平洋 戰爭
이 終戰되고
蘇軍丁
이 始作되었을 때, 김흥수는
共産主義
에 反對하여 越南한 뒤 大韓民國의 有名 畫家가 되었다. 反面 郡廳 公務員으로 勤務하던 맏아들은 越南을 試圖하다가 逮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가운데 官僚 部門에 包含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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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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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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