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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連이 할머니들 代辯한다 생각했던 내가 純眞했다”|주간동아

週刊東亞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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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連이 할머니들 代辯한다 생각했던 내가 純眞했다”

[인터뷰] 천영우 前 靑瓦臺 外交安保首席 “文政府, ‘被害者’ 아닌 ‘正義連’ 中心主義”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05-21 16: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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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明博 政府에서 外交安保首席을 지낸 천영우 前 首席이 自身의 유튜브 채널인 ‘천영우 TV'에서 當時 慰安婦 協商 뒷이야기를 公開했다. 그를 21日 午前 만났다. 그는 “정대협은 慰安婦 問題 解決 自體를 願하지 않는 團體였다”며 말門을 열었다.

    “정대협은 慰安婦 問題解決을 願치 않아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정대협의 存在根據가 할머니들이다 보니 問題가 解決되면 정대협이 門을 닫아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外交安保首席이 直接 慰安婦 問題解決에 나섰던 背景이 있나. 

    “2011年 8月 憲法裁判所가 ‘政府가 慰安婦 問題 解決에 나서지 않는 것 自體가 違憲’이라는 判決을 내렸다. 政府의 外交的 裁量權에 屬하는 일이 憲法裁判所의 判斷을 받아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어떻든 憲法 機關이 政府에 問題解決을 위해 努力하라고 法的 義務를 賦課한 것이어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政治的 問題에서 法的 問題가 된 狀況에서 그대로 있으면 政府가 憲法을 違反하는 狀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해 12月18日로 豫定되어 있었던 李明博 大統領과 노다 요시히코 總理의 교토 韓日頂上會談에서 議題로 다루기로 했다. 慰安婦 議題가 韓日頂上 會談 테이블에 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千 前 首席은 “하지만 頂上會談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고 回顧했다. 



    “會談 前날 저녁, 노다 總理가 主催한 小規模 非公式 晩餐이 있었는데 이 大統領이 作心을 하고 이番 會談에서 慰安婦 問題 解決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참 이야기를 했다. 雰圍氣가 좋아서 內心 期待를 하고 다음날 公式會談에 나섰는데 노다 總理는 一言半句 이에 對한 反應이 없이 다른 소리만 했다. 結局 이 前 大統領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게 以後 벌어진 韓日關係 내리막의 出發이었다.”

    問題解決에 나선 日本 사이토 官房部長官

    -그런데 왜 慰安婦 할머니들을 直接 만나게 됐나. 

    “이듬해 2012年 봄에 사이토 官房部長官이 特使資格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個人的으로 慰安婦 問題 解決에 關心이 높아 보였다. 傳統的으로 日本 민주당 左派들은 植民支配와 戰爭責任에 對해 깊은 反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從軍慰安婦 問題에 對해서도 罪責感을 갖고 있다. 사이토 長官이 그런 境遇였다. 

    日本에서 官房部長官은 3選 議員이 하는 꽤 무게感이 있는 자리이다. 向後 總理級인 官房長官으로 直行하는 境遇가 많아 國會를 움직일 수 있는 政治的으로도 重量感 있는 人士들이 맡는다. 外務省 借款보다 比重이 높다. 노다 總理나 外務大臣은 慰安婦 問題 解決에 別로 熱意가 없었는데 사이토 長官이 나서서 外務省과 總理室을 說得해 나서고 있는 狀況이었다.” 

    -當時 사이토 長官이 내놓은 案이 ‘할머니 한사람 한사람을 駐韓 日本大使가 直接 만나 總理의 謝過 親書와 日本 政府 補償金을 直接 傳達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 

    千 前 首席은 한쪽에서는 日本과의 協商채널을 열어놓고 다른 한쪽에서는 自身이 直接 할머니들과 정대협 尹美香 代表를 直接 만났다고 했다. 

    “靑瓦臺 外交安保首席이 그렇게 나선 것도 처음이었다. 내가 할머니들을 만나겠다고 하니 周邊에서 다 말렸다. 首席이 만나면 나중에 局長級은 만날 수가 없고 或是 無理한 主張이라도 내세우면 堪當하지 못하다는 거였다. 나는 ‘大統領이 直接 關心을 갖고 頂上會談에서까지 擧論한 건데 首席이 나서야지 그런 式으로 발을 빼면 어떻게 하느냐’는 立場이었다. 于先 被害 當事者들인 할머니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直接 듣고 싶어 面談을 推進했다.” 

    -時間과 場所는? 

    “2012年 初 靑瓦臺 面會室 2層 카페였다. 처음엔 ‘나눔의 집’을 直接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參謀들이 말렸다. 그곳은 정대협이 直接 컨트롤하는 곳이라 할머니들이 便하게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그래서 結局 靑瓦臺로 모셨다. 이番에 問題提起를 한 이용수 할머니도 계셨던 것 같다.” 

    -몇 名이 나왔나. 

    “대여섯 分 程度였다. 이름은 다 記憶하지 못하지만 對外的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할머니들이 나왔던 것 같다. 雰圍氣는 좋았다. 할머니들도 靑瓦臺 首席이 直接 問題를 解決하겠다고 나섰으니만큼 이番에만큼은 제대로 된 解決策이 나오리라는 期待感을 보였다. 

    어떤 具體的인 解決策을 提示하기보다 當時 그분들 나이가 여든이 넘었으니 길어야 10年 산다고 할 때 ‘時間이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좋은 解決策이라도 世上을 떠난 다음에 나오면 무슨 所用이 있느냐면서 日本으로부터 謝過도 補償도 둘 다 받으면 좋겠지만 沙果보다는 그동안 苦生한 것에 對해 제대로 된 補償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印象을 받았다. 나는 할머니들에게 ‘大統領도 至大한 關心이 있고 首席인 나도 解決하겠다는 意志가 剛하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大統領과 國民을 說得하겠다”

    -그러는 渦中에 사이토 안(安)李 나온 거고. 

    “사이토 長官이 提示한 ‘總理의 謝過便紙와 國家豫算으로 補償金을 支拂하겠다’고 하는 안은 宏壯히 進一步한 內容이었다고 判斷했다. 다만 한 가지 條件을 내걸었다. 日本이 自己들의 政府 豫算으로 補償金을 내는 것이니만큼 國家 責任을 認定하는 것이라고 解釋해 이를 大韓民國 國民들에게 說明할 것이라는 것, 이에 對해 日本 政府는 公式的으로 ‘盧(No)’만 하지 말라는 거였다. 

    萬若 이것을 約束하면 내가 이 世上 辱을 다 들어 먹더라도 大統領께 建議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以前에 고노 總理가 國家責任을 認定했기 때문에 日本 立場에서 이 程度는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結果的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러는 過程에서 尹美香 代表를 만난 理由는? 

    “日本에서 答이 오기 前에 合意가 어떤 方向으로 이뤄질지 모르지만 미리 團體 代表를 만나 狀況을 알려주기 위해서 點心食事를 함께 했다. 나는 이러이런 論議가 只今 韓日政府 間에 오가고 있으니 나중에 合意가 이뤄지더라도 贊成이나 支持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내놓고 판을 깰 程度의 反對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傳했다. 

    나는 日本 政府가 우리가 提示한 條件을 받아들이면 정대협이 反對하더라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게 할머니들을 위해서 最善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爆彈’을 未解決 狀態에서 다음 政府에까지 넘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다.“ 

    -尹 代表를 굳이 만날 必要는 없었는데 만났다는 건가. 

    “外交部 內에서 反對가 甚했다. 큰일 난다, 그러다 다친다는 거였다. 정대협은 이미 當時에도 할머니들을 爲한 組織이 아니라는 共感帶가 官僚들 사이에도 깊게 形成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外交部를 說得했다. 나야 앞으로 公職을 더 할 사람은 아니지만 外交部는 對日(對日) 外交를 繼續 해야 하는 狀況이니 모든 非難을 내게 하라면서 말이다.”

    “親日 프레임에 걸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새삼스러운 質問이지만, 왜 그런 反應들이 外交部에 澎湃했을까. 

    “挺對協으로부터 ‘親日 프레임’에 걸려 들어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였다. 公務員들에게 親日 烙印이 찍히면 官僚로서의 未來가 있겠나. 정대협의 實體를 알아도 맞붙어 싸우겠다는 ‘肝 크고 無謀한 公職者’는 없다. 이길 方法도 없고 괜히 傷處만 입는다. 最大限 그 사람들의 脾胃를 거스르지 않는 次元에서 對應할 수밖에 없다는 雰圍氣였다. 나 亦是 그런 雰圍氣를 잘 알고 있었지만 最小限 團體의 理解는 求해야겠다, 나름대로 誠意를 보이자는 次元에서 만난 거였다.” 

    -當時 만난 尹 代表 反應이 매우 떨떠름했다고 公開했는데. 

    “實際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들은 慰安婦 問題 解決 自體를 願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慰安婦 問題가 解決되는 그날이 挺對協이라는 組織의 終末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 아닐까. 나는 正말 熱心히 東奔西走하며 問題를 解決하자는 注意였는데 이 사람들은 ‘眞짜 解決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態度였다. 最小限 할머니들의 利益을 眞情으로 代辯한다고 생각했었던 내가 純眞했던 셈이다. 정대협과 慰安婦 할머니들의 利害關係가 다르다는 世間의 이야기들을 直接 깨달았던 經驗이었다.” 

    -이番에 이용수 할머니의 暴露를 보고 ‘터질 것이 터졌다’는 느낌을 받았겠다. 

    “모든 聖域이란 內部者들의 告發이 있기 前까지는 알 수가 없다. 밖에서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안티들의 狂亂程度로 여긴다. 邪敎 集團이란 것도 內部 信者들의 告發이 있어야 可能한 것 아닌가.” 

    그는 “정대협의 變質은 우리 社會 過度한 親日 反日 프레임 속에서 被害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묻혀지고 團體 利益만 도드라지는 過程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無條件 反日(反日)만이 大韓民國이 追求해야할 價値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事實 따지고 보면 只今 우리 社會에 親日이 있을 수 있다고 보나. 國民 情緖上 日本에 對해서는 大部分 反日이다. 다만 그 過程에서 國益을 얼마나 생각하느냐의 差異 아닌가. 내가 首席을 할 때도 日本 問題가 나오면 官僚들은 다들 抗日獨立鬪士가 되고 싶어 했다. 

    萬若 정대협이 좀더 融通性을 發揮하는 立場이었다면 政府로서도 좀더 柔軟하게 協商 테이블에 나설 수 있었다고 본다. ‘돈 몇 푼에 靈魂을 팔았다’는 소리를 繼續 들을 바에 政府로서는 運身의 幅이 좁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2015年 慰安婦 合意는 사이토 안보다 決코 水準이 높지 않았다. 그런데 文在寅 政府는 再協商하겠다고 하면서 日本에서 받은 돈도 돌려주지 않고 깔아뭉개놓고 있는 狀況이다. 被害者 中心主義를 외치지만 正義記憶連帶 中心主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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